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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세상과 세상 사이

造花의 꽃술을 들여다 보다

by 丹野 2009. 2. 19.

          

 

                  造花의 꽃술을 들여다 보다
                                                 - 김정윤의 시세계

 

 

                                                                                   나호열


  
  1.
  
   요즈음 나는 시를 읽지 않는다. 쓰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뜬금 없이 시의 범람 속에 갇히다 보면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해야 하거나 아니면 억지로 침묵해야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 지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시들, 시인들 틈에서 시인 행세하기 어렵고, 시다운 시를 읽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과연 이것이 시일까? 과연 이 사람이 시인이 맞나?' 하는 편협한 의문에 사로잡히기보다는 낮잠을 자는 것이 훨씬 편할 지도 모르겠다.
  책방에 가 보라! 한 쪽에서는 예쁘게 분칠을 한 포장된 베스트셀러가 1위부터 10위까지 배열되어 있고, 다른 한 켠에서는 수많은 시집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어두컴컴한 창고에 천덕꾸러기가 되어 갇혀 있다가 무게로 달려 팔려나가는 운명에 처한다. 세상에는 아직 해야할 사랑도 많고, 치루어야 할 이별도 많으며, 사탕발린 그리움에 목매어 우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 수많은 시인들이 그 숙제에 매달려 평생을 보내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짝사랑에 불과하다. 한 때의 바람처럼 연애편지에 옮겨 적을 감미로운 구절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밤을 새워야 하는 시인의 운명이라니!
  순수한 감정의 유출을 시의 순수성이라고 믿던 낭만주의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신기하고, 기발한, 그러면서도 온갖 촉수를 자극하는 시가 아니면 이 땅에서 시인으로 살아남기 어렵다. 스스로 생산하고 스스로 소모하지 않으면 안되는 프로슈머prosumer의 입장에서 보면 말년에 친일문학인으로 낙인찍혀 처참해진, 그러나 문학이, 시가, 대중화될 수 없는 저 높은 곳의 예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한 시인의 말씀은 참으로 요원한 등불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시인이란 모름지기 시를 통하여 叡智의 경지로 들어서려는 고통을 자처한 고독한 순례자라고 정의한다. 찰라적인 사물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존재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며, 결국은 無碍하고 無量한 삶의 자유를 터득하는 것이 시인의 경지임을 설파한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 얼마나 될 것인가!
  시는 萬波息笛 같은 것이다. 그 옛날 이명래 고약 같은 것이다. 소태같은 것이다. 시는 고달픈 자에게 더 큰 고달픔을 보여주고, 희망을 갈구하는 자에게 희망보다 더 큰 절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줄기 찬란한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칠흑보다 더한 어둠이 오래 곁에 머물러야 하듯이, 시는 칡물처럼 오래 씹어야 제 맛이 나오는 기다림의 결정체이어야 한다.
  플라톤은 시인은 모방을 천형으로 지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시인이여! 스스로 추방당하라'고 외친 그의 말을 곰곰히 되씹어 보면 시인이란 아무래도 호시탐탐 해방을 꿈꾸는, 언어라는 괴물과의 사투에서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 투철해야 함을 느낀다.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주체적 자아와 객체적 자아의 분열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그 분열의 틈 사이에서 독버섯처럼 돋아나는 언어의 빛깔을 식별하고,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시간에 길들여진 타성을 타파해 나가면서 앞으로 기어 나아가는 무모한 몸짓의 행위자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언명은 이중의 진리의 가치를 가진다.
  말이 길어졌다. 나는 요즈음 시를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 시를 거듭 읽다 보면 눈만 아리고 아파 올뿐이며, 몇 줄 써보려고 하면 왠지 나 자신에게 사기 치고 있는 듯한 모멸감을 어쩌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적인 입장에서 보면 시인은 철저히 가면을 쓰고 자신과 대면하고 있는 대상과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관찰자로 자리잡는다. 시는 시이고, 시인은 시인일 뿐이다. 생산자인 시인과 생산품인 시와의 이 소외는 무엇으로 극복될 수 있을 것인가?        
  한 편의 시를 읽는데는 고작 일 분이 소모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 편의 시를 소화해내는데 평생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시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증권시세나, 일기예보와 같이 변화를 생명으로 하는 무한지향의 정보가 아니라 일상 속에 감춰지고 함몰되어 있는 사물과 사건의 가치를 되새기게 해 주기도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한 편의 시를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향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듯이 독자의 독해 능력에 달려 있다. 창부처럼 누구에게나 달려가는 시는 가슴속에 보석처럼 빛나는가 하면 쓰레기통에 처박히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시를 읽는 사람은 감별사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면 좋겠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시는 저절로 행복해진다.

