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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시집『내가붉었던것처럼당신도붉다』

자연과 소통한 은밀한 내력 / 강동수

by 丹野 2019. 8. 11.





이 계절의 이 시집


시와산문2019년 봄호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

자연과 소통한 은밀한 내력 - 김경성 시인

 

강동수 (시인)



 

  프라하 -

  김경성 시인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이다. 체코의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는 김경성 시인이 사랑하는 도시이기도 하고 인터넷에 사용하는 닉네임이기도 하다. 가끔  문학적인 일로 소통하려고 전화하면 외국의 어느 도시이거나 국내의 여러 곳으로 다니는 중일 때가 많다.  첫 번째 시집 와온에 이은 두 번째 시집에도 여행에서 느낀 감정을 시적으로 깊이 있게 풀어낸 흔적들로 채워져 있다. 서해안 바다인가 했더니 몽골의 초원이고 다시 셀렝게티 초원을 거쳐 어느새 시인의 눈은 노고단 정상에 올라가 있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시인이 그동안 소통한 자연과의 은밀한 내력이다.

 

 

  1 

 

    서고의 열쇠를 잃어버렸다 

    바다에 빠트린 열쇠를 찾으려면 아침을 기다려야 한다

 

    초승달이 바닷물에 옅은 빛을 내려놓을 때 바다는 초승달 빛만큼의 길을 물 위에 그려놓았다

  

    새벽안개가 바다 안쪽까지 감싸 안은 팔을 풀어놓자 거짓말처럼 서고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 읽다가 접어놓고 간 책을 펼치니 흠뻑 젖어있다

 

    별들이 사산한 불가사리가 책꽂이 아래에 떨어져 있다 무엇을 움켜쥐고 있었는지 불가사리의 다섯 손가락이 아직도 구부러져 있다

 

    끝이 아니라고 잠시 뒤돌아 나가는 썰물의 끝자락을 움켜쥐었지만 나는 끝내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습한 서고에 앉아서 읽지 못하는 상형문자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툭 하고 어깨를 치고 가는 바람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주저앉아

    한 생애를 다 보낼 것만 같았던 봄날이었다 

  

 

 

    2

 

    길을 접어서 몸속에 말아 넣은 소라는 모랫바닥에 엎어진 채 구겨진 길을 풀어서 바다로 밀어내고 있었다

    괭이갈매기들은 동백꽃 빛 무늬가 있는 부리를 연신 모래 속에 묻었다가 꺼내더니 바다 쪽으로 날아갔다

    백사장에 흩어져있는 새들의 말과 책 속에서 흘러나온

    말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저릿한 말들이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온몸 가득히 느껴지는 오르가즘

    화라락 불붙듯이 한꺼번에 서고를 덮치는 해일

    속수무책이다

 

- 오래된 서고 - 격포 바다전문

 

   시인은 지금도 전라도 변산의 격포 바다에 있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전 미명의 시간, 아침안개가 해변의 풍경을 감추고 있고 마침내 안개가 걷히자 눈앞에 펼쳐지는 장엄한 바다는 한편의 서고가 된다. 썰물에 드러난 불가사리는 책꽂이 아래에 떨어진 사산한 별이 되고 모래바닥으로 밀려난 소라는 길을 접어서 몸속에 말아 넣고 있다가 바다로 가기 위해 구겨진 길을 풀어내고 있다. 동해의 바다는 일시에 일어나는 큰 파도가 자주 밀려와 해변을 남김없이 휩쓸어가지만 서해는 밀물과 썰물이 넘나들며 동해안과 또 다른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면 불가사리가 어찌 밤새 사산한 별이 되고 소라의 몸속이 구겨진 길이 되겠는가. 이것은 상상이 아니고 일출을 맞이하러 바다에 서 본 사람만이 느끼는 감흥이다. 화가는 그림으로, 사진가는 사진으로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표출하지만 시인은 또 다른 느낌으로 새로운 시각으로 아침바다를 펼쳐놓고 있다. 찬찬히 시 한편을 읽는 것만으로도 서해바다는 눈앞에 이야깃거리가 많은 바다의 진해를 펼쳐놓는다. 시간에 순응하는 바다가 해일처럼 해안선을 끌어당겨 화라락 불붙듯이 육지로 밀려오면 드넓은 서재에 꽂혀있는 책들이 젖어든다. 속수무책이다. 이것은 당신이 언젠가 보았던 바다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바다를 다시 들여다보는 시인의 서재이다.


