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 김경성 시집의 작품 감상
은유의 필터로 읽어낸 삶의 회화적 의경(意境)
오양수 (시인 문학평론가)
설한풍우 우여곡절을 겪지 않은 말(言)이 어디 있으랴. 그 말의 사적(私的)의미는 그래서 비밀을 갖기 마련이다. 그 체적만큼의 껍질을 장만하고 그 안에 본성(알맹이)을 감추며 번창하는 것이 말이다. 갖가지 사물은 제 각각 제 언어를 가지고 제 존재를 시공간 속에서 전달하거나 보호 받기를 염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붉은 것처럼 당신도 붉다고 제 눈에 안경을 맞추려는 화자의 의중을 꿰뚫어 보기에는 혼선이 빚어지기도 한다. 김경성 시인은 상상초월의 사유로 사물을 관조, 회화적 의경을 묘사해내는데 탁월하다.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 역시나 시선에 특별한 필터를 착용해야만 한다. 마치 뮤지션과 관객이 모두 헤드셋을 착용하고 관람을 해야 최적화된 사운드를 감상할 수 있듯이 은유의 필터를 장만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김 시인이 ‘울음의 바깥’에 초점을 맞추듯 기대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관측 값 즉 존재 가능성을 보정해주는 필터를 장만해야만 한다. 말에는 항상 경우의 수가 있어 오차의 범위를 설정해서 보정해 주는 필터, 그것이 첫째다. 둘째는 껍질을 깨는 도구가 필요하다. 섬진강 석화를 배 위에 올려놓고 내리치는 수달의 돌멩이가 그것이다.
수십 길 잣나무 가지난간에 잘 익은 잣송이를 따려고 기어오르는 다람쥐의 고단한 노동이 그 셋째다. 사는 동안 내 안에 어떤 울음이 자라고 있어서/ 마음 바깥으로 넘어서지 못하고 날마다 출렁이기만 하는가/ 상처에 고여 있는 나무의 울음이 출렁이고/ 내 안에서 자라는 울음이 나무의 숲이 되어서/ 심하게 흔들린다.(「울음의 바깥」)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을지 짐작이 가면서도 화자를 만나 묻거나 독자의 과거 경험 속으로 내시경을 삽입하여 들춰내거나 잣나무를 타는 다람쥐의 뒤를 밟아 오르는 수고를 해야만 할 것 같다. 어쩌면 울음의 바깥은 우리네 삶이 그리도 갈망하는 그리움과 기다림이 아닐는지 화자의 의경을 그려보게 된다.
김경성 시인의 작품 감상은 은유의 필터 착용이 필요하다
상대의 말을 듣다말고, 그래 돌려 말하지 말고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윽박지르고 다그친다. 의도가 무엇이냐고 속셈을 바깥으로 들어내 보이도록 구워삶거나 달래고 추어올리기까지, 백조의 속마음을 알려고 흑조가 되어 은근슬쩍 상대의 마음을 흔들어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정작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다 들어내 보이고 백조에게서 자신을 읽어내 글로 적어보는 그 문장이 곧 은유적 텍스트일 것이다.
