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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세상과 세상 사이

문학에서의 발견의 의미 / 나호열

by 丹野 2008.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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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에서의 발견의 의미

                                  -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나호열



  1992년은 컬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지 오백 년이 되는 해였다. 미국은 이를 기념하여 성대한 국가 차원의 기념행사를 치르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결과적으로 그 구상은 축소되어 진행되었다. 이는 유럽인의 관점에서 아메리카는 신대륙 이었을지 모르나 “아메라카는 결코 새로운 땅이 아니다” 라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수 만 년 전부터 그 땅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니 유럽인들의 입장에서의 발견과 개척의 의미는 거꾸로 생각하여 본다면 원주민에 대한 침탈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 않은가? 말하자면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발견은 보편성을 갖지 못하는 그들만의 새로움이었던 것이다.

  

 느닷없이 이 이야기를 들추어내는 것은 발견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 위해서이다. 발견은 이미 ‘있음’을 전제로 한다. 사물이든 관념이든 사유의 대상으로 이미 놓여있지 않다면 인식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인식은 사태를 분석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그것들의 의미를 생산하는 한편 그 의미마저 재생하려고 하는 활동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주어진 것’ 만이 인간의 인식활동을 점유하는 것은 아니다. 인식 행위에는 의미의 생산이외에도 상상 想像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용이라든지, 인어라든지 또는 황금산과 같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물체나 사건을 우리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력 또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반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반인반수의 사티로스나 천마는 인간과 동물 형상의 조합이거나 동물과 동물의 결합일 것인데, 말하자면 상상 또는 상상력이라는 것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유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사회에서는 창조라 불러야 마땅할 발명의 측면보다는 발견의 측면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왔던 것 같다. 마치 플라톤이 이데아를 이 세상의 궁극적인 원리로 상정했던 것과 같이 이 세계를 결정하는 것은 기 氣 가 아니라 이 理(궁극적인 원리) 라는 생각이 영원 아래 놓인 제한된 창조 - 원리를 발견하고 난 후의 제작활동 - 를 상정하게 하였던 것이다. 단순한 겸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적 활동의 한계를 발견에 놓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나 무궁한 지적 능력의 펼쳐짐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종종 시인을 견자見者에 비유하는 것은 어떤 사태를 꿰뚫어봄으로써 그 인과를 결정하거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을 일컫는 것이다. 이면 裏面을 관통하여 본질을 이끌어내는 능력은 내성 內省과 관찰 觀察에 힘입은 바가 큰 것이고 그 결과가 우리에게는 새로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상력의 확대는 우주로 무한히 뻗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뼘도 되지 않는 의식 속으로 침잠하여 가는 양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이쯤에서 우리는 문득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듣게 된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이 말은 현대 심리학자 융 Carl  Gustav Jung이 그의 자서전에서 밝힌 내용이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조성기 역 김영사 2007 참조). 무의식은 저절로 생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성과정이 자기증식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의식에 의해 억압되거나 정신 속에 투사된 그림자이면서 끊임없이 의식의 지표면을 뚫고 나오려는 활동을 거듭하는 양태인 것이다. 최근에 들어 무의식의 문제는 예술 특히 문학에 있어 새로운 개척의 영역으로 떠오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재생의 항목으로 거론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친 김에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에 대한 역자의 설명을 이어나가는 것이 이 글의 요점을 잘 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기실현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무수한 무의식층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는 ‘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의 상징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


 요약해서 말하건대 문학을 포함한 예술의 여러 작업들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나가는 과정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전제와 꿈과 종교의 상징은 문학에 있어서는 언어에 포섭되면서 자기실현(작가의)을 욕망한다는 목적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작업들은 작가들의 예민한 감수성에 기반을 둔 ‘발견’의 범주 아래서 행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무의식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무의식은 결코 무의식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상 現象에 대한 해명작업을 수반하면서 들어 올려지는 작업이다.

