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편지] 비 내리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쓰러진 한 그루의 아름다운 느릅나무
★ 1,182번째 《나무편지》 ★
연휴였지요. 비는 한여름 장맛비처럼 이어졌지만, 그래도 즐거이 보내셨겠지요. 괌 지역을 할퀴고 지나간 태풍은 방향을 틀어서, 어느 쪽으로 들이닥칠지 아직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 사는 한반도가 직접 영향권에 들지는 않을 듯하다고는 합니다. 이번 태풍이 이르다 싶었지만, 지난 태풍의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니 그 동안 5월 태풍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한반도에 영향을 미친 태풍은 없었다는데, 이번 태풍 소식으로 조금이나마 긴장하게 된 건 우리를 둘러싼 자연과 기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태풍 세력은 약해졌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고 하니, 계속해서 잘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태풍의 영향도 아니건만 연휴 내내 비가 그치지 않았어요. 며칠 동안 내리 이어진 비에 크고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습니다. 〈횡성 두원리 느릅나무〉입니다. 마침 지난 주 《경향신문》 칼럼인 〈고규홍의 큰나무 이야기〉에 〈단양 향산리 느릅나무〉를 ‘이 땅에서 가장 근사한 느릅나무’로 소개하면서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한 나무인 〈횡성 두원리 느릅나무〉가 눈에 밟혀 이어서 소개해야겠다 싶었는데, 난데없이 그 아름다운 나무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횡성 두원리 느릅나무〉는 큰 나무를 소개하는 다른 칼럼에서 자주 이야기했던 느릅나무여서 속절없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더 안타까웠습니다.
느릅나무는 북유럽 신화에서 최고의 신 오딘이 물푸레나무로 남자를 만든 데 이어 여자를 만드는 재료로 쓴 나무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개체 수가 그리 많지 않아 낯익은 나무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노거수 보호수 가운데에 가장 많은 개체 수를 가지는 느티나무가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라는 점을 생각하면 느릅나무의 존재감은 낮추 볼 수 없습니다. 또 느릅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저절로 자라던 나무라는 점도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야 할 자연유산임에 틀림없습니다. 안타까운 건 지금까지는 느릅나무 가운데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국가 자연유산은 한 그루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 《경향신문》 칼럼(이 칼럼은 홈페이지 아래쪽의 ‘칼럼’ 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느릅나무 가운데에 천연기념물이 한 그루 있기는 했습니다. 198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삼척 하장면 느릅나무’가 그 나무였는데, 느릅나무 주변에서 함께 자라던 졸참나무 단풍나무 음나무 등 다른 나무가 군락을 이루면서 수세가 위축된 느릅나무의 존재감은 미약해졌지요. 결국 2012년에 천연기념물 명칭을 ‘삼척 갈전리 당숲’으로 고치는 바람에 느릅나무 천연기념물은 한 그루도 없는 상황이 됐다는 걸 생각하면 우리 곁에 남아있는 큰 느릅나무는 더 소중해집니다.
느티나무가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고르게 잘 자라는 것과 달리 느릅나무는 강원 지역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역과 충북 지역 등 자라는 지역이 제한적이어서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느릅나무의 개체 수는 느티나무에 비해 매우 적은 편입니다. 2022년 현재 산림청 보호수 목록을 기준으로 하면 느티나무가 7,080건인데, 느릅나무는 94건에 불과하고, 앞에서 이야기한 천연기념물은 물론이고 지방기념물조차 한 그루도 없습니다. 《경향신문》 칼럼에서 이야기한 〈단양 향산리 느릅나무〉 뿐 아니라, 〈횡성 두원리 느릅나무〉 역시 매우 소중한 나무이건만, 이 비에 무너앉고 만 것입니다.
강원도 횡성 두원리 국도 변에서 만날 수 있었던 〈횡성 두원리 느릅나무〉는 400년을 훨씬 넘은 큰 나무입니다. 나무높이 23미터, 가슴높이 줄기둘레 6미터의 거목으로, 규모에서 〈단양 향산리 느릅나무〉의 다음 순서에 꼽을 만큼 큰 나무입니다. 나무 바로 위쪽으로 고가도로가 놓이는 바람에 경관적 가치가 조금은 훼손되었다고는 해도 나무는 그에 주눅들지 않고 생명의 기운을 넓고도 높게 펼쳐서 지나는 길을 부러 에돌아들며 찾아보곤 하던 나무입니다. 오늘 《나무편지》에 담은 사진들은 2003년부터 2010년 사이에 찾아본 〈횡성 두원리 느릅나무〉의 풍경입니다.
이 나무는 옛날 이 마을을 지나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스님이 꽂아둔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고 합니다. ‘청운정(靑雲亭)’ 이라는 이름의 아담한 정자가 나무 곁에 세워져 있어서, 사람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쉼터로 쓸 만하지만 사실 마을은 나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나무 주변은 언제나 한산합니다. 그저 지나는 나그네들의 좋은 쉼터로 이용될 뿐입니다. 한산해도 적막해도 나무가 지어내는 풍광은 언제나 최고였습니다.
이 느릅나무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여럿 전해옵니다. 우선 가까운 충청 지역에서 이 느릅나무를 찾아온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자식 없이 살던 이 부부는 〈횡성 두원리 느릅나무〉를 향해 백일 기도를 올린 뒤에 산신령의 점지를 받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세 돌을 넘길 즈음에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갑자기 죽었습니다. 슬픔에 빠진 부부의 꿈에 산신령이 다시 나타나, 아이를 얻기 위해 기도를 올렸던 느릅나무를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부부는 산신령의 이야기대로 느릅나무를 찾아가니 나무의 상태가 형편없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사연을 알아보니, 부부의 아들이 태어날 즈음부터 나무가 시름시름 앓았고, 아들이 죽은 때쯤부터 나무는 겨우 새 잎을 틔우며 살아났다고 한다. 겨우 낳은 아이의 생명과 나무의 생명이 바뀐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이 큰 나무가 바 로 사람의 생명을 쥐락펴락하는 생명의 나무라는 이야기입니다.
경기 지방에서 전해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아이와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아이의 온 몸에 종기가 돋아나는 고약한 병에 들었는데, 백약이 무효했지요. 아이의 부모는 효험 있는 약을 찾아 온 나라를 헤매던 끝에 이곳 두원리를 찾아와 마을 사람들에게 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느릅나무의 줄기 가운데에 크게 뚫린 구멍에 고인 물을 길어다 아이를 목욕을 시키면 좋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아이의 부모는 마을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나무 줄기의 구멍에 고인 물을 정성껏 담아 가지고 가서 아이를 목욕시켰더니, 그토록 낫지 않던 피부병이 씻은 듯 나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비 내리고, 바람 불어, 결국은 한 그루의 소중한 큰 나무가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전해드리는 〈횡성 두원리 느릅나무〉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이 근사한 나무의 풍광도 다시 보여드릴 기회는 아마 다시 오지 않겠지요.
가만히 오래 된 사진첩을 들춰봅니다. 그 안에 담긴 이 땅의 큰 나무들 모두가 오래오래 우리 곁에 더 건강하게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 하늘에 전해 올립니다.
이르게 다가온 한여름 날씨, 잘 이겨내시며 아무 탈 없이 평안하게 이 여름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2023년 5월 30일 아침에 1,182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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