김경성 시인은 흑조다. 필자의 은유필터로 본 견해다. 이 세상에 흑조는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흑조는 분명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자주 세상에 회자되어 화제로 돌고 있듯이. 김 시인의 「울음의 바깥」이 그렇다 울음의 안과 밖을 본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 그 경계를 넘나드는 육감의 시적 변신술이 남다르다. 사례와 반(反)사례를 찾아 그 말의 개념을 회화적으로 그려 보이는 로버트 C. 모건(Robert C. Morgan)이 정의한 개념미술의 이론을 시 작업에 접목시켜 삶의 회화적 의경(意境)을 택스트화 한 것으로 보인다. 사는 동안 내 안에 울음이 자라고 있어서/ 마음 바깥으로 넘어서지 못하고 날마다 출렁이기만 하는가(「울음의 바깥」) 사는 날들이 어찌 울음뿐이랴만 어쩌면 환희와 울음을 정서의 한 축으로 보고 순간순간 마음을 출렁이게 한다는 우리네 삶의 표현을 회화적 의경으로 그려낸 秀作으로 읽힌다. 울다가 웃는 것이 인생이요 웃다가 우는 것도 인생인 것이다. 내 안에 울음이 자란다는 표현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마이클 키멜만은 「우연한 걸작」 이란 제목으로 저서를 냈다. 그러나 필자는 ‘우연’이란 말이 어쩐지 마음에 거슬린다. 걸작은 고투 끝에 얻은 상상초월의 전리품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걸작이란 그냥 노획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아마 걸작은 솔씨가 낙락장송이 된 그 역경으로 견주고 싶은 것이다. 김시인 작품을 필자는 걸작으로 손꼽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속으로 파고들면서 무르익는 것이 녹꽃이랬다. 허리가 손톱이 빠지도록 뿌리를 찾는 일이 인생의 전부라고 적시하고 있다. 녹꽃을 파먹은 초승달은 다시 몸 불린다고도 했다.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등뼈 꼿꼿한 저 그림자에서도 꽃물결이 일고일고( 「갑사 철당간」 ) 이 택스트에서 살펴보면, 파고들고 무르익는다, 꺾이고 파지다, 찾는다, 흔들리다. 일고일고 등등 술어 몇몇을 읽다보면 진정 연극 같은 인생살이가 한 폭의 그림으로 형상화 되어 김 시인이 은유의 필터 그 화상도를 헤아리고도 남는다. 고배율의 내시경으로 신경이나 혈관을 읽어내는 듯 우리네 인생살이가 파노라마로 보인다.
김경성시인의 시어는 색조(色調)나 어조(語調)가 다르고 지문(指紋)이 있다. 공통의 화폐가 아니다. 김시인 자신만의 은유를 시각화한 디스플레이다. 「목제미륵보살반가사유상」 작품에서, 수없이 비워냈던 달이 차오르고 만조의 바다는 빛으로 일렁였다/ 시간의 흔적이 낱낱이 기억되어 있는,/ 한 그루 나무속에 들어앉아 있던 그 사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얼굴에 비치는 빛의 결에 출렁이는 바다의 무늬와 제 속에 경전을 들인 나무의 나이테가 보인다/ 나이테를 가만히 젖히고 바라보니/ 아,/ 고요함의 극치// 라고 적었다. 「목제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 대한 김시인 자신을 훑고 간 시간의 흔적을 목제미륵보살로 형상화 해 내고 있다. 한 그루 나무속에 들어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수 없이 비워냈지만 이내 달은 차오르고 만조의 바다는 빛으로 일렁인다고 하였다. 여기서 달은 바로 시인 자신이요 출렁이는 바다 역시 김 시인이며 제 속에 경전을 들인 나이테는 곧 김 시인의 지문인 것이다. 이내 고요함의 극치에 이르러 바라보이는 자신을 이제야 찾았구나. 아, 나는 즉 전생에 「목제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었을 것이라는.
김경성 시인의 작품 감상에는 시어의 껍질을 깨는 도구가 필요하다.