 

 장혜련의 소설 「붉은 방」은 분노와 욕망으로 뒤범벅이 된 채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도시의 이야기이다. 아니 좀 더 세밀하게 말한다면 도시를 이글이글 불타오르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붉은 방’은 그 자체로 인간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불타오르고 있는 욕망이고 분노이다. 그런 까닭에 ‘붉은 방’은 여기에 존재하면서 또한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좌표도 없고 번지도 없는 무의식의 동굴이면서 그 동굴 속에 유폐되어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붉은 방」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소방관인 주인공 박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헤어져 아버지의 여자에 의해 양육된다. 아버지도 떠나고 거울에 빛을 모으는 장난을 하다가 실화를 하게 되고 여자가 죽게 된다. 주인공 박은 시원찮은 능력 때문에 아내와도 헤어지고 혼자 살게 되는데 가끔씩 화재 현장에서 아버지의 죽은 여자의 환상과 맞부딪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아파트 윗층에 살던 부부의 싸움 끝의 방화로 어이없이 자신의 집이 불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붉은 방」은 인과에 의한, 시간적 배열에 의한 사건의 전개가 없다. 현상의 중첩과 분열되는 자아의 투사만이 있을 뿐이다. 주인공 박은 매정하게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버리고 자신마저 버린 아버지, 고독하게 홀로 죽음을 맞이한 독거노인, 상습적으로 아내를 때리는 윗집 사내와 동일시 될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여자, 재혼을 앞둔 전 아내 윗집 부부 사이의 어린 소녀와도 동일시된다. 즉 주인공 박의 무의식 속에는 매저키즘과 새디즘, 연민과 분노, 강열함과 연약함이 함께 불타오르고 있다. 그래서 분노와 욕망으로 뒤범벅이 된 채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도시는 이렇게 부조리한 인간의 축약인 까닭에 소설「붉은 방」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문명의 비인간화에 대한 고발이나 비판이 아니라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인간의 심리적 내상 內傷의 증언일 뿐이다.

무의식의 발견은 문학에 있어서 풍부한 상상의 자료를 제공함과 동시에 점점 미궁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난제를 안겨준 것도 사실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  - 라캉


무의식을 다시 이야기하기 전에 구조화되어 있는 언어에 대해서 소쉬르의 견해를 구하자면 이런 것이다. 즉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상적 발언(parole)은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문법(langue)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무엇인가? 앞에서 이미 기본적인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라캉을 빌어 다시 강조하한다면 무의식은 원초적 욕망이 아니라 바로 ‘꿈의 작업이다’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꿈의 작업은 어떤 원초적인 욕망이 꿈에게서 어떻게 드러나는가이다. 소설「붉은 방」은 이와 같이 무의식을 라캉 식으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충족될 것이다. -주인공 박이 소방관인 점을 상기하자- 그와 반대로 무의식을 프로이드 식의 원초적 욕망 그 자체로 받아들일 때 다음과 같은 변형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꽃 본 나비 꽃 마다할까, 까마귀 오디 싫다 할까.


 사내놈들 정이란 들의 냇물 같아서 갈래갈래 흐르지만 계집 정은 폭포와 같아 외곬수로 헐레벌떡 흘러가서 절구에 절굿공이 맛들이면 정붙여 살게 마련이고 절구에 길이 나면 굶어도 굄이 맛 절굿공이 맛에 산다는데 개꽃에는 나비도 안 오는 법 니나노에 놀던 계집 들병이 논다니는 그만 두고, 풋내 나는 풋꼭지 뻘때추니 하, 고것들 참!


미나리 헷미나리처럼 야들야들 한 번 웃으면 꽃이 울겠다.


 위의 시는 한석산의 「정재 최우석의 춘화를 보며」의 전문이다. 한국의 춘화는 세밀한 묘사보다는 해학적 배경을 중심으로 한다고 생각한다. 춘화는 시각을 통하여 더 깊은 육체적 자극을 유도하며 훔쳐보기 대리만족의 서열을 매기지만 이 시의 화자는 육체적 욕망을 일반화된 상식으로 치환하면서 춘화가 지니고 있는 해학의 반전을 다시 한 번 반전시킨다. 말하자면 금기시 되어 있는 성의 담론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언어의 은유적 미감을 대비시킴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못 볼 것을 본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시인은 또 한 편의 시 「단원 김홍도의 월하연인을 보며」에서도 이와 같은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는 앞서 이야기한 상상력의 구조와 한계의 극한점으로 치달은 발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새로운 기법을 제공하여 준다고 보여진다.


