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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청동화로靑銅火爐 / 나호열

by 丹野 2025. 1. 22.


청동화로靑銅火爐 / 나호열
  
    이 세상 가장 낮은 땅, 강 하구 뻘밭에 금가고 깨진 청동
화로가 가슴에 강과 바다를 가득 품고 있었다.

   스스로 어떻게 뜨거워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가 말없이 태우던 잿빛 문장이
   한번 더 불길로 일어나
   그 불길을 누르고 또 누르던
   그대의 눈물이 없었다면
   뜨겁게 달구어질수록 조금씩 뒤로 물러앉아
   뜨개질을 하거나
   아주 슬픈 소설을 읽어 가는 눈빛이 없었다면
   겨울의 긴 바람, 유리처럼 부서져 내리는
   별들이 가슴에 가득 차면
   영혼의 깊은 샘물을 길어올리듯이
   조심스레 가슴을
   말 못하고 태워 버린 재들을 비워주던
   그 손길이 없었다면
   그러나 싸늘히 식어가는 일은 오직 나만의 일이었기에
   조금씩 금가고 깨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설산에서 흘러내리는 강물로 뛰어들어가
   스스로 식어가기를 기도했는지 모른다

   엎드린 채로
   지상에서 가장 낮은 땅 끝과
   가장 깊은 바다가 시작되는 뻘밭에 누워
   지금 청동화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