제임스 W. 페니베이커 (James W. Pennebaker)는 「단어의 사생활」 이라는 책에서 ‘우리는 모두, 단어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고 지적하였다. 필체의 운치를 보면 아, 이 글은 누구 글이구나. 알게 되듯 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필체가 다르며 숨은 의도와 시도가 역시 다르다. 자연 속의 밤 호두 석류 등등 견과류를 보더라도 해와 달, 비, 구름 바람 그리고 시간과 토양은 모든 사물에게 제 나름의 내용물을 달리 키우게 하듯이 사물 모두에게는 제 나름의 언어가 있기 마련이다. 사물 나름의 근원적 열정(뤼스 이리 가라이 Luce Irigaray)이 다르기 때문일 거라는 가정을 해보지만 경이로운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김경성 시인의 경우가 그렇다. 김 시인은 물에 사는 수달이요, 숲에 사는 다람쥐며 석류의 붉은 색조다. 우리 고유의 풍악놀이에서 상쇠 잽이가 풍물을 울려 하늘과 땅을 울리고 풍물패는 물론 구경꾼들의 흥을 돋워 실컷 울고 웃는 놀림의 장으로 이끌 듯이 김시인은 그렇게 독자들을 울리고 웃게 한다. 그러기까지는 물가에 사는 수달이요 다람쥐요 석류의 계절을 견뎌야한다. 석화를 가지고 물위에서 갖은 재주를 부리며 놀다가 싫증이 나면 또 다른 장난감을 찾는다. 그것이 돌멩이다. 석화와 돌멩이를 이리저리 마슬러보다가 두들겨보고 던져도 보고 온몸으로 품고서 자맥질도 하다가 허기지면 배 위에 고정시키고 돌멩이로 북을 치듯 둥둥 두들겨 끝내는 껍질을 깨고 석화 살을 빼내 맛있는 뒤풀이를 한다. 김경성 시인의 흥미로운 시작업의 스펙트럼이다. 단어는 김경성 시인의 놀잇감이다. 김경성 시인이 건져 올린 석화요 돌멩이가 단어다. 단어와 단어를 의도와 시도에 맞춤하는 작업이다. 「노고단 가는 길」 작품에서, 서어나무 흰 수피 빗금 그어서 달의 근처까지 길을 냈다/ 물봉선화 입술 빌려서 나비를 물고 있다/ 길을 따라 걸어가면 달의 문에 닿을 수 있을까, 휘청거리며 산길을 걸었다. 몸의 모든 뼈가 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숲 언저리를 두드렸다. (중략) 내 등을 미는 보이지 않는 손, 뒤돌아서서 서어나무 흰 잔등에 얼굴을 묻었다/ 잔잎들이 술렁거리며 그림자를 잘게 부쉈다/ 몸 위에 수북이 쌓이는 서어나무 속말들 어쩌지 못하고/ 몸 구부려서 꽃잔을 만들었다/ 꽃잔을 감싸 안은 따스한 그림자/ 아/ 원추리꽃 너머로/ 아슴하게/보이는// 이 작품에서 화자의 의도는 달에 이르는 것이요 그 시도는 달에 이르는 길을 내는 것이다. 달에 이르기 위해 쓰이는 은유적 필터에 잡힌 도구는 서어나무요 서어나무에 길을 내는 것이다. 서어나무 숨에 홀로 서서 원추리꽃 너머로 아슴하게 보이는 따스한 달그림자를 본 것이다. 서어나무와 달을 재료로 삶의 세계를 아니 삶의 유토피아를 끌어내고자하는 치열한 작가정신이 엿보인다. 서어나무를 기어올라 금을 긋는 다람쥐 곧 김 시인도 보인다. 물봉선화의 입에서 석류알을 빼내는 나비도 보인다. 꽃잔을 감싸 안는 따스한 달그림자도 보인다. 이윽고 시와 그림과 건축이 총합된 종합예술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김시인의 시작법이다. 시선의 이동이요 관점의 이동을 동원하여 독자로 하여금 시간을 머물게 하고 공간을 만들어 쉼을 제공하는 평면적 건축의 미를 창작해 낸 것이다.
김경성 시인의 작품 감상은 다람쥐의 고단한 노동을 익혀야한다
설한풍우 우여곡절의 결과물들을 가장 많이 비축한 대상이 다람쥐다. 그들의 굴을 찾아 파들어 가다보면 ‘심봤다’다. 밤톨이며 도토리, 잣송이 등등 껍질을 쓰고 있는 견과류들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이는 곧 지극히 어려운 노동을 마다않는 수확인 것이다. 김경성 시인은 자연생태계을 꿰뚫어보는 안목과 모성애를 지녀 자연사물과 동사섭(同事攝)을 즐긴다. ‘새로 밝힌 등불 하나 천 년의 어두움 몰아내고, 새로 깨친 지혜 하나 만 년의 어리석음 없애준다’(원명스님 사섭법 법문 중에서)했듯이 김시인은 자연사물과 더불어 일하고 대화하며 자고 먹고 놀면서 천 년의 미래를 설계하고 만년의 지혜를 깨치려 온갖 자연사물의 단어와 생사고락을 함께한다.
