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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좋은 시와 새로운 시 / 황정산

by 丹野 2009. 2. 19.

                  

 

             좋은 시와 새로운 시

 

                                             황정산(문학평론가, 대전대 교수)

 

 


월평은 대개 그 달에 발표된 좋은 시를 추천하기 위해 쓴 글이다. 하지
만 무엇이 좋은 시인지를 말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좋다’라는 것은
가치를 나타내는 말이고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
라 너무도 많은 다른 생각들이 존재한다. 한편에서는 미학적 아름다움을
가져야 좋은 시라고 우기고 또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읽고 감동하는 시가
좋은 시라고 강변한다. 어떤 이들은 시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시가 시대의 아픔을 담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좋은 시를 말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지극히 주관적이고 일방적
인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많은 위험성을 무릅쓰고 무모하게 말하자
면 좋은 시는 새로운 시가 아닐까 한다. 사실 대개의 좋은 것들, 가치 있
는 것들은 오래 된 것들이다. 오래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안에 가치 있
는 것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는 그 반대이다. 낡고 진부
한 언어에 저항하는 것이 바로 시이다. 시는 상투성에 대한 저항이고, 오
래되어 굳어진 관념들을 걷어내는 언어의 갱신이다.
그런데 새롭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듣도
보도 못한 언어의 난행을 일삼으면서 그것이 새로운 언어, 미래의 언어라
고 강변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낡은 포즈와 유행이 된 지 오래
되었다. 최신의 것을 따라한다고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새로움
을 낡게 만드는 또 다른 상투성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시들이 과연 새로운 시일까? 지난 호에 나온 시들에서
그 새로움을 찾아보자.
시가 새롭다는 것은 시의 뜻이 새롭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시의 뜻이 새롭다는 것이 무슨 대단한 사상이나 철학의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가 해야 할 바는 아니다.
다음 시를 보자.


말의 가시를 뽑으려다
가시에 찔렸다
말로 인해 몸이 아프다,
내 살 속에서 네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프니 너 또한 아프지 않은가,
바늘 같은 가시 둘을 나란히 놓아둔다
아프지 않은 말은 인(仁)하지 않다는 듯,
가시를 견디려면
아프게 이야기해야 한다
네가 준 말을
살 속에 깊이 묻어둔다.
-염창권,「 論語」(월간『우리詩』2008년 7월호)


논어에 나오는 인仁에 대해 새로운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서로를 찌
르는 행위가 인이라고 시인은 인仁자의 형상을 빌어 말하고 있다. 재미있
는 발상이다. 그런데 이 재밌고 새로운 해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
게 해 준다. 우리는 인을 실천하라고,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라고 많이
들어왔다. 사랑하고 이해하는 것은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를 찌르는 것이고 그것은 곧 아픔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개인들이 살아가
는 현대사회에서 인간들은 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그래야 서로
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삶에는 사랑도 없고 인
仁도 없다. 이 시에서 말하고 있듯‘아프지 않은 말은 인仁하지 않다.’진
정한 사랑, 진정한 인仁의 실천을 위해서는 아픔을 감내해야 한다. 이 시
는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새로
운 인식을 통해 기존의 인이나 사랑이라는 언어에 부여되어 있는 낡은 개
념을 우리는 다시 돌아보게 된다.
새롭다는 것은 감각의 새로움을 말하기도 한다. 익숙한 감각으로부터 새
로운 자극을 얻지 못한다. 새로운 자극이 없이 새로운 언어가 있을 수 없
다. 곧 새로운 감각을 얻는다는 것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음 시는 처음 보는 사물에 대한 감각을 아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피아노 위에 올려놓은 캄보디아 악기, 활로 두 개의 현을 그으면
끈끈한 멜로디가 또아리를 풀고 스멀거리며 감겨온다 굴촉성인 이
찰현악기, 이름은 모른다 무더운 염천, 얌나무 그늘에서 오불에 흥정
했다 아이가 켜던 활 끝에는 크메르 루즈의 붉은 천이 묶여있었다 무
슨 연맹과 여맹, 자아비판의 뜨거운 색, 아이는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
에 악기를 넣어 주었다
여행 내내 가죽을 씌운 파파야 통에서 낮은 소리가 웅얼거리는 듯
했다 국경에 구릿빛의 험상궂은 군인들, 객실에 가방을 올려다주며
돈을 걷어갔다
여름밤, 악기를 안고 켜면 서늘한 멜로디를 따라 굼실굼실 줄지어
나오는 사람들, 손을 뒤로 묶이고 검은 비닐봉지에 머리를 묶인 사람
들, 숨이 활 끝에서 펄럭거린다 벌떡 일어나 가위를 가져온다 바닥에
널브러지는 붉은 뱀
- 서영처,「 붉은 천」(격월간『정신과표현』2008년 5,6월호)


