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動說과 地動說, 創造論과 進化論
갈릴레오와 다윈의 경우
宋 相 庸 (전 성균관대 교수)
인류가 만든 두 위대한 문화적 유산 종교와 과학은 착잡하고도 미묘한 관계를 맺어 왔다. 이 둘의 관계를 다룬 19세기 후반의 책들은 당시의 극단적인 합리주의를 반영하여 대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레키의 「유럽의 합리주의 정신의 흥기와 영향의 역사」(1865), 드레이퍼의 「종교와 과학의 투쟁사」(1875), 화이트의 「과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의 투쟁사」(1896)는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쓰여진 버트란트 라슬의 종교와 과학 (1935)도 같은 계열에 속한다
1938년 미국의 사회학자 머튼은 17세기의 영국과학의 발전은 퓨리터니즘에 의해 촉진되었다는 놀라운 주장을 폈다. 중세 후기의 방자한 합리주의가 근대과학의 기초가 되었다는 화이트헤드의 견해와 함께 ‘머튼 명제’는 아직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종래의 시각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이후 과학과 종교 사이에 타협 내지 협조를 찾아보려는 시도를 한 많은 책들이 나왔다. 그러나 과학과 종교가 역사상 끊임없이 갈등을 빚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는 그 대표적인 예, 갈릴레오와 다윈의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Ⅰ. 갈릴레오의 경우
과학과 종교의 최초의 충돌은 ‘과학혁명이 일어난 17세기에 우주론을 둘러싸고 터졌다. 1543년에 발표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우주체계는 중세의 사고체계를 온통 뒤흔들 혁명적인 의미를 함축한 것이었지만 별 탈 없이 넘어 갔었다. 그는 교회의 신임이 두터웠고 그가 죽을 무렵 나온 책은 라틴말로 쓰여졌기 때문에 대중에 대한 영향은 거의 없었다.
문제는 반세기 이상이 지나 코페르니쿠스의 지지자 갈릴레오에서 일어났다. 본디 역학자인 갈릴레오는 우연히 망원경을 만든 것이 계기가 되어 천문학에 끼여들었다. 망원경에 의한 천체관측은 2천년 동안 끄덕 없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이 틀렸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609년 달의 정체가 밝혀지고 목성의 위성들이 발견되자 대중의 열광은 극에 이르렀으며 갈릴레오는 일약 유명해졌다.
가톨릭 교회는 갈릴레오의 발견을 크게 환영했다. 그는 로마에 불려가 교황 바오로 5세의 환대를 받았고 성대한 축하행사에 참가했다. 예수회 소속 천문학자들도 갈릴레오를 찬양했다. 유일한 반대세력은 대학에 자리잡고 잇는 소수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들이었다. 갈릴레오가 옹호한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첫 공격은 평신도와 하급 성직자들에게서 나왔다.
지구가 돈다는 것이 성서와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의가 제기되었다. 성서에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은 없으나 태양의 움직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구절들이 시편, 이사야, 여호수아 등 구약의 곳곳에 보인다. 이렇게 해서 쓰여진 것이 「크리스티나 대공작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신학적 반대를 침묵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 효과는 정반대로 나타나 코페르니쿠스의 금지와 갈릴레오의 몰락을 가져왔다.
갈릴레오는 태양중심설을 가설이라고 했으나 대담하게도 성서는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령은 하늘나라에 가는 방법을 가르칠 뿐, 하늘이 어떻게 가는가는 말해 주지 않는다.”고 재치 있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몇몇 성직자들이 갈릴레오를 고발했다. 교황청에서는 가톨릭 교의에 어긋남이 없다고 해서 이를 기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에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갈릴레오의 혐의가 풀린 지 석달만에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뒤늦게 수난을 당했다.
1616년 교령이 나왔다.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수집명령을 받았고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성서를 조화시키려 한 포스까리니 등의 책이 금서목록에 올랐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책은 무사했다.
일종의 근신처분을 받은 갈릴레오는 7년 동안 아무 것도 쓰지 않고 보냈다. 1623년 새 교황에 선출된 우르바누스 8세는 “교회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규탄한 일이 없다. 그것은 이단이 아니라 다만 경솔했을 뿐이다”고 말하면서 갈릴레오를 격려했다. 갈릴레오는 교황의 동의를 얻어 「두 대우주체계에 관한 대화」를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4년 걸려 탈고하여 2년 동안 복잡한 검열을 거쳐 1632년에 나왔다.