「모란앵무새의 비행지도」 작품은 좋은 본보기다. 모란앵무새와 동사섭한 사례를 적은 시이기 때문이다. 일부만 옮겨보면 이렇다. 무엇을 원하지는 않았다/ 내가 느린걸음으로 걸을 때면 그도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내가 두 손으로 보듬으며 그의 등에 입을 맞출 때면 발톱으로 내 손등을 할퀴었다/ 손등 위에 붉은 길을 긋는 것이 그가 멀리 날아갈 수 있는 길의 지도였음을/ 날개의 깃털을 자르고 난 후에서야 알았다/ 거실에서 쉼 없이 날아다니는 모란앵무 날개의 깃털을 잘랐다/ 천랑성에서부터 흘러온 길을 따라서 날아가고 싶었던 비행지도가 사라졌다/ 날지 못하고 새장 속에서 날갯짓 할 때마다/ 우수수 깃이 떨어졌다./ 날개가 품고 있었던 길을 삼킨 모란앵무의 울음 속에/ 천랑성으로 가는 길이 있다/ 삐우욱 쓔우/ 찌으르륵/ 삐자자작작/ 쑤와락락//
모란앵무가 곧 화자가 아닐까 싶다. 천랑성은 큰개자리의 7개 별 중에서 겨울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로 일명 시리우스라고도 한다는데 이상향, 꿈, 운명 등 여러 가지로 지칭할 수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인생살이 그 삶의 길’에 대한 의경(意境)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김시인의 작고 소박한 길을 가고자 하는 지난한 자신의 눈물겨운 일상의 스케치라고 할 수 있다. 손톱으로 손등을 할퀴고 붉은 길을 긋는 것이 그가 멀리 날 수 있는 길의 지도였음을 날개의 깃털을 자르고 난 후에서야 알았다고 술회하고 있는 화자의 심정은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는 시집의 이름을 짓게 된 동기와 시도가 아니었을까. 이상향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날개 없인 갈 수 없는 그 천랑성 그 허무맹랑한 꿈을 접기 위해 모란앵무의 날개를 자르고, 깃을 잘라 비행지도를 지우며, 새장 속에서 날갯짓으로 깃을 떨어냈으며, 날개가 품고 있던 길을 삼키고 울음 울어댔단다. 그러자 그 울음 속에 천랑성으로 가는 길이 열렸단다. 이루 고자 하는 것을 얻기까지의 수난의 고통을 감내하고서도 이미 잘린 날개요 털어낸 깃이며 길을 삼켜버린 울음 속의 길이거니 모란앵무의 울음소리는 기상천외의 소리가 아니랴 삐우욱 쓔우, 찌으르륵, 삐자자작작, 쑤와락락
「천 마리 새 떼가 날아올랐다」 작품 역시 생체인식을 내시경으로 찍어낸 일향성 식물의 소망을 그려낸 회화적 의경 중의 하나이다. 목 빠지게 기다린다는 말이 있다 ‘날아오르다’그 말 하나로 “그래 소원이 뭐니?” 묻지 않아도 된다. 떡잎 펴고 발돋움하는 씨앗이고 싶은 것이다. 내 안에서 살포시 머리를 내는 씨앗 한 톨이 새들이 날아가는 쪽으로 몸을 트는 그것이 목 빠지게 기다렸던 모양이다. 김시인은 천(千) 단어를 즐겨 쓰는 경향이 엿보인다. 아마도 일천 천(千)이 아니고 하늘 천(天)으로 천지간에, 온갖 것 빠짐없이, 어떤 총체적인 것을 의미하지나 않을까. 천 마리 새떼,/ 떡잎 펴고 발돋음하는 유채밭에서/ 검은 흙에 부리를 넣었다가 꺼내며/ 밭의 숨구멍을 열어주고 있었다/ 어떤 씨앗은 새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서 몸을 숨기고/ 미처 꺼내지 못한 씨앗은 뿌리를 내리는지/ 돌멩이도 비켜 있었다// (중략) 언덕까지 날아갔다 되돌아온 새들이/ 밭의 이마와 가슴에 새싹 같은 부리로 입을 맞추며/ 해국이 피었다고 꼬리를 까딱거리더니/ 날개로 만든 그물을 펼치며 바다 쪽으로 날아갔다// 내 안에서 살포시 머리를 내미는 씨앗 한 톨,/ 어느 틈에 온 몸을 휘감더니 비로소 새들이 날아가는 쪽으로 몸을 튼다//