 지금까지 살펴본 무의식의 세계가 컬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버금갈 만큼 예술의 장대한 영역으로 자리잡았다고 해서 전통적인 예술의 주제나 소재가 폄훼되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인간의 다양한 의식과 사건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발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상투적인 계몽과 교조적 발언으로 일관하지 않는다면 발견이라는 도구는 영감과 더불어 인간의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나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우선 우리 주변의 일상 관찰로부터 삶의 의미를 반추하는 시들은 쉽게 읽히고 공감의 폭이 넓다. 류승도의 「비밀이 있다」,「황금돼지」, 최용훈의 「그믐밤」, 「윤회론」, 구재기의 「무구덩이를 파다가」, 「저물 무렵」 같은 시들은 무심히 우리 주변을 흘러가는 풍경들을 한 순간에 응축시켜 삶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경이를 안겨준다. 경이는 무엇인가. 낯설은 반성이 아닌가. 불가항력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번득임 같은 것. 이런 것들이 삶의 총체적 국면을 의미화 하는데 - 시의 전통적 정의에 따라 -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미화의 강박이 지나치면 과녁을 벗어난 화살처럼 언어는 전달의 수단을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느낌의 전달이라는 -다소 회화적 기교라 할지라도- 미학적 질감에 투여하는 작품들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관점으로 볼 때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는 텍스트들이 있다.


구재기의 「저물 무렵」은 이중 구조를 가진 작품이다. 앞서가는 여인을 뒤따라가는 사람과 그것을 의식하며 발걸음을 빨리하는 앞 선 여인의 모습이 드러나는가 하면 어둠을 성숙한 여인으로 대비하면서 그 어둠에 덮혀가는 세계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또 하나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 간격을 좁히려 하자/ 점점점 빨라지는 /필사적인 저 춤, 저 춤의 율동 으로 묘사되는 일몰의 장엄함은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하는/가장 깊은 곳에서 /순간의 현기증이/ 제멋대로 황홀하게 치솟아 오른다 는 음양의 은밀하고도 황홀한 결합으로 묘사함으로써 인간과 우주, 인간과 인간이 숭엄하게 하나가 되는 에로틱한 아름다움을 그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둠으로 상징되는 소멸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보다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를 한 편 더 살펴보자.

 



어둑어둑한 마음으로

강가를 지나다가

물고기들도 이 사간쯤이면

하루가 얼마나 고될까

다친 마음은 없을까

뭐 그런 생각

잠시 하느라 

얼굴 저리 붉은 것이다


                     류승도의 「노을」 전문


 이 시는 저녁노을을 단순하게 의인화 시키면서도 작은 질그릇 같은 마음이 가볍게 부딪는 즐거움을 맛보게 해준다. 휴머니즘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직접적으로 투사하지 않고 오히려 작게 응축시킬 때 어린아이의 손을 살며시 잡아보는 느낌을 흠뻑 맞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이에 비해서 최용훈은 능숙한 은유의 기법을 구사하면서 불안하고 쓸쓸한 현대인의 내면을 미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시 「그믐밤」에서 일그러진 어둠의 입을/ 구름이 틀어막고 있는 동안과 같은 표현이나 「고백」에서 불발된 격발음같이 분출된/후텁지근한 내 어떤 기억이 그랬다... 표독스럽게 검붉은 꽃잎은 /벌다말고 그냥 시들었다/ 이후/ 나의 모든 조바심이 시작됐다 는  비유를 통하여 대상을 향한 세밀한 묘사가 얼만큼 미적 흥취의 여운을 가져올 수 잇는가를 가늠케 해준다. 최용훈의 시를 통해서 관찰의 내밀함만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글쓰기의 전형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쉬클로프스키의 예술창작에 있어서의 ‘낯설음’의 기법은 여러 방면에서 아직도 유효하다. 새로운 사상의 융기, 언어 자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 기법의 실험과 더불어 인터넷과 같은 정보전달 수단의 출현은 ‘낯설음’의 기법을 더욱 매력적인 예술의 수단으로 자리매김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설음’의 기법의 기반에는 여전히 발견이라고 하는 오래된 통로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성과 관찰을 중심으로 하는 20세기 인간의 위대한 발견은 단연 무의식의 발견일 것이다. 무의식의 발견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생성시키고 대립하게 하면서 무성한 사상의 가지를 뻗쳐나게 했다면 21세기의 발견은 무엇이 될 것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계간 시와 산문 2008년 봄호 계간평

 

 

출처/ 나호열 시인 블로그- 세상과 세상사이 

         http://blog.daum.net/prhy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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