책을 받아 본 우르바누스 8세는 노발대발했다. 그는 갈릴레오에게 속았다고 생각했고 책의 어떤 부분에서는 자기가 모델이 되어 우롱 당했다는 오해마저 했다. 이 문제를 조사한 특별위원회는 갈릴레오가 첫째,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설로 다루지 않고 절대적으로 주장했고, 둘째, 조석을 지구의 운동 탓으로 돌렸으며, 셋째, 1616년의 교령을 무시했음을 지적하고 이를 종교재판소에 넘겼다.
갈릴레오는 그 해가 저물어갈 무렵 소환되었으나 응하지 않다가 이듬해 교황청에 출두했다. 정식 심문은 사실상 한 번으로 끝났다. 그렇게도 자신만만하던 갈릴레오는 고문의 위협에 그만 소신을 굽히고 말았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생각, 즉 지구의 정지를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심판관들은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건 문제가 아니었다. 교회는 갈릴레오를 죽일 생각이 아니었으므로 그의 굴복 이상을 바랄 까닭이 없었다. 갈릴레오는 신앙 고백문을 읽었다. “...나는 내가 말한 오류와 이단을 포기하며 저주하고 거부합니다....” 판결은 종신징역으로 났으나 곧 자택연금으로 완화되었다.
갈릴레오 재판은 이성과 맹목적 신앙의 단순한 대결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착잡한 요인들이 들어 있다. 우선, 갈릴레오와 우르바누스 8세의 성격의 충돌인 면이 강하다. 둘 가운데 한 사람 만이라도 다른 성격의 사람이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갈릴레오의 처벌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간접 경고로 볼 수 있다. 트리텐티노 종교회의는 성부들의 합의에 반대되게 성서를 해석함을 금지했었거니와 루터파의 멋대로의 해석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이후 이 사건을 다룬 역사가들은 갈릴레오를 권위주의적인 교회에 의해 사슬이 채워진 용기 있는 위대한 과학자로 부각시키려는 경향을 보였고 가톨릭학자들은 반대의 극으로 달려 사실을 간과, 부인하거나 묵힘으로써 단죄를 옹호해 왔다. 문제의 초점은 1616년에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말로나 글로 가르치지 않겠다”는 지시를 교회로부터 받은 일이 있느냐는 것이다. 있다고 믿는 랭퍼드 신부는 갈릴레오가 위증을 했다고 보며, 과학사학자 산티야나는 당시 교회가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가톨릭의 대변자는 아니지만 교회에 동정적인 작자 케슬러는 갈릴레오 사건을 과학의 사회에 대한 간섭 탓으로 보며 반교회의 색채가 강한 산티야나는 종교의 본질적 비관용을 나무란다. 그러나 랭퍼드 신부는 갈릴레오를 비판하면서도 교회가 잘못을 저질렀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갈릴에오 전문학자 드레익은 두 극단적인 견해에 반대하면서 이 사건은 권위와 자유 사이의 본질적인 싸움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갈릴레오는 교회를 공격하지 않았으나 교회는 그 권위가 그의 견해 때문에 위협받는다고 느꼈고, 갈릴레오는 나중에 참이라는 것이 증명될 학설을 공식으로 단죄함으로써 일어날 결과에 대해 미리 경고했을 뿐이다.
새 우주론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것이 루터, 멜란히톤 등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이었음은 사실이지만 가톨릭교회가 과학을 탄압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잠시 문제되었고 그의 학설은 강의가 허용되었다고 하나 흑점에 관한 이론을 비롯해 많은 새 과학의 강의가 대학에서 금지되었다. 가톨릭 국가들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3년 동안 출판되지 못한 것만 보아도 갈릴레오 단죄가 과학에 미친 부정적 영향은 명백해진다.
갈릴레오의 책은 1822년 금서목록에서 해제되었고 이미 과학자 사회의 공인을 받았던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어물어물 받아들여졌다.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는 갈릴레오의 고향 삐자를 방문, 이 과학자를 높이 평가하고 교회의 잘못을 시인했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갈릴레오 재판에 대해 유감을 표했고, 그의 위대함을 아인슈타인에 비교하여 찬양했다.
갈릴레오 단죄의 후유증은 오래 갔지만 파국은 일어나지 않았다. 근대과학의 주역들은 모두 독신자였고, 그 가운데서도 과학혁명을 마무리지은 뉴튼은 정통 그리스도교의 경쟁자로서 理神論을 낳았다. 18세기에는 자연종교(이신론)와 계시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의 옹호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성서가 유일하고 오류를 범하지 않는 신의 계시라는 생각은 격렬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새 과학은 성서의 신령감응의 믿음에 손상을 가했는데, 그것은 첫째, 기계적 철학이 히브리의 자연관과 맞지 않았고, 둘째, 이성의 위신이 높아져 사람들이 사회가 무제한 진보하리라는 희망으로 도취되었기 때문이다.
