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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시인/철학 강의

[빠른 삶 느린 생각] 고통·슬픔에 대한 성찰 없이 삶의 이해는 완전할 수 없다

by 丹野 2014. 3. 2.

 

 

 

 

[빠른 삶 느린 생각] 고통·슬픔에 대한 성찰 없이 삶의 이해는 완전할 수 없다

생각의 여러 겹에 대하여 <2> 밤의 찬가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제363호 | 20140223 입력

 

 

일러스트 강일구

 

지난번 칼럼에서도 지구의 각처에서 일어난 천재(天災)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천재의 뉴스는 그치지 않는다. 며칠 계속해서 유럽 남부의 폭설, 영국 서남부의 폭우와 홍수, 그리고 미국 남부와 북동부의 폭설 소식이 들려온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아침에는 다시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화산 켈루드가 폭발하였다는 뉴스가 있다. 폭우나 폭설은 기후 변화에 따른 재난-그러니까 다분히 인재(人災)에서 시작한 천재라고도 하고, 또 다른 해석으로는 지구나 우주의 자연스러운 물리적 조건이 원래 그러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이러한 뉴스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되어 재난이 쉬지 않고 일어난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얼마나 긴 기간 또는 넓은 지역을 두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인상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사람이 매우 불안정한 환경 조건 속에서 산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도대체 사람이 생명의 긴 역사 속에서 진화해왔다는 것이나, 보다 짧게는 문명의 변화하는 역사 속에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생존 조건의 불안정을 말한다. 잠깐 편안한 때가 있어도 길게 보면 편안할 수 없는 것이 삶이다.

얼마 전 영국의 BBC 뉴스 인터넷판에는 여러 연구 결과를 종합한, 지구의 미래의 변화 연표가 실렸다. 삶의 불안정성을 가장 큰 테두리에서 비추어 보게 하는 보도라고 할 수 있다. 지구에 일어나는 변화 가운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500만 년 후에는, 아무 다른 대재난이 없다고 하더라도, 유전자 중 y 크로모솜이 소진되어 인간이 절멸할 수 있다는 예언이다. 문화 자산의 지속을 믿는 사람에게는 지금부터 1000년 정도 지나면 오늘의 언어의 어떤 단어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으리라는 예언이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나는, 고대 한·일관계 연구에 열중했던 경제학자 홍원탁 교수로부터 2000년 전에는 일본과 백제 사이에 소통을 막는 언어적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언어 변화나 종(種)으로서의 인간의 기원과 종말은 우주의 역사로 보아 지극히 짧은 시간-찰나(刹那)에 일어나는 일에 불과하다. 인간의 존재가 사라진 후에, 생명체의 환경에 여러 변화가 일어나서, 다세포 동물이 없어지고, 광합성이 불가능해져 식물이 없어지는 등의 일이 일어나다가 13억 년 후에는 모든 생명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사이에 지구의 모습도 변하여, 나이애가라 폭포가 없어지고, 지중해가 마르고, 급기야는 모든 대양이 증발하여 사라진다고 한다. 79억 년 후에는 태양의 지름이 확대되어 지구는 수성이나 금성과 함께 태양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고, 200억 년 후에는 우주의 팽창이 모든 물질을 파열하게 하고, 우주가 종말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 후에 우주는 계속적인 파괴와 해체의 과정으로서 지속될 뿐이다.

말할 것도 없이, 국외자가 이러한 예언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의 관점에서도 그것은 확실한 것으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되풀이하건대, 크게 보거나 작게 보거나 변화와 불안정이 인간 조건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상기하는 것이 무슨 의의를 갖는가? 오늘에 중요한 것은 오늘의 관심 범위 내에서의 삶의 조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가는 삶의 조건들-지질학적 또는 우주론적 조건도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반성에 무관계한 일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반성은 인간의 현실 행동에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삶이 무상하고 허망하다는 것은 이미 철학적 형이상학적 인간 이해의 일부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생각은 불교만이 아니라 여러 문화 전통에서의 삶의 근본에 대한 형이상학적 반성에 두루 들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부분적 현실에 대하여 반성의 초연함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실천윤리의 격률이 된다.

