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마애불 / 나호열
나그네는 길을 묻지 않는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서 털석 바람이 주저앉은 자리에 노을이 내린다. 따뜻한 움막이 바로 저기인데 먼 길을 돌아서 가야 한다. 그 언 손을 이리 주게나, 내 가슴도 얼음장이지만 비집고 넣을 틈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
저기, 저 나무 참 아름답다. 이파리 떨구고 열매도 내리고 그 여윈 어깨 위에 날아와 앉은 새와 더불어 나무는 비로소 나무가 된다. 세 그루 돌나무 속에서 흘러나오는 미소는 솜털같이 가볍다. 차 한 잔 올려놓고 무슨 이야기할까그러다가 천 년이 금새 지니가버렸는데 우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저렇게 웃어보자 소리를 죽이고 가슴을 꾹꾹 눌러놓은 다음 숨결이 닿을 듯 말듯 빛 반 어둠 반 그림자 길게 서로를 바라보자
2002. 4
天竺 / 나호열
모래 한 짐을 지고 천축사에 오른다
입춘 지나 내려오는 山客은
아직도 냉기 머금은 바람
고개 숙이며 어깨를 비키면
단 걸음에 그들은 어디로 가나
모래를 빼면 나는 무엇이 남을까
천축사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물 끊긴 계곡을 바람이 대신 흘러간다
산으로 오르는 사람은 있어도
내려 가는 사람은 없다
산은 나무로 가득찬다
산은 풍경소리로 산을 허문다
2002년
가지치기 / 나호열
거미줄 같은
보이지 않는 숨결에도
불끈 솟구쳐 오르는 몸짓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살겨운 파도의 입술이 간지르는
비밀스런 창공의 치마단을
가만히 잡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돋아오르는 날개
피흘리도록 긁어대도 순 내미는 그리움은
가슴에 긋는 나이테의 지문으로 남는데
길가에 서서
매연에 온몸을 더럽히고
쿨럭거리는 기침을 참아내는 하루 하루
그저 서 있기만 하라는구나
손 뻗치지도 말고
온통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이파리가
시야를 가린다고 하는구나
표지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구나
불임의 꿈을 잘라내는
저 길가의 비명들
트럭 가득히 실려나가는
나무의 작은 꿈들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