Ⅱ. 다윈의 경우
우주론 다음으로 종교와 격돌한 것이 진화론이었다. 진화론의 선구자는 그리스까지 올라 가지만 특별창조론에 가려 힘을 쓰지 못했고 비교적 최근에야 과학으로 떠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형상과 구조가 변하지 않음을 확신했으며 중세에 그의 철학이 가톨릭신학과 결합함으로써 창조론은 요지부동의 위치를 굳혔던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의 철학 및 과학계에는 진화사상이 크게 유행했다. 「자연사」를 쓴 뷔퐁은 생물이 유기분자로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무생물로부터 생물로의 진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소르본 신학교수단의 공격을 받고 그의 주장을 철회하는 수모를 했으며 교회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라마라끄는 포괄적인 진화론을 전개한 「동물철학」(1809)을 냈으나 이를 뒷받침할 과학의 매커니즘을 갖지 못했으므로 비과학적 사변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라마르끄의 책이 나온 해에 태어난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진화에 대한 확신을 얻고 돌아왔다. 귀국한 다윈은 경솔하게 그의 결론을 발표하지 않고 생물의 진화를 증명하는 거창한 일을 시작했다. 이 작업은 20년 이상 계속되었다. 그는 수집해온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널리 문헌을 찾아 읽어 보충하고 의문나는 점을 전문가들에게 물어 해결했다. 그리고 그는 우연히 손에 잡은 맬더스의 「인구의 원리」를 읽고 자연선택설을 만드는 결정적인 힌트를 얻었다.
1859년은 역사상 드물게 보이는 해이다. 이 해에 다윈의 「종의 기원」,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출판되었다. 이 책들은 각각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의 세계를 뒤흔들 운명을 타고났다. 과연 「종의 기원」은 나온 날 초판이 다 팔리는 소동이 일어났다. 다윈의 진화론은 두 가지 점에서 선구자들의 엉성한 진화론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첫째, 다윈은 처음으로 자연선택이라는 믿을 만한 진화의 매커니즘을 내놓았다. 둘째, 다윈의 종의 개념은 2천년 동안 내려온 타이프 개념과 과감히 절연하고 놀랍게도 현대적인 내용을 담았다. 진화론하면 곧 다윈주의를 뜻하게 된 것도 이 같은 독창성 때문이다.
「종의 기원」은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과학계의 반발은 거셌고 고민에 빠진 다윈은 갈수록 후퇴해서 점점 라마르끄에 가까워졌다. 진화론의 인정이 지연된 데는 과학 밖의 요인도 크게 작용했는데, 다윈주의에 대한 가장 격렬한 공격은 말할 것도 없이 교회쪽에서 왔다.
빗발치는 욕설에도 불구하고 다윈은 침묵을 지켰다. 겸손하고 신중한 성격의 다윈을 위해 앞장서서 진화론을 옹호한 투사가 T.H 학슬리와 독일의 해클이었다. 그들은 다윈에게 인간의 기원에 대한 책을 쓰라고 졸라댔다. 생물이 하등한 형태에서 고등한 형태로 진화했다면 인간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은 당연했다. 그러나 다윈은 주저했다. 참다 못한 두 사람이 각각 이 문제에 관한 책을 쓴 다음에야 그는 인간의 유래 (1871)을 내놓았다. 여기서 다윈은 人猿同祖說을 주장했다.
1860년 영국과학진흥협회 연회에서 큰 싸움이 붙었다. 다윈은 병이 나서 못나왔지만 영국 국교회의 옥스퍼드 주교 윌버퍼스는 종의 기원을 맹렬히 공격했다. 그는 학슬리에게 대놓고 유인원에서 유래했다는데 아버지 쪽 인가 어머니 쪽 인가 물음으로써 모욕을 주었다. 학슬리는 조용히 응수했다. “자기의 지식과 웅변을 진리탐구에 일생을 바치는 사람들을 왜곡하는 데 쓰는 사람보다는 겸손한 원숭이의 후예가 되기를 택하겠다” 관전평은 학슬리의 일방적 승리로 나왔다.