 

끊어진 전선을 목에 걸친 전봇대, 백사장에 발목을 묻고 있다

전선을 타고 지나다니던 오래된 말들이 길 위에 떨어져 있다

 

떨어져서 굴러다니던 말들은 전봇대와 전봇대를 넘나드는 새들의 몫이다

먼 곳의 소식도 그의 몸을 타고 흘러왔고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들은 선단여**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지금 남아 있는 새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그때의 새가 아니고,

그때의 물이 아니고

지구를 수만 번 돌다가 온 바람만이 그대로일 뿐,

 

공룡이 발톱을 세워서 써놓은 유적은 느다시 구릉***에서 흘러나온 빗물이거나

암벽 사이로 고개를 내민 금방망이 꽃이라고

 

물고기가 산란하는 동안 먼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목기미 해변에 얼굴을 묻은 닻들은 바닷물의 농염에 붉은 꽃이 피고

이따금 목에 걸려드는 해초는

등지느러미가 아름다웠던 물고기의 말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통보리사초밭에 부리를 묻은 검은머리물떼새,

살아 숨 쉬는 것들의 뜨거움이 둥근 목기미 해변을 따라 흘러다니고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발자국이 그물처럼 드리워져 있다 

 

닻의 그림자를 재며 생의 농도를 읽는 목기미 해변,

낡은 전봇대도 모래 구릉에 닻이 된 채

전선을 타고 흘러갔던 것들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 목기미 해변에 닻을 내리다전문

 

  여기 서해 굴업도 동쪽에 있는 목기미해변에서 전선을 붙들고 서있는 전봇대는 많은 이야기를 주워 담고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전봇대는 전선을 목에 감고 서 있지만 지금 바다를 날아다니는 새는 새롭게 태어난 새들이고 먼 길을 돌아온 바람만이 이따금 전봇대에 걸려드는 해초와 함께 이곳을 외롭게 지키고 있다. 한 때 사람들로 북적였을 해변에는 젊은이들이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는 서해바다의 굴업도. 섬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마을을 지키고 있는 낡은 전봇대와 새를 대비시킴으로 전선을 타고 지나다니던 오래된 말”.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발자국과 같은 표현으로 시간의 간격을 나타내고 있다. 목기미해변을 안고 있는 굴업도는 두 번의 큰 홍역을 치렀는데 1994년 정부에서 핵폐기장 후보로 지정하였을 때와 2005년 대기업에서 골프장을 비롯한 호텔과 콘도를 짓겠다고 나섰을 때다. 핵폐기장은 반대할 주민이 없는 굴업도 대신 이웃의 덕적도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와 활성단층이 발견되면서 1년도 안 돼 지정이 취소되었고 섬 전체를 사들인 대기업의 개발계획은 섬의 훼손을 우려한 환경단체의 반대에 부딪치자 인천시는 골프장건설을 뺀 사업을 권고했고 대기업은 2014년 골프장건설을 백지화하였다. 두 번의 큰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진 섬은 전 세계에 1만 마리 정도 남아있는 멸종 위기 종 검은머리물때새와 천연기념물인 매와 황새 황구렁이와 먹구렁이등이 살고 있는 자연의 보고이다. 목기미해변을 품고 있는 굴업도가 언제까지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우리의 곁에 남아있기를

 

최초의 사람이 걸어갔던 길 위에 야크 떼가 서 있다

야크의 눈에 들어간 설산이 높다

빙하기의 시간이 해체되는 순간이다


더러는 뿌리까지 뽑혀서 올라오는 마른 풀을 되새김질하며

따뜻한 젖으로 사람들의 심장을 어루만진다


맨발로 서 있는 설산은

수백 겁 설층으로 바다의 경계를 지워가며

 속에서 새어나오는 눈 녹은 물로 침묵하고 있는 것들을

풀어내고 있다

 

부화하지 못했던 나비의 성충이 막 날개를 펴는 이곳이

수억 년 전에 이곳이 바다였다는 풍문이 들리기도 했다

 

너와 내가 만나 억만 겁의 시간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나비와 꽃씨의 말을 다 듣지 못하고

경계를 지우는 거미줄에 일생을 걸고 무늬를 짜는

이슬방울을 다 세지 못했기 때문이다


흰옷을 입고 빙하기를 건너온 당신

조금씩 제 몸을 녹여 써 나가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젖은 말들

야크의 몸속에서 첫말이 되어 몽클거린다


라마승이 내어주는 수유차를 마시다가

금이 간 찻잔에서 흘러내리는 야크의 눈물을 보았다

 

 

- 야크의 눈물전문

 

 

   네팔 혹은 티벳 어디쯤에서 만난 야크를 바라보는 시인의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시편을 읽어 내린다. 고산지대 척박한 설산에서 마른풀을 뽑아 올리는 야크는 따뜻한 젖으로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수 백겁의 세월을 지나 이제 시인 앞에 나타난 설산은 조금씩 자신의 몸을 녹여 세월을 풀어내고 있다.  젖은 말들을 빙하기를 건너온 만년설 혹은 언만 겁 새월의 인연으로 만난 당신, 둘레 사방 40리 되는 바위 위에 백년마다 한 번씩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그 위에서 춤을 추는데, 그떼 선녀의 얇은 옷으로 스쳐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세월이 1겁 이라면 억만 겁 세월은 얼마나 긴 인연인가. 그것이 수억 년 전 바다였을지도 모를 이곳 만년설이거나 지금 만나고 있는 당신이라면 사람과 사람의 인연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야크의 젖으로 데워진 수유차를 마시며 맨발로 서서 빙하기의 물로 목을 축이던 야크를 생각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금이 간 찻잔은 야크의 눈물, 시인은 언제 어디서나 사물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바닷길을 찾고 있는 눈이 흑요석 빛이다

