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응시하는 문학의 몇 가지 태도
나호열
1.
지난 여름은 참혹했다. 며칠 동안의 폭우는 산을 무너뜨리고 먼 바다를 지나가는 태풍은 연안의 어장 漁場과 논과 밭을 휩쓸었다. 도시 산간을 막론하고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재산의 손실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듯이 오늘의 하늘은 맑고 푸르다. 졸지에 생활의 터전을 잃은 울부짖음과 폭염을 즐기며 여름이 좋다는 해수욕객의 멘트가 차례로 등장하는 TV 뉴스는 쉽지 않은 문제 하나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자연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어디까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어디까지 인간의 발밑에 자연을 부릴 수 있을 것인가? 솔직하게 말해서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인간의 속 쓰린 결단만이 차선책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지구의 온난화가 물질문명의 치명적 결과물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은 있으나 유일한 단 하나의 해답은 아니다. 화산 폭발과 지진, 태풍과 쓰나미를 감지할 수는 있으나 그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재해는 인간에게는 혼돈이지만 자연 자체로 볼 때에는 질서로 향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수 년간 논란을 거듭해 온 4 대강 준설, 도로나 철도를 건설하기 위한 터널 굴착, 시화호나 새만금 방조제 건설은 생태계의 변화를 초래할 것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생태계의 변화는 분명 인간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미시적 관점은 전 지구적, 시대를 초월하는 장기적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산을 깎아내고 논을 갈아엎어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에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펼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산림과 논밭이 공기 정화에 얼마나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개발의 필요성이 자연보호의 당위성을 압도하거나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세제나 샴푸 같은 생활용품의 남용에는 저항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호수나 강의 오염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율배반은 친환경이나 생태를 부르짖는 구호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까닭에 다소 도전적으로 보이는 아래와 같은 주장이 훨씬 설득력을 갖게 된다.
*기후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연약한 우리 자신이다.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의 엄청난 영향력과 파괴력을 비판하면서 돌아서서는 우리가 지구를 구해내야 한다는 달콤하지만 모순적인 주장에 현혹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 정말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친환경의 환상이 아니라 급격하게 변화하는 자연환경에 현명하게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다.
수 십 년 동안 미국의 경제봉쇄정책에 시달려 온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는 도심 都心에 수많은 텃밭이 조성되어 있다. 빌딩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 각종 채소를 심어 자급자족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도시의 공기를 정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삭막한 도시민에게 무형의 안정감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일으킬 수도 있다. 생존을 위한 행위가 의도하지 않은 긍정적 효과를 유발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구의 온난화로 대서양의 해수면이 상승하자 미국 지방정부는 연안의 방파제를 높이거나 보강하는 방책을 버리고 아예 내륙 쪽으로 도시를 옮기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자연순응적 태도는 우리에게도 매우 소중한 교훈이다. 지난 여름 서울 한 복판에서 벌어진 우면산 산사태를 놓고 천재이니 인재이니 갑론을박 하는 것보다는 현재의 과학으로 예견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자연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유용할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는 인간의 역사, 더 좁게 말한다면 자본주의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 즉 소유의 극대화를 꾀하는 시스템이다. 본능에 의존하는 생존을 넘어서서 가치를 향유하고자하는 인간 욕망의 평등화를 제어할 방도를 가지지 못하는 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종속 내지는 수탈 收奪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자연, 환경, 생태에 관심을 갖는 문학은 인간의 욕망, 사회, 정치적 관계에 눈을 돌릴 수 밖에 없다. 일찍이 최승호는 시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를 통해서 시화호방조제 토목공사가 단순히 환경과 생태 보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집단심리와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헤치면서 우리 모두가 시화호 파괴의 공범이라고 외친다. 건설회사와 관료의 결탁, 폐수를 방류하는 공장주들의 파렴치함, 내 일이 아니라고 무관심한 우리 모두가 자연을 망가뜨리는 주범이라는 자각은 광범위한 각성의 여파를 남기는 것이다.
2.
이재백의 소설 「따뜻한 봄날」(『시와 산문』 2011년 여름호)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농촌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화자 話者는 중년을 넘어서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농부이다.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온 화자에게는 그 세대에 드물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내가 있으며 함께 농사를 짓고 있다. 시집간 딸들은 도시로 나가 살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을 하지 못한 아들도 도시에 살고 있다. 농촌생활은 은퇴 후 꿈꾸는 전원생활이 아니라, 매주 한 번씩 들러 가꾸는 주말농장의 낭만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동이 필요하고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여야하는 고단한 일상을 요구한다. 수확을 거두기 전까지 예기치 않은 가뭄과 홍수, 태풍에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 밖에 없는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어디 그 뿐인가. 자본주의적 유통구조는 생산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농산물의 가격을 쥐락펴락한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현실에 있어서 - 이농 離農은 억제할 수 없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화자에게는 더 이상의 탈출구가 없다. 대를 이어 자식들에게 농사꾼의 멍에를 씌울 만한 의지도 신념도 없다. 그래서 「따뜻한 봄날」의 마지막은 아들이 회사원으로 취업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듣는 것으로 장식된다. 그러나 「따뜻한 봄날」의 풍경은 적지 않은 생각꺼리를 우리에게 남겨준다. 농촌으로 시집갈