이제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심각히 제고되지 않을 수 없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 지구를 행성의 지위로 격하시켰다면 진화론은 인간을 동물로 떨어뜨린 것이다. 창조설을 절대 중요시한 교회의 타격은 너무나 컸다. 신학자들은 다윈의 설이 가져온 두 가지 결과에 아연했다. 첫째, 유인원과 인간이 공통의 조상을 가졌다는 것은 신에 의해 그 자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특권적인 지위로부터 인간을 몰아낸다. 둘째, 만일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이 자연선택에 의한 결과라는 다윈의 견해가 참이라면 자연에서의 ‘계획’의 존재에 근거를 둔 존재 논증이 크게 파괴된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다윈주의를 둘러싸고 둘로 갈라졌다. 진화론을 무조건 거부하는 성서축자해석주의자들은 성서에는 절대로 오류가 없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소수의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은 진화가 과학적 사상임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 타협을 모색했다. 그들은 생물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신의 뜻에 따라 진화한다고 주장했다. 이 타협안은 교회 안에서는 소수의견이었지만 다윈주의의 과격한 내용 때문에 난처했던 많은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지질학자 라이엘과 식물분류학자 그레이는 그 가운데 중요한 사람들이다.
다윈은 종교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집안에서 자라나 한때 신학을 공부했고 비글호를 탔을 때만 해도 경건한 신도였다. 그러나 그는 진화론자가 되면서 신앙을 잃어버렸다. 그는 터놓고 종교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소극적인 무신론이라 할 수 있는 불가지론자로 일관했다. 1882년 다윈이 죽었을 때 가족은 그의 집이 있는 다운에 매장하려 했는데 위대한 과학자에 대한 대접이 아니라는 여론이 일어나 그리스도교 의식으로 웨스트민스터 성당의 뉴튼 옆에 묻혔다. 그리고 다윈 기념 사업을 위한 모금위원회에는 켄터베리와 요크의 대주교, 런던 주교가 포함되었다. 이것은 20년이 지나는 동안 진화론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크게 완화되었음을 뜻한다.
성서의 신령감응에 대한 믿음은 오래며, 거기서 성서는 절대무류라는 결론이 나왔었다. 가콜릭교회는 16세기 트리텐티노 종교회의부터 기회있을 때마다 거듭 이것을 확인했다. 성서에만 의존하는 프로테스탄트들도 성서의 절대무류에 집착하고 있었다. 다윈주의의 충격은 인간의 존엄이 손상되었다는 데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신령감응의 교회 전체가 뿌리부터 흔들렸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교회의 강경한 태도는 세기가 바뀐 뒤에도 계속되었으나 낡은 교회를 재정의하라는 신학자들의 꾸준한 요구가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가톨릭의 경우, 1920년대에 보수주의 쪽에서 진화론을 단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진화론자들이 교황 비오11세에게 연구보고를 제출, 무사하게 되기도 했다. 비오 12세는 1943년 회장에서 성서해석에 언어학적. 문법적 연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역사학, 고고학, 인종학 등의 발달에 주의를 환기했다.
한편, 신교에서는 성서에 대한 견해가 다양했다. 성서축자해석주의와 현대주의의 싸움은 치열했으나 성서를 종교적. 도덕적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노력의 기록으로 보는 현대주의가 차츰 강해졌고 성서와 과학의 양립가능성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다윈주의가 촉매 구실을 해서 성서가 절대무류라는 교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갔다.
다윈 당시의 타협안은 진화는 인정하나 자연의 오묘한 구조와 진행은 우연일 수 없으며 신의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이런 입장은 자연신학의 전통과 관계가 깊다. 자연신학은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되어 성 토마스의 다섯 가지 신의 존재증명에서 절정에 이르렀었다. 루터와 칼빈은 이성이 신에 간한 지식에 오를 수 있음을 부정했으나 근대과학의 발달이 이성에 대한 믿음을 일깨워 ‘계획의 논증’이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17세기 말 분류학자 레이는 자연에서 구조의 기능에 대한 적응을 강조했다.
페일리의 「자연신학」(1802)은 인기가 대단해서 다윈도 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8세기 이래 자연의 기본구조의 영원성과 현명한 계획의 믿음은 점점 파괴되어 왔으며 다윈은 자연선택설을 내놓으면서 계획의 논증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기계론적인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진화론을 자연과 역사에 진보를 가져오는 신의 방법으로 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진화론적 자연신학이다.
