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무개화차
허 연
남자는 사랑이 식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신전 기둥에 모든 새들의 머리가 자신의 사랑을 경배하도록 새겨놓았다. 지혜롭다는 새들의 머리는 수천 년 동안 욕망을 마주했지만, 세월이 그것보다 먼저 욕망을 반박했다. 남자는 울부짖었지만 여자는 사하라의 먼지가 되어갔다. 파이터였던 남자는 더 많은 기둥을 세우다 미쳤고, 서풍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폐허의 불문율이 있다. 묻어버린 그 어떤 것도 파내지 말 것. 폐허 사이로 석양이 물처럼 흐를 때 속수무책으로 돌아올 것
오늘 밤 모래바람이 등고선을 바꾸고
사막여우 한 마리가
사람들이 버리고 간 콜라병을 핥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인생을 생각하는 내내 힘이 빠진다.
마지막 무개화차가 지나간다.
내가 원하는 천사
허 연
천사를 본 사람들은
먼저
실망부터 해야 한다.
천사는 바보다.
구름보다 무겁고,
내 집게손가락의 굳은살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천사는 바보이고
천사는 있다.
천사가 있다고 믿는
나는
천사가 비천사적인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상상해왔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천사를 떠올린다.
본드 같은 걸로 붙여놓았을 날개가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한 천사.
허우적거리다
진흙탕에 처박히는 천사.
진흙에 범벅되는 하얀 인조 깃털
그 난처한 아름다움.
아니면
야간 비행 실수로
낡은 고가도로 교각 끝에
불시착한 천사
가까스로 매달린 채
엉덩이를 내보이며
날개를 추스르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니면
비둘기 똥 가득한
중세의 첨탑 위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측은하게 지상을 내려다보는
그 망연자실.
내가 원하는 천사다.
몰락의 아름다움
허 연
무너져버린 콘크리트 더미 사이에서 고양이들이 짝짓기를 한다. 순식간에 장르가 바뀐다. 에로다. 며칠 전까지 이곳에서 벌어졌던 중장비들의 공포는 이미 잊혔다. 족보 한 장이 이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을까.
몰락은 사족 없이도 눈부시다. 내밀한 서사가 창자 밀려 나오듯 나와 있는 몰락은 눈부시다. 미리 약속하지 않았으므로 몰락은 눈부시다. 그리고 그 몰락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짝짓기란.
무거웠던 것들이 모두 누워버린 몰락의 한가운데서 고양이의 배 속에 담겨 날아온 씨앗들도 싹을 틔우리라. 똑바로 서 있던 벽들의 모습은 고양이들에게 더 이상 기억되지 않으리라.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허 연
배고픈 고양이 한 마리가 관절에 힘을 쓰며 정지 동작으로 서 있었고 새벽 출근길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전진 아니면 후퇴다. 지난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와 종일 굶었을 고양이는 쓰레기통 앞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둘 다 절실해서 슬펐다.
“형 좀 추한 거 아시죠”
얼굴 도장 찍으러 간 게 잘못이었다. 나의 자세에는 간밤에 들은 단어가 남아 있었고 고양이의 자세에는 오래전 사바나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녀석이 한쪽 발을 살며시 들었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고. 나는 골목을 포기했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선 나직이 쓰레기봉투 찢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와 나는 평범했다.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시집『내가 원하는 천사』
검은 지층의 노래
허 연
열병 앓는 머리맡에서 아주 오래 전 노래가 흐른다. 지층의 흉터를 따라 흐르던 노래. 지층이 파 놓은 아주 미세한 홈을 따라 흐르던 노래. 가끔씩 상처 난 지층의 절개면에서 불협한 소리를 내곤 하던 노래. 돌고 돌았던 검은 지층의 노래. 누구의 뼈를 깎아서 만든 노래. 그 뼈를 기억하고 있는 검은 노래.
판판이 깨진 노래. 한 시대와 또 다른 시대가 장중하게 죽어 갔던 노래. 모닥불에 던지면 한 줌도 안 됐던 노래. 애저녁에 영원할 수 없었던 노래. 손쓸 수 없는 파멸을 담았던 노래. 차마 칼을 뽑지 못했던 그 봄밤에 들렸던 노래. 일몰 후에는 단조로 변했던 세월의 노래.
세로로 서 버린 노래. 문자가 되어 버린 노래.
나쁜 소년이 서 있다
허 연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너무나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허 연
1966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세계》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불온한 검은 피』『나쁜 소년이 서 있다』『내가 원하는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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