제행무상의 깨달음이나 우주의 역사라면 몰라도 끊임없는 재난의 뉴스도 그러한 효과를 갖는 것일까? 우리에게 전해지는 단편적인 정보들은 대체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약화시키는 일을 한다. 직접적인 효과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서 몸을 사리게 한다는 것이다. 건강에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는 정보가 갖는 단적인 효과가 그러한 것이지만, 개인 관계나 사회 관계 또는 국가 관계에서 자기방어적인 태도가 강해지고 법술(法術)이 삶의 전략이 되는 것도 그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보에 대한 태도는 그것이 신변으로부터 또 지리적으로 얼마나 떨어진 데에서 오는 것인가에 따라, 즉 거리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된다. 이것은 2011년의 일본 동부 지방의 지진, 쓰나미, 원전 사고 등과 이탈리아나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재난에 대한 반응을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일어난 일은 드물게 큰 규모의 재난이기도 하였지만, 우리에게 큰 관심사가 되었는데 최근의 일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뉴스에 그치는 감이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거리와 함께 규모의 크기도 우리의 반응에 미묘한 변주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가까운 데에서 일어난 큰 재난은 자기방어의 경계심, 또는 요행으로 그것을 피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을 갖게 하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공감과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일본의 후쿠시마 재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적어도 그 당시의 반응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대하여 먼 데에서 일어난 재난은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느낌을 일반화하는 데 작용한다. 이것은 사람의 세계를 널리 말하여 그것을 고해(苦海)라고 하는 경우에 비슷하다. 다만 종교에서 이것은 삶 일반에 대한 슬픔 그리고 고통 속의 인간에 대한 슬픔과 동정으로 이어진다.

이 경우의 자비심은 감정이 인간 조건에 대한 일반적인 느낌을 넘어 개체적인 삶에로 향한 결과이다. 개인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쉽다는 것은 아프리카의 아동 빈곤을 알리는 사진 보도에서, 집단의 사진보다도 한 아이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진이 효과적이라는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다시 이데올로기가 불러일으키는 분노와 실존적 현실에 대한 성찰적이면서 감성적인 공감의 차이도 이에 비슷한 마음의 움직임을 예시한다.

종교적인 또는 성찰적인 자비심이 보통의 삶에서 느끼는 슬픔으로부터 아주 먼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시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가을이다. 가을은 슬픔의 마음을 자극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삶의 무상에 대하여 또 일반적으로 자신을 넘어 세상에 대하여 마음을 넓혀주는 매개자가 된다. 대조적으로 기쁨 또는 쾌락은-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마음을 자신에게 집중하게 한다. 물질적 번영과 현세적인 만족-또는 세속화된 행복을 지상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세계는, 오늘의 세계가 그렇듯이, 좁아진 자기중심의 세계이기 쉽다.

보들레르는 세속적 욕망과 동시에 그에 대한 증오와 경멸로 가득 찬 시인이다. 그러나 그가 슬픔과 쾌락의 역설적 변증법을 모른 것은 아니다. 그의 시 ‘반성(Recueillement)’은 적어도 쾌락은 강박을 가져오고 슬픔은 그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온다는 것을 말한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현명하라, 나의 슬픔이여, 고요 속에 견디라,
너는 저녁을 원했거니와 이제 저녁이 왔다.
어두운 저녁 공기가 도시를 감싼다,
어떤 사람에게는 평화, 다른 사람에게는 근심을 가져오며.
천박한 인간의 무리들이 쾌락의 채찍 아래에서,
이 자비심 없는 처형자 쾌락의 재촉으로
노예의 축제에 몰려가 뉘우침을 거두어들일 때,
손을 다오, 내 슬픔이여, 이리 오라, 그들을 멀리하고.

여기에 이어서 보들레르는 슬픔이 옛날을 되돌아보고, 미소하는 회한을 거두어들인다고 말한다. 그 다음에 나오는 시의 마지막 부분의 의미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아치 너머로 죽어가는 해가 잠들고/ 부드러운 밤이 동쪽에서 수의를 끌듯 오는 소리를 들으라”는 구절은, 슬픔이 죽음을 시사하면서 동시에 마음과 세상의 평정을 가져온다는 것을 말한다. ‘반성’은, 모호한 대로, 다른 시인의 제목을 빌려 말하건대 (의미가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밤의 찬가이고 슬픔의 예찬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시를 감상하거나 지구의 도처에서 들려오는 재난 뉴스의 의미를 헤아려 보자는 것만은 아니다. 행복과 쾌락은 삶의 주요한 버팀목이다. 그러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성찰이 없이는 삶의 이해는 완전한 것일 수 없다. 이 이해는 개인에게서만이 아니라 사회나 정치의 계획에서도 깊이 있는 사고(思考)의 기초가 된다. 크고 긴 비전만이 큰 결단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의 조건을 조금 더 길게 봄으로써만 생각할 수 있는 생태환경에 대한 결단에 있어서 이것은 특히 그러하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와 철학·경제사를 공부했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출처 / 세상과 세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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