다윈 이후 과학자들은 계획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줄달음쳤으나 신학자와 철학자들은 이 타협안을 강화해 갔다. 20세기 초 베르그송은 생물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끄는 ‘생의 비약’을 내세워 일종의 定向進化說의 입장을 취했다. 이런 경향의 후계자가 예수회 소속 고생물학자 메이야르 드 샤르댕이다. 그는 진화를 긍정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해석을 발전시켰다. 그에 따르면 진화는 의식을 향한 오름이며 모든 생물이 내재적 자발성의 높은 정도로 향하는 정향진화이다, 메이야르는 그 저작이 사후 출판되자 이단으로 몰렸으나 그의 대담한 사상은 오늘날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런데 난데없이 20세기 미국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이 정면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25년 신교 보수주의의 아성 테네시주의 주의회에서 제정된 반진화론법은 공립학교에서 성서에 있는 대로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부인하고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진화했다고 가르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데이튼의 리고등학교 과학교사 스콥스는 이 법을 시험하기 위해 시간 중에 진화론이 옳음을 넌지시 암시했다. 스콥스는 체포되어 이른바 ‘원숭이 재판’이 시작되었고 데이튼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스콥스 재판에서는 전형적인 광신자 브라이언 검사와 미국시민 자유연맹의 w;원을 받은 대로우 등 변호사들이 불을 뿜는 공방전을 벌렸다. 브라이언은 다윈주의가 추측, 다시 말해 가설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과학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끝내 1백 달러 벌금형을 받은 스콥스는 앞으로도 계속 이 법에 반대하겠다고 선언했다. 스콥스 재판은 대심원까지 올라가 1967년에야 반진화론법의 폐기를 보았다. 무려 42년을 끈 세기의 재판이 된 것이다.
저명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니버는 스콥스 재판을 가리켜 ‘과학의 진군에 무지한 경건이 도전한 극의 마지막 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이 아니었다. 1859년에 죽은 아담이 1860년대 미국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오늘날 창조론운동의 중심지는 캘리포니어주이다. 그곳에는 석사 또는 박사학위를 가진 과학자들을 정회원으로 하는 ‘창조연구회’와 샌 디에고의 크리스쳔 헤리티지 칼리지 부속기관인 ‘창조연구소’가 있다.
이 모임의 회원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믿는다. 첫째, 성서는 신의 말씀이므로 역사적. 과학적으로 진리이고, 둘째,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기본형은 창세기의 창조주간에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셋째, 대홍수도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1920년대의 창조론 운동은 진화론을 학교에서 내쫓는 것이 목표였는데, 이제는 전략적인 후퇴를 해서 창조론에도 진화론과 똑같은 시간과 비중이 주어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작년 현재 14개 주에서 창조론을 학교 교육에 반영하라는 법이 통과되었다. 캘리포니어 주지사 당시부터 창조론을 적극 옹호해온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뽑은 보수주의적의 물결에 힘입어 창조론자들은 기세를 올리고 있다. 금년 초 뉴욕 연방법원은 미국시민 자유연맹의 제소를 받아들여 진화론과 창조론을 똑같이 다루어야 한다는 아컨소 주법이 헌법상 종교교육의 의무화를 금지한 대심원 판례에 저촉된다고 판결했다. 패소한 창조론은 반격으로 나올 것이 틀림없고 싸움은 오래도록 시끄럽게 계속될 것 같다
대부분 물리학자나 공학자로 되어 있는 (생물학자, 지질학자는 거의 없다)창조론자들은 진화론의 문제점들을 들추어내고 열역학, 확률이론까지 동원하여 창조론이 과학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이라기 보다는 창조적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현대의 대표적인 진화론자 굴드는 창조론이 과학이 아니며, 따라서 그 주장은 무의미하고 자가당착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진화론은 물론 학설이지만 동시에 사실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학자들이 경쟁설을 가지고 싸워도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윈은 일찍이 진화의 사실을 확립했으며, 그 매커니즘을 설명하는 자연선택설을 임시적으로 제안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진화 가설은 1백년 이상 가혹한 시험을 거쳐 현재로는 생물학계의 정설로 정착했다. 이 가설은 문제를 지니고 있고 최악의 경우, 뒤집힐 가능성도 인정 해야지만 진화의 사실은 확고한 증거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결은 종교와 과학의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많은 종교인들이 진화론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론이 신앙으로 남아 있는 한, 과학이 참견할 일이 아니나 ‘과학’의 탈을 쓰고 과학에 도전하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역사는 종교가 과학을 공격했을 때마다 손해만 보아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수세에만 몰려 있던 종교의 과학에 대한 반격은 1960년대 이후 팽배한 반 과학의 감정과 무관하지 않을 듯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경향이 몽매주의로 흐르는 것도 걱정해야할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가 그 영역이 아닌 과학의 내용을 문제삼는 것은 무모하다. 공격을 해야 한다면 그 화살은 빗나가고 있는 과학의 응용에 겨누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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