 

태풍의 눈이 바닥까지 들여다보며 방점을 찍을 때마다 

몸에 그어지는 사선으로 바닷속 길을 읽었다

 

온몸이 물결에 함몰되어 심하게 흔들려 본 적 있는 사람만이

그의 몸을 열고 내력을 꺼내 볼 수 있다

 

어떤 것은 독화살을 제 몸에 박아놓은 채 

잘 익은 바다가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물고 다녔던 바다를 쏟아내며

제 속까지 다 보여준다  

바다를 끌고 다녔던 지느러미가 숨 고르기를 하는 용대리 황태덕장

수만 개의 꼬리지느러미에서 아직도 바닷물이 출렁인다

 

아가리 가득 눈꽃을 물고

꼬리지느러미를 세차게 흔든다 

이내 녹았다가 얼었다가 하는 사이

꽃은 지고 또 피어날 것이다

 

흑요석 화살촉이 황태 눈 속에 박혀 있다

출렁이는 바다 위에 붉은 꽃들이 가득하다 

 

 

 

- 시위를 당기다전문

 

 

강원도 인제군에 있는 황태덕장은 전국 황태의 70%를 담당하는 최대의 명태건조장이다. 명태는 바다에서 잡은 생태를 겨우내 얼려서 말린 것을 일컫는데 잡아서 바로 꽁공 얼린 것은 동태라 부른다. 거진이나 인근 바다의 할복장에서 할복을 한 후 이곳으로 실려와 몇 개월간 눈을 맞으며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해야 비로소 가치 있는 상품이 된다. 수만 마리가 얼렸다 녹았다 하는 황태덕장에서 시인은 아직도 출렁이는 바다가 보인다. / 사막에서 집들은 고래가 되어 누워있다 (유목의 시간 ) / 기억의 집을 찾아서 하루에 두 번씩 오는 고래가 있다(풀등) 이따금 밑줄 긋고 가는 물고기가 없다면 / 문장을 이어가지 못할 것이다 (추전역) 한 생은 마을 담장 옆에 살았으니 또 한 생은 / 물속 길의 지도를 그리는 물고기의 눈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했다 (한쪽 어깨에 반달무늬가 있는)처럼 김경성 시인은 사막에든지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태백의 기차역에서도 저 바다 밑 물고기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시인의 저력을 가졌다 꽃이 피고 지고 반복하는 사이 명태도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최상품이 될 것이고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영국 속담처럼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굴곡이 있어야 성숙된 인간성을 갖추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할복은 대체적으로 여인네의 차지, 온 몸이 물결에 함몰되어 흔들리는 사람은 바닷가에 터 잡고 사는 우리네 어머니이다. 한때 동해안에서 흔하게 잡히던 명태는 장비의 발달과 중국어선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수입 산이 아니면 동해에서 명태는 찾아보기 힘든 생선이 되었다.

 


낡은 자전거 한 대가 체인을 풀어놓은 채 생각에 잠겨있다

 

해진 의자 사이로 보이는 그의 등 가운데 움푹 들어간 상처의 흔적이 있다

 

그가 지나온 길은 이미 화석이 된 지 오래, 더는 길의 맥을 짚을 수 없다

 

제 속에 접어놓은 길을 펼치면 지구를 몇 바뀌나 돌 수 있을까 별까지 닿을 수 있을까

 

그중에 가장 오래된 길 하나를 꺼내자 스르르륵 먼지를 일으키며 신작로가 흘러나온다

 

다시 또 길 하나를 꺼내자 둥글게 말린 길이 떼구르르 굴러간다

언덕 위에 늙은 팽나무를 한 번 감고 간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곧 시작이라는 것을 풀어진 체인이

말해준다

수많은 길의 흔적들 

겹쳐진 길마다 다른 기억의 무늬를 가지고 있다

체인을 끼우는 순간,  자전거는 새로운 길 하나를 바퀴에

감기 시작하더니 덜커덕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내 속에 접어두었던 길 꺼내본다

수십 번 넘어졌다가 일어서기도 했던, 되돌아가며 주저앉기도 했던

웅덩이와 낭떠러지가 있는

 

나에게로 가는 가장 먼 길 초입에 막 들어섰다

 

 

- 먼 길전문

 

 



강동수

2008시와산문등단. 2014국민일보신춘문예 신앙시 당선.

구상솟대문학상대상 수상.

시집누란으로 가는 길』 『기억의 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