파파야 통으로 만든 처음 보는 캄보디아 현악기를 소재로 쓴 시이다.
시인은 이 악기가 주는 감각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악기의 모습에
서 그리고 악기의 소리에서 시인은 캄보디아의 아픈 역사와 그 역사 속에
살아온 사람들의 고통을 느낀다. 사람들을 사형시킬 때 쓰는 검은 보자기
와 이념의 붉은 깃발의 느낌이 이 악기의 모습과 소리에 고스란히 간직되
어 있다. 그것을 시인은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그 감각으로 새로운 사물인
이 현악기를 우리 앞에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운 감각으로 시인에
게 포착된 이 현악기는 조악한 기념품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게 된
다. 그것은 시와 예술에 대한 시인 나름의 새로운 감각적 인식이다. 역사
의 격랑과 폭력적 권력의 지배를 지나면서 무력하고 무용한 골동품이 되
어 버린 악기처럼 우리 사회에서 시와 예술이 가지는 비극성에 대한 감각
적 인식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새로움은 관계의 새로움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 존재의 의미는
서로간의 관계 맺기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관계 속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그 인간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익숙한 인간도 관계
맺기에 따라 새로운 인간이 되고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된다. 이
러한 관계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 역시 새로운 시가 보여줄 수 있는 중
요한 성과 중의 하나이다.


항상 내가 자작하게 하는 남자 술잔이 비워진 채로 있어도 내 잔에
스스로 술을 채워도 자존심 상하지 않게 하는 남자 취하고 싶게 하는
남자 정지용 시인의 서마서마*를 섬아섬아 섬을 부르는 소리라고 말
하는 남자 집 팔고 땅 팔아 영종도 땅 사서 같이 살자던 남자 방파제
바위 위에 신발 벗어 베개 삼아 누워 코 곯고 잠자던 남자 아침에 신
문에서 읽은 시 구절을 말하며 진짜 시의 주인공이 되어 아이처럼 하
느님이 주신 손을 쓸까 엄마가 주신 포크를 쓸까 고민하던 남자 내가
십 년 동안 미워하던 남자 눈 감고 바위 위에 누우면 폭풍 뒤의 해풍
이 자꾸 내 얼굴 내 잠을 깨우고 차오르는 물살이 까마득한 이야기들
을 쉬지 않고 들려주던 영종도 바닷가 그 바위 그 남자!
􄤎�서마서마 : <무서운 시계> 중에서)
-김경란,「 섬에 안겨」(계간『시안』, 2008년 여름호)


영종도 바닷가에서 사랑을 고백한 남자와 시인은 지금 결혼해서 살고
있다. 그 남자와 사는 것은 섬에 안겨 사는 것 같다는 것이 시인의 느낌이
다. 최초에 그 섬은 큰 기쁨을 함께 하는 공동의 공간이었다. 그 섬에서
같이 살고‘신발 벗어 베개 삼아 누워 코 곯고 잠’잘 수 있을 만큼 편안한
행복을 느끼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제 그 남자는 10년 동안 미워할 수밖
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왜 그럴까? 그것은 관계가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섬에서 함께 살자던 그 남자는 이제 스스로 섬이 되었다. 그것은 결혼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에서 섬은 존재들 간의 거리를 말
한다. 섬에서의 행복은 둘만의 방해받지 않는 행복과 사랑을 말한다. 하
지만 결혼 후에 그 남자는 스스로 섬이 되고 만다. 이렇게 이 시는 관계
속에서 인간 존재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시의 상상력
이고 시의 새로움이다.
시가 새롭다는 것은 대개는 표현의 새로움이다. 이제까지 없던 말의 새
로움 이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사, 그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바
로 시가 할 일이고 시의 언어적 효과이다.


