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24) 김기택, 〈껌〉 |
씹히거나 씹힘을 당하거나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 |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 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 놓은 껌. 그 많은 이빨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 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 준 껌. 야만적 사회는 서로가 적이 되어 으르렁거리는 사회이며, 죽거나 죽이는 살육의 열기로 끓는 사회다. 만인이 만인의 늑대가 되어 사는 사회에서는 날카로운 이빨로 상대의 숨통을 물어 끊어 잡아먹거나 아니면 상대에게 잡아먹힌다. 이 사회에서는 책략과 전략이 윤리와 도덕을 앞지르는데, 책략과 전략 아래로는 항상 무겁고 걸쭉하고 끈적거리는 붉은 핏물이 강물로 흐른다. 이기주의라는 이름의 야수들이 활개를 치고, 이타주의라는 이름의 정신들은 반딧불이로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깜빡거린다. 서로를 향한 공포와 증오와 역겨움이 넘쳐나는 이런 사회에서 생존의 가장자리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등짝에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이 남는 일이다. 보이는 것은 상처가 아문 흉터로 남고, 숨은 것은 트라우마로 변한다. 타자는 늘 불필요한 잉여, 끈끈이, 천덕꾸러기, 괴물, 불행과 추악의 근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바로 타자라는 사실은 잊는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뱀에 목구멍을 물린 양치기의 우화를 들려준다. “몸을 비틀고 캑캑거리고 경련을 일으키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어떤 젊은 양치기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시커멓고 묵직한 뱀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내 일찍이 인간의 얼굴에서 그토록 많은 역겨움과 핏기 잃은 공포의 그림자를 본 일이 있던가? 그는 잠을 자고 있었나? 뱀이 기어 들어가 목구멍을 꽉 문 것을 보니.” 이것은 하나의 환영이다. 뱀에 물린 이 양치기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뱀은 불행이자 고결함을 잃은 추악한 인간의 상징이다. 우리는 그 불행과 추악한 인간들에 물려 캑캑거리는 불쌍한 양치기들이다. 그 역상(逆像)을 보면 우리 자신이 바로 타자의 불행이며, 타자의 목구멍을 물어뜯는 뱀이 아닌가? 우리 안에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 즉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가 숨어 있다. 우리는 풀도 나무도 없고, 물도 흐르지 않고,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골짜기에서 서로를 물기 위해 몸을 숨기고 있다. 이빨들은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을 내장하고 있다. 우리는 그 이빨들을 숨긴다. 그러다가 필요한 순간에 이빨들을 드러내어 타인을 물어뜯는 것이다. 이빨들은 충동이고 욕망이며, 추악한 이기심이고 자기기만이며, 집중된 권력이다. 씹는대로 그 저작의 힘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껌”은 순교자다. 이 “소수자들”은 숫자가 적은 게 아니라 척도에서 비켜난 자들이다. 가난한 나라의 이주노동자들, 강제수용소의 유대인들, 굶주리고 학대받는 아이들, 계속되는 노동과 수고로 인해 피로에 절은 도시생활자들, 납세와 병역의 의무 아래에서 헐떡거리는 우리는 소수자들이다. 우리는 씹히면서 동시에 “껌”을 씹는 이빨들, 즉 피해자이자 가해자들이다. 우리는 씹히거나 씹힘을 당하지만 용케도 부서지거나 찢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문명의 시대를 산다. 이 문명은 과학-기술-산업의 아들이다. 김기택의 시들은 이 문명의 주변에 질펀하게 널려 있는 죽음의 곡절들을 채집하고 그것들을 낱낱이 일러바친다. 시인은 이 죽음들이 대개는 평화스런 자연사가 아니라 갑작스런 비명횡사들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문명의 야만적 반생명성을 뿜어내는 것은 그 내부에서 이것을 가동하는 미친 속도들이다. 이것의 “걸칠 것 없이 뽑혀져 나오는 속도”(〈고속도로〉)는 뭇 생명의 리듬을 불편한 것, 미개한 것, 비효용적인 것으로 낙인찍는다. 