삶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단어는 ‘새로움’이다. 낯선 차원의 표현을 목이 타도록 기다린다. 신제품 출시 문전에 밤을 새운 고객들이 줄을 서는 이유다. 식감이 그렇다
간이 맞아 감칠맛 나는 음식을 새로이 개발해야만 성업을 이룬다. ‘그것 참 예술이네’ 선뜻 지갑을 여는 고객을 끌어 모으는 그것, 삶을 예술처럼 예술을 삶처럼 펼치려는 그 손맛을 보려는 것이다. 천 마리 새 떼가 검은 흙에 부리를 넣었다가 꺼내며 밭의 숨구멍을 열어주고 있었다는 것은 자연의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노동이다. 하지만 흙에 묻힌 씨앗으로 목숨을 이어가려는 본능이요. 껍질을 단단히 하여 새의 몸속에서도 살아남아 떡잎을 열기도 하고 무거운 돌멩이도 비껴나 줄기를 세우며, 펴지지 않는 날개만 만지작거리다가 멀리 날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흙에 발을 묻고 새들이 날아간 쪽으로 그제서야 몸을 트는 일향성 식물로 살아가는 인생살이도 있더라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야기를 엮어낸 솜씨는 참으로 경이롭다.
김경성 시인의 작품성은 실제 삶 속에서의 감각을 통해 실증되는 텍스트이다. 자연을 포획하여 동사섭하며 이상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 내장된 실용적인 즉 쓸모 있는 도구로서의 작품을 지향하고 있다. 비인간적인 예술을 위한 예술도 좋지만 살아있어 움직이는 아름다움이고 싶은 것이다. 회화에서 키네틱아트가(Kinetic Art)가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단어를 주재료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만 하지만 미래에는 평면에 움직이게 하는 건축을 세우듯이 입체적인 시 쓰기를 생각해 봐야할 때이다. 김경성 시인은 오래전부터 키네틱아트를 접목하여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행간에 움직이는 건축이 보인다.
머루덩굴에 긴 이야기를 쓰고 있던 저녁/ 새들이 검은 실을 물어다가 하늘을 이쪽저쪽 매듭을 짓고는/ 연못에 빠진 별들을 건져내고 있다/ 이윽고 초승달 하나 목에 걸치고 뒤뚱거리는/ 새의 날갯짓이 긴꼬리제비나비 같다.「검은 부리에 대한 기억」 일부분
머루덩굴에 긴 이야기를 쓰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거기에 김 시인이 있다. 새들이 검은 실을 물어다 이쪽저쪽 매듭을 짓는 움직임과 여러 순간을 한 문장에 담아내어 입체감을 살려내고 있다. 연못에 빠진 별들을 건져내다니 이는 건물의 안과 바깥의 움직임이 운동감으로 출렁인다. 초승달 하나 목에 걸치고 뒤뚱거리는 긴꼬리제비나비의 춤사위가 있어 안채 마당에서 마당극을 연출하는 듯 깜찍한 짓과 이색적인 멋이 새어나오는 좋은 작품이다. 「추전역」 작품에서 ‘당신의 옆줄에 기대어 내 생도 저물어간다’ 고 했다. 우리는 어느 누구나 누구누구의 옆줄에 기대어 살고 있다. 너와 나의 체온과, 움직임과 기운과 느낌에 젖어들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눈치 보며 살고 있는 것이다. 농악에서 꽹과리 징 북 장구 소고가 울어야 하늘과 땅이 울 듯 어느 단어 하나가 어떤 진동으로 떨리는가에 따라 세상도 따라 성쇠고락을 함께한다. 시인은 詩語 하나가 하늘을 울리고 땅을 울릴 때 까지 치열한 작가정신을 단련해야 할 것이다. 자연사물과 더불어 동사섭을 즐기는 김경성 시인의 독자들은 붉은 당신이 되기를 열망할 것이다.
2014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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