타인의 슬픔1
문득 의자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의자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으므로
제 풀에 주저앉았음이 틀림이 없다
견고했던 그 의자는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인 적이 없으나
스스로 몸과 마음을 결합했던 못을
뱉어내버린 것이다
이미 구부러지고 끝이 뭉특해진 생각은
쓸모가 없다
다시 의자는 제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
태어날 때도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다
- 시집 『타인의 슬픔』(연인 M&B)에서
[시 읽기]
제목에 끌리는 시집이 있다. 『타인의 슬픔』이 그러한 경우이다. 가슴 저 밑바닥에 있는 우물에서 찬물을 길어 올리는 느낌이다. 나호열 시인의 ‘타인의 슬픔’은 자기 세계에 매몰되어서 자기 밖을 보지 못하는 현대인을 적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가만 중얼거려본다. 나는 과연 나의 슬픔을 아는가 남의 슬픔을 짐작하고 있는가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리 풍부하지 않은 식견으로 ‘우리의 추상적 사고를 담는 도구가 바로 언어’라고 풀이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창조적이고 무한한 감정을 표현한다. 언어라는 기호가 아니었으면 ‘사랑, 슬픔, 기쁨, 외로움’ 등등의 감정을 어떻게 나타내었을 것인가 김춘수 시인의 '꽃'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시인은 미지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여 언어로써 명명하는 사람이다.
나호열 시인은, ‘나의 슬픔’을 ‘타인의 슬픔’으로 치환한다. ‘의자’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고찰한다.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인 적이 없’었으나,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결합했던 못을/ 뱉어내버린’ 의자. ‘눌림’은 삶의 중압감을 뜻한다. 경기가 좋지 않아 실업률이 높고 취업하기 힘든 현실, 그것에 따르는 삶의 고뇌라 가정해본다.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약자는 정말로 비참하다. 호구지책은 ‘못’으로 표현되고, 그것은 개개인의 강렬한 집착과 의욕을 내포한다. ‘이미 구부러지고 끝이 뭉특해진 생각’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예고 받은 존재이다. 이 시에는 그런 운명적 슬픔이 가득하다.
나호열 시인은 갈파한다. ‘의자는 제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다’. 그러므로 남을 돌아볼 줄 알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좀 더 능동적으로 살도록 노력해야한다고.
고성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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