순교자의 피라도 스며들었는지
색이, 색스럽지 않고 마음이 아릿해지는 꽃
제비꽃을 말려놓았다가 한지 창문을 바른다
지난겨울 아이가 손가락을 뚫어놓은 구멍을
이제사 봄도 지나고 여름 초입에 막는다
얇은 균열 사이로 바람이 들락거려
겨우내 뼈가 시렸다 바늘구멍으로 드는
바늘 바람에도 뼈 시린 적 많았다
마른 꽃을 심어놓은 안방 어둠 속
불을 켜지 않고 압화처럼 누워있다
시시각각 나는 살아 있다. 시들어 가고 있다
박제된 시간이 생생하다
꽃이 숨어 있는 방이 생생하다
아이는 제 방에 잠들어 있고
남편은 축구를 보고
살아 있는 자들은
사라진 순교자들의 피를 끝없이 수혈받는다
제비꽃을 심어 놓은 안방에 누워 있으니
몸이 자꾸 열린다 목울대로 체액처럼
꽃비린내가 꼴깍꼴깍 넘어간다.
-권현형,「 제비꽃」(계간『시와상상』2008년 여름호)


이 시의 시적 표현의 새로움은 아이러니에 있다. ‘나는 살아 있다, 시
들어 가고 있다’를 함께 하는 아이러니가 이 시의 가장 두드러진 표현상
의 새로움이다. 그것은 곧 다음 연의‘박제된 시간이 생생하다’하고 연결
된다. 박제가 생생하다는 것은 어쩌면 형용모순이다. 그런데 이 시는 바
로 이러한 형용모순으로 시적 새로움을 만들어 낸다. 마른 제비꽃 압화를
한지에 바르는 행위를 하면서 시인은 그 꽃에서 자신을 본다. 박제된 꽃
처럼 시인 역시 집 안에서 말라간다.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안에서 시인
은 시들어 존재감을 잃어간다. 하지만 그것이 살아 있음을 또한 증명하는
것임을 시인은 알고 있다. 박제된 시간이 생생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
인은 이런 아이러니를 통해 자신의 삶의 성격과 의미를 바라보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시적 표현이 새로운 언어적 힘이 되는 효과를 이
시에서 우리는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시와 시심이 가지는 이러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
이고 괴로운 것인지 다음 시는 우리에게 아주 실감나게 보여준다.


후드득 떨어지는 열매를 맞은 적이 있다
어린 종처럼 달려 있던 은행 열매들이
우르르 종소리로 날아오다
망원동을 지나던 내 정수리를 명중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얼른 정수리 뒤 쪽으로 소천문을 더듬었지만
다행히 문 안에서는
생후 8주를 삼백 번 지나도록 마르지 않은
엄마의 푸른 양수가 찰랑찰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쪼글쪼글하게 비틀린 열매가
반 쯤 열린 소천문의 문설주 사이로 들어가
가라앉은 샘의 밑바닥을 젓고 퐁당거리기라도 했다면
옹알이하던 세포들 다시 광합성을 시작하고
아장아장 걸어서 유치원도 갈 수 있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정수리를 탕 치고 떨어져 나간
말라빠진 은행 열매는
그나마 열려있던 소천의 문까지 꽝 닫아버린 것이다
지독히도 재수 없던 그날 이후로
소천문 안에서
부평초 플라나리아 소금쟁이가
두개골을 할퀴며 문을 열라고 울어댔다


시인은 그것을 애써 열어 꺼내려고 한다. 하지만 일상적인 삶은 곳곳에서
그것을 막는다. 일상적인 삶이 주는 충격들이 조금이나마 열려있는 창조
의 샘을 막아버리고 만다. 시와 언어의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얼마
나 지난한 일인가를 그리고‘두개골을 할퀴며 문을 열라고 울어’대는 것
처럼 새로움을 찾고자 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이 시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시인은 매일 갱신해야 한다. 아니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황정산

􄤎�고려대 불문학과 및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시인.

대전대학교 교수. 저서로『쉽게 쓴 문학의 이해』『주변에서 글쓰기』등이 있다.
􄤎�rivertel@hanmail.net

 

출처 / 우리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