 

 

 


  
  2.
  
  그가 찾아왔으므로 나는 그와 이야기한다. 일방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나는 무뚝뚝하게 토막 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내가 누구인 것 같아요?' 
   한 편의 시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다. 현실적 메시지이든, 사물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하든 시의 평가는 삶의 秘意를 얼마만큼 의미화하였는가로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다. 그러나 한 권의 시집은 아무래도 시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시인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쪽으로 몸을 틀게 만드는 것이 상례이다. 
사지도 않을 상품들을 배회하게 만드는 백화점처럼 다양한 관심과 기법으로 진열된 시집이 있는가하면, 하나의 주제나 소재에 천착한 시집도 있다. 어째든 한 권의 시집은 그림 찾기 퍼즐처럼 정밀한 풍경을 지향한다. 
  나는 게으르게 원고를 읽어내려 간다. 슬라이드처럼 풍경의 조각들은 조금씩 이야기의 중심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그는 상실을, 덧난 상처를, 삶의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은 아름답다든지 살아볼 만하다든지, 좀 더 개혁과 변화가 필요하다든지, 어째든 빨리 빨리 결론을 듣고 싶은데 도대체 이야기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계속 중얼거리고 있고,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중얼거리고 있다. 
   '외로웁구나, 그는 말을 걸고 싶어하는구나, 그는!'. 나는 원고를 덮고 나서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이제는 내가 그에게 이야기할 차례이다. 이 땅의 수많은 시인들 중의 하나인 내가 , 역시 이 땅의 수많은 시인들 중의 하나인 그에게 말을 걸고자 한다. 70 편이 넘는 그의 시가 내게 물은 '내가 누구인 것 같아요?'에 대해서 우답을 내려 볼 참이다. 
  시는 정직하다. 아무리 가면persona 으로 자신을 속이려 해도, 시는 정확하게 자신을 생산한 시인의 모습을 드러내준다. 시인은 삼라만상의 고독한 관찰자이다. 관찰을 통해서 자신을 반성하고, 반성의 중얼거림이 독자들의 각성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시, 훌륭한 시는 고통이 수반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당 서정주는 시를 감각적인 시, 정서를 주는 시, 그리고 최고의 경지인 叡智의 시로 나누면서 자신은 살아 예지의 반열에 든 시인을 보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예지는 圓融이며, 大道無門이며 삶의 절정인 것인데, 시를 한갓 입신양명의 도구로 보거나 거짓 깨달음과 거짓 체험을 얼버무려 독자들을 현혹하려는 자세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감각이 절실하면 정서가 우러나고, 정서가 극진하면 예지의 眞景이 드러나는 것인데, 무르익지 않은 지식과 豫見으로 체험을 무화시키는 머리로 쓰는 시들이 횡행하는 현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가짜 시인들을 더욱 기승부리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지의 경지에 다다르기에 生은 너무 짧다. 예지의 경지는 성인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시인은 그 초월의 숨턱까지, 아니 그 숨턱을 넘어서려는 바보같은 짓을 계속하는 존재로 정의 해 두자. 그러고 보니 너무 이야기의 핵심과 멀리 떨어져 나왔다. 하여튼, 시인은 관찰을 멈추지 않을 때, 내 앞에 놓여진 사물을 해방시키고, 인간과 사회에 흐르는 간격을 보다 부드럽게 완충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모름지기 시인의 할 일이란 현상에 대한 해명이 아니라 현상에 부딪치는 반응의 기록을 보여주는 것이다.   

 

 

 


       
   3.

   김정윤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반경은 매우 좁다. 죽음이라든지, 그리움이라든지,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든지 주변에서 쉽게 다룰 수 있는 추상적 관념을 벗어나지 않는다. 폭발적인 이미지의 생성도 없고, 메시지의 강열함도 엷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리얼리티와 순정성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그가 사물에 부여하고 있는 끈끈한 애정과 연민에서 비롯된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감정의 과도한 분출을 억제하고 話者와 대상과의 거리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띄어 두려는 시적 자아를 견지하려고 하는 건강성에 있다. 교과서적으로 배운 대로 그의 시를 분석해 보기로 하자. 표현된 내용? 기법? 나는 여기서 김정윤의 시를 대별하는데 화자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살펴볼 참이다. 
우선 첫 번 째로 화자가 관찰자가 되어 소재가 되는 대상을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경우이다. 
   
