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의 힘, 새로운 세계 / 이건청
시인은 가장 민감한 감각의 촉수로 삶의 본질을 인식하면서, 상상력을 통해 결핍된 세계를 보완해주는 사람이다. 시인의 상상력은 일상 세계에서 느끼는 결핍 요소들을 채워줄 수 있는 위대한 힘이다. 시인은 또한 무한 자유를 희구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무한 자유를 희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나 삶의 일상 속에서 결핍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사람처럼 늘상 공복감을 느끼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그러나, 시인은 다행스럽게도 무한한 결핍을 메워줄 상상의 세계를 열어감으로써 늘, 현실의 공허와 열패감을 극복해간다.
시는 세상과 사물들을 새로운 모습으로 발견해 내는 방식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게 되는 유형무형의 사물이나 현실들은 제각기 나름의 모습이나 특질, 그리고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유형무형의 사물이나 현실들은 대개의 경우, 일상으로 접하면서 익숙해진 것들이다. 삶의 주변에서 마주치는 생활도구들로부터 직장 동료들의 면면에 이르기까지, 혹은 출근길 도시의 번다함으로부터 계절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들과 현실들이 눈에 익은 것들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그 실체나 본질까지도 망각되고, 이제는 관념으로 추상화되어 버린 것들 속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익숙한 사물들은 구체적 통찰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그것들의 외양마저 잊고 사는 경우도 많다. 가깝고 익숙해졌으므로 그 실체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아이러니칼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우리 주변에서 친근하고 익숙한 관계에 놓여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구체적 세부를 잃어버렸거나, 구태여 그런 것들을 떠올릴 통찰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관념이 되어버리게 마련이다. 관념의 족쇄에 묶인 채 타성화된 대상들 - 우리는 그런 대상들과 현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의 모든 사물들과 현실까지가 관념이 되어 있다. 관념과 타성에 묶인 사물들과 현실을 ‘투명하고 명징하게 보게 해주는 눈’이 필요하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실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구체적 실체를 그려볼 수 없는 경우는 너무나 많다. 흔히 보게 되는 참새 한 마리도 그저 관념으로의 참새일 뿐이다. 검은 눈이며 작은 발톱, 깃털의 무늬는 물론 그 가슴팍의 따스한 온기 같은 걸 지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참새 한 마리가 날으는 저물녘의 스산함이나 눈발 스치는 그것들의 잠자리 같은 걸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사물이나 현실들이 관념화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물이나 현실들이 관념화되는 것은 ‘보는’ 방식을 답습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대상을 거듭해서 바라보는 동안 대상은 구체적 세부를 잃게 되고 상식화되고 관념화되면서 의미만 남는다. 의미는 무미건조한 것일 뿐이다.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해서 무미건조한 관념 속에 침잠해버린 사물들과 현실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아니, 모든 사물과 현실들은 모두 관념화되어 있는 것이고, 시인이 와서 그의 고유한 본질을 불러주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라는 게 옳은 말일 것이다.
반복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접하는 일은 쉽고 편한 것이다. 인식 주체인 ‘나’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스스로 펼쳐 대상의 본질을 인식해야 하지만, 그런 과정은 번거롭고 힘들며 고통스런 일이기까지 하다. 상상력과 감수성이 활발하고 역동성 있게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번다한 세속과 다른 심리적 긴장과 흥분상태가 필요하게 마련인데, 그런 기회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고도의 집중과 언어 획득 역시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반복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접하게 되면 이런 어렵고 힘든 과정 없이 곧장 사물이나 현실에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쉽게 도달한 사물이나 현실은 관념과 타성이며 상식에 길들여진 세계일뿐이다. 사물의 감각을 회복하는 일이 시의 일이고 시인의 일이기도 하다. 사물이나 현실을 "보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책무인 것이다.
영랑의「돌담에 소색이는 햇발」이나 목월의「산도화」, 미당의「동천」같은 시들을 통해서 시의 눈이 찾아낸 명징하고 투명한 감각과 그런 감각이 이끌어 내는 사유의 깊이를 만나볼 수 있다. 시인은 남들처럼 익숙하고 친근한 ‘눈’이 아닌 ‘낯선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면서 본질과 실체로서의 새로운 대상의 모습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시는 ‘영속하는 가치’를 창조한다. 사람은 카오스의 와중에서 살아간다. 생성된 것들은 곧 소멸되기도 하고 순간적인 변환을 겪기도 한다.
그야말로 소멸과 변환과 혼돈의 시간 속을 따라 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소멸의 시간 속에서 ‘영속하는 가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시인 윤동주는 벌써 5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시 「또 다른 고향」이나 「별 헤는 밤」을 읽으면서 그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했으며, 어떻게 그리움의 깊이를 형상화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의 시 속에 그의 생각과 느낌이 스며들어 ‘영속하는 가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는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언어 형태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생각이나 느낌’을 쓴 글은 시가 아니며, ‘형태’로 표현된 ‘생각과 느낌’만이 시일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의 생각과 느낌은 ‘언어 형태’를 획득할 때에만 영속하는 가치가 될 수 있다. "형태"를 획득하지 못한 생각과 느낌은 그냥 진술적 언술로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시인의 생각과 느낌이 영속하는 가치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형태’를 획득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외로움’을 추상적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 사물로 발견해 낸다는 말과 같다. 즉, ‘관념의 사물화’ 과정을 거친다는 말이다. 시에 있어서 관념을 사물화할 수 있는 방법이 이미지의 발견이다. 이미지는 인식의 언어이다.
이건청(李建淸, 1942년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하였고, 한양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녹원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으로 《이건청 시집》,《하이에나》,《목마른 자는 잠들고》,《망초꽃 하나》 등이 있다. 내면에 깊이 침잠하여 현대 정신의 위기와 심연을 의식의 심층에서 형상화하고 있다. 한양대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출처 / 세상과세상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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