문명은 속도들을 집어삼키고 그 내부에 스스로의 종말을 감추며 영구적 파멸로 달린다. 문명이 이 속도를 물신화하자, 속도는 곧 생명을 누르는 폭력으로 변질한다. 이 속도와 맞부딪치는 순간 생명들은 바로 임계점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터져버린 체액은 유리창에 남고 / 거죽은 탄피처럼 튕겨져나”(〈교통사고〉)간다. 속도-기계들은 생명의 조건과 상황을 규정하고 빠르게 바꿔 나간다. 직접적인 현존들은 이 속도-기계들에 둘러싸여 살아남기 위해 악전고투를 한다. 그 정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시가 〈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에서〉다. “덤프트럭 앞에서 짐자전거가 앞만 보며 달린다 / 갓길 없는 좁은 이차선 도로 / 아무리 빠르게 밟아도 / 느릿느릿 돌아가는 자전거 바퀴 / 사자 아가리 같은 경적이 쩌렁쩌렁 울며 뒷바퀴를 물어도 / 헛바퀴만 돌리며 / 아직도 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을 지나가고 있는 자전거 // 자전거를 삼킬 듯 트럭은 꽁무니에 붙어서 오고 / 거대한 코끼리 한 마리 줄에 달고 가듯 바퀴는 한적하고 / 발과 페달은 자전거 바퀴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제국을 향하는 자들은 속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마을을 향하는 자들은 느림을 산다. 덤프트럭은 제국에 포섭되고, 자전거는 마을에 포섭된다. 같은 바퀴라고 하더라도 덤프트럭과 자전거의 바퀴는 그 본질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하부구조에 포섭된 덤프트럭의 바퀴는 문명의 속도를 내장하지만 자전거의 그것은 생명의 느린 리듬에 따라 움직인다. 시인은 덤프트럭이 느린 자전거를 추월하려고 경적을 울려 대며 위협하는 풍경에서 속도-기계가 생명을 파멸로 모는 양상을 콕 집어낸다. 그러나 문명의 속도-기계들이 아무리 위협해도 생명은 느릿느릿 제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이게 생명의 한계이자 위엄이고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문명이 숭배하는 기계-속도 앞에서 생명은 하나의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더 심각하고 우울한 것은 현대 문명은 스스로 이 속도를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불편한 속도를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 / 어느 날 도로 위에서 서너 시간 숨통처럼 꽉 막혀 있다가 / 겨우 그 정체에서 벗어나 / 속도에다 온몸의 복수심을 다 집중시켜 정신없이 채찍질하다가 / 죽거나 죽이거나 / 움직이지 못하는 엉덩이에 둥근 뿔이 달리기 전까지는.”(<죽거나 죽이거나 엉덩이에 뿔나거나>) 문명은 “죽거나 죽이거나” 한사코 달릴 수밖에 없다. 멈추는 순간 문명은 자체의 내부 모순으로 파멸한다. 이 속도를 눈에 보이지 않게 숨어서 추동하는 것은 무엇일까 ? 시인은 메마른 목소리로 말한다. 그것은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껌>)라고! 사진 : 김선아 김기택(1957~ )은 도시를 거점 삼아 생계를 해결하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도시생활자다. 도시는 표면이 곧 심연인 세계다. 그는 불가피하게 도시생활자의 감각에 포착된 도시를 노래한다. 이상과 김기림이 일찍이 길을 내고 김수영과 최승호가 걸어간 그 길에 김기택은 서 있다. 도시를 횡단하는 자들, 이 도시의 골상을 뜯어 보고 그 운명을 예지하는 유물론적 골상학자들! 이들은 세속의 계시를 시로 구현한다. 생명들은 물렁물렁하고 나약하고 발랄하다. 속도-기계들은 딱딱하고 강하고 무뚝뚝하다. 시인은 그것의 대립을 차갑게 바라본다. 겉으로 드러난 김기택은 차가운 사실주의적 관찰자이지만, 속으로는 어둡고 우울한 비관주의자다. 때로 그의 사실주의적 관찰은 집요하고 끔찍해서 읽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이를테면 〈개 2〉를 읽을 때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껌》(창비, 2009)은 메마르고 퉁명스런 도시를 살아 내야 하는 도시생활자의 불편한 심경을 노래한 시집이자, 둥근 바퀴들의 발명에서 시작된 속도-기계의 생태를 오래도록 관찰하고 그것이 생명을 대하는 무뚝뚝함과 비정함을 일러바치는 고현학적(考現學的) 탐구의 결정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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