봄 풍경을 
바람처럼 흐르다 보면 
푸른 종소리 들린다 
머언 
우레소리에 깨어난 
꽃잔디, 제비꽃, 금강초롱, 
마가렛, 붓꽃  
온몸의 향기를 
빛살로 씻어내려 

눈멀고 
귀멀어 버린 
다정한 이웃에게 
밝고 환하게 들려주는 
마알간 속삭임 
뎅~데엥

                    -「봄의 소리」전문 
 
위의 시는 시각적 이미지를 청각적 이미지로 전환하는 기법을 보여준다. 꽃핌의 미세한 떨림이 종소리로 치환되면서 그 꽃핌의 의미가 눈멀고, 귀 멀어버린 각박한 이웃들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행위로 표현된다. 꽃핌의 시각적 의미만으로는 삶의 연대의식을 어찌 드러낼 수 있으랴. 구도의 종소리가 꽃 핌, 눈멀고 귀 먼, 각박한 이웃이건만 시인에게는 그들은 여전히 다정한 이웃이 되는 까닭은 참회와 화해로 상징되는 종소리 때문이다.

두 번 째로 의인화된 시적 대상이 發話하는 경우이다.

섭씨 30도
멈출 수가 없다
부르르 떨며
돌아야 한다

그것만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멈춤 버튼이 켜질 때까지
                           「 어느 여름날」 -선풍기 전문

  이 시는 죽을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심장의 박동을 연상하게 한다. 우리의 체온은 36도에서 37도 사이를 넘나든다. 그러나 우리 몸의 바깥 기온이 30도를 넘어서면 우리는 더위를 느낀다. 심장은 우리 몸 속에 숨어 있는 상태로, 더위를 느낄 새도 없이 피를 뿜어 올린다. 멈춤 버튼이 눌러져야만  긴 노동을 멈추어 서는 선풍기의 운명은 바로 우리들의 운명이다. 그러나 주의해서 보라, 멈춤 버튼이 눌러지는 것이 아니라 켜지는 것이다. 작지만 '멈춤 버튼이 켜진다'는 시인의 의식은 어느 禪師나 覺者의 외침보다 값지다. 소멸을 의미하는 꺼짐과 탄생이나 빛을 의미하는 켜짐이 이루어내는 화해의 파동은 실로 간극이 크지 않은가.  

세 번째로 특별한 대상 없이 행위, 또는 정서의 흐름을 통해 시인의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이다.

미친 게 아닙니다
이렇게 비실비실 웃음이 나오는 건
피고름 흐르던 상처에
딱지가 앉았기 때문입니다
언제
당신을 거역한 적이 있던가요
하던 일 멈추고
요구하던 거친 손길
뿌리친 적 없습니다
죄라면
터무니없이 허상을 꿈꾼 죄 밖에는
미어지는 자연을 훔쳐본 죄 밖에는
그걸 가슴에 담아
가슴앓이 한 게 다라니까요
정말입니다
온몸을 찢듯이 가해오는
그대의 학대,
울음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미소를 흘리며
쾌감을 느끼는 매저키스트 입니다

                                              「운명(運命)」전문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러하지만 김정윤도 화자의 객관적 거리를 놓쳐버릴 때. 시의 형상화나 메시지의 전달력이 떨어짐은 매우 우려할 만한 사실이다. 취의나 매제가 선택되지 않거나 .모호할 때 그의 시는 실패한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그의 실험적인 산문시 「담배」같은 경우도 의욕에 비해서 언어의 밀도가 현저히 떨어지고 산문화 되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 번 째 예나 두 번 째 예와 같이 관찰할 대상이 명확하거나 의인화된 대상의 발화가 분명한 메시지를 갖는 경우에 김정윤의 시는 독창적이고 활달한 기조를 유지한다. 길게 언급할 수 없지만 「신발」이나 「자동차」와 같은 시들이 그런 예에 해당된다. 반면에 위와 같이 시인 자신의 직핍적 정조를 드러내는 일련의 시들은 형상화에 실패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다른 각도에서 김정윤의 시를 꽃, 나무, 강과 같은 자연물에 의탁하는 시와 공원, 나무의자. 자동차, 신발, 무덤, 북 등 인공물을 시의 소재로 삼는 경우로도 나눌 수 있다
  자연물에 의탁하는 시들은 대체로 서정으로 기울고. 인공적인 대상을 시의 소재로 삼는 경우에는 문명과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돋보이는 특징이 김정윤의 시에 드러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칸트Kant는 데카르트의 이성적 직관과  경험론자들의 후천적 경험을 함께 아우르는 범주category의 형식을 제안했다. 인간은, 인간 앞에 드러난 사물을 곧바로 인식하지 못하며 범주라는 색안경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시인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범주를 통해서 인식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김정윤의 시편에 드러나는 서정과 비판의식의 양 극점 사이에는 어떤 색안경이 존재하는 것일까?

길눈이 어두운 나를 내려놓고/ 님은 기적소리도 없이 떠나고 말았다

                                   -「기차」일부분

지금쯤 우리 마당에/ 대추가 익고 있을꺼예요/ 수신인 없는 편지를 쓰다가/
마른 흙냄새 풀풀나는/ 적막의 방에서/ 익명의 서랍을 연다//
그대가 혼절하게 그리운/ 팔월 열 사흗날/내 것이라 생각한 모든 것/그대에게 보낸다
                                        
                                   -「수신인 없는 편지」 1, 2연


하늘인지 땅인지 뱅글뱅글 어지러운 /물레에서도 잘 견디었다 창 밖 꽃바람/출렁여도 외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중략
( 사람의 왕래가 없어야 한다/ 슬쩍 스쳐가는 옷깃에도 깨어질 염려가 있다 /이미 금이 갔으므로...)   
          -「도자기」부분

 인용한 위의 시편들을 살펴보면 시의 화자가 시인 자신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이 관찰자의 입장에 머물 때의 장치는 보다 비판적인 시각에 몰두하지만 정서적인 측면에 기울 때, 즉 시인 자신의 체험에 의존할 때에는 김정윤의 시는 직정적이다. '님'이나 '그대'로 표현된 존재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기차처럼 떠났으며, 그 때는 팔월 열 사흗날(?)이며, 그가 떠남으로서 시인의 삶은 금이 갔으며, 그 이후 깨어지지 않으려고 사람이 왕래를 거부하는 의지를 표명한다. 그리하여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문이 없는 허공이며,「지하철」, 정을 들여야 하는/ 정이 들지 않아도/ 정이 무엇이지요 -「취음제에서」일부분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아무리 해도 정이 들지 않는 낯설음의 세계이다. 그래서 시인은 극단으로 자신의 존재를 밀고 나아간다
    
하루 중 가장 쓸쓸한 시간을 택해 / 섬은 눈을 뜨고//
하루 중 가장 쓸쓸한 시간을 택해 / 섬은 눈을 감는다
                                                       「섬」    
가장 쓸쓸한 시간은 우리의 의식이 활동하는 시간이며, 결국은 하루 24시간의 전부이다. '섬'이라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격절의식이 김정윤의 의식을 가로지르는 색안경이며, 범주이다. 追體驗이 아니라 온몸으로 몸소 겪은 고통을 기어가면서 쓴 김정윤의 시는 그러므로 충분히 음미할 만 하다.   

 

 

 

       

4.
 김정윤의 시가 개인사에 머문다면 낭패감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많은 시인들이 참담한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는 자신의 사유나 체험이 특수하고 절실한 것이라는 믿음에 있다. 만일, 김정윤의 시 쓰기가 자신의 고통을 가여워 하거나 스스로를 위무하는데 한정된다면 그 역시 그렇고 그런 시인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의식의 남다름은 이 세계에 대한 근원적 해명으로 길을 잡은 데 있으며, 그 길 찾기가 충실하게 고통을 감수하면서 험로와 애로를 통과하면서 얻어내었다는데 에 있다. 그는 삶의 허무성과 허무에 길들여지는 일상성을 딛고 보다 냉철하게 이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造花의 세계'이다. '조화의 세계'는 일견 불교의 근본의식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몇몇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김정윤은 佛門을 드나드는 사람인 것 같다. 불경을 읽었다고 해서 불제자가 아니오, 바이블을 읽었다고 기독교인이 아니듯이 發心없는 종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하여튼 「조화」연작은 생명에 대한 불교의 여러 견해들을 상기시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확신하건대, 김정윤의 「조화」연작이 불문에 연이 닿아 이루어낸 의식이 아니라, 스스로의 생각과 관찰과, 경험의 길눈을 열어나간 소산이라는 점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비극이다/ 꽃도 아닌 것이 /꽃보다 더 화사하다  
                                            「조화.1」1 연

우리는 造花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가짜인 조화는 삶의 효용면에서 진짜 꽃보다 훨씬 가치가 높다. 플라스틱 조화에는 생명의 신비가 없다. 영원히 지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다. 그저 보기에만 좋을 뿐,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의 욕망은 대부분 가짜이다. 부와 명예와 같은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는 가짜에 불과하다.    
       
가느다란 가지 하나/ 물관을 통해 바다를 길어 올린다 

                                              「조화.1」마지막 연

영원한 삶을 희구하며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을 조화와 같은 사상과 사물을 잉태하려고 하지만 조화에는 바다를 길어 올리는 생명 현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인간의 비극은 윤회의 수레바퀴를 거부하는데 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 인간은 끊임없는 권태에 시달린다. 「조화. 2」는 성형미인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 조화에 싫증난 인간들이 버린 플래스틱 조화들도 다시 잘 씻으면 새것이 된다는 것을 사실로부터 인간 자신을 뜯어고치는 성형의 차원으로 조화의 의미를 확대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인간은 삼라만상의 모방으로 만족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를 조화의 반열에 올려놓는 위험한 모험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홀몬 주사 한 번으로 주름살을 제거하고. 이목구비를 두부 자르듯 덜어내고 붙이는 일들이 오늘날의 인간들의 내공이 부족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세월을 이길 수는 없어도 세월을 참아낼 수는 있는 것!

공해에/ 제대로 수명을 다하지 못해도/ 한번에 팍! 시들고/제대로 썩을 줄 아는/ 한 송이 살아 있는 꽃/
                                              「조화. 2」 마지막 연

이쯤에서 조화의 의미는 불가에서 말하는 차별상이 없는 眞如의 세계와 노장의 無爲自然의세계가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계기를 맞이한다. 「조화. 3」은 조화 속에 함몰되어 스스로 조화를 즐기는 화자의 자각과 그 조화마저도 낙화를 꿈꾸고 있다는 섬찟한 사실의 고백이다. 김정윤의 「조화」 연작은 어설픈 경전 읽기나 분위기에 휘둘려 이루어 진 작품들이 아니다. 그가 진단하고 있는 오늘은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다'라는 불가의 가르침이 통용되는 세계가 아니고,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의 법칙이 유효한 세계도 아니다. 이미 문명의 시스템은 '소비 욕망'의 매커니즘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조화. 7」과 「조화. 8」은 사랑과 이별의 회한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나, 그가 진정으로 드러내고 싶은 것은 더 나아갈 데 없는 절규의 목소리이다. 달빛이 찬란한 고문이 되어 꽃을 피우거나 길 속에 길이 있고 길 밖에 길이 있는 아수라 속에서 절벽 위에서 또 길을 잃는 현대인에게 김정윤의 시는 위안대신 차가운 일침을 덧놓을 뿐이다 

깊은 밤 
지경 들판 반듯한 무논에 
우주가 열리고 
골따라 심겨진 벼포기에 별이 핀다

수근대는 숲 
휘청대는 절망 끝에서
판토마임을 하는 하얀 얼굴 
내가 누구인가 
나를 찾아주시오 제발!!
소리를 찾아나선다 
허공 속의 손짓 발짓 
굳어버린 파란 입술 
넋이 빠져버린 나그네 그 모습은 
피를 토하듯 
온 몸으로 울음우는 형벌의 꽃 

깊은 밤 
지경 들판 반듯한 무논에 
우주가 열리고 
골따라 심겨진 벼포기에 달이 핀다 


                                 「造花. 6」전문


 나는 「조화. 6」을 이 시집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고 싶다. 이 시가 여타의 시들에 비해서 언어의 구사나 형상화에 훨씬 윗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이 시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은 시들이 산재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원로 시인 김춘수는 어느 텔레비전 대담 프로에서 자신의 창조적 시의 작업은 50대에 이미 끝났으며, 지금은 그 반복 작업으로서, 외로워서 시를 쓰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지금 원로시인의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논은 우리의 양식인 쌀을 생산해 내는 벼가 자라는 땅이다. 그 벼포기에 별이 피고 달이 핀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 나그네는 온몸으로 울고 있는 별이고 달이다. 광물인 별과 달이 어찌하여 식물인 벼포기에 피어야 하는가? 나는 이 시에 깊은 주석을 달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단지 이 시가 시인 김정윤의 개인적 격절의식으로부터 시작한 고독한 순례의 마지막 노래인 것만을 기록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시인의 정직성은 고뇌의 진실한 기록에서 시작한다. 거듭되는 기록의 중첩으로부터 시인의 영감과 광기가 뿜어져 나오기도 하고, 쓰잘데 없는 넋두리가 새어 나오기도 한다. 넋두리는, 중얼거림은 침묵되어야 한다. 
김정윤은 조화의 꽃술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이다. 조화에 무슨 꽃술이 있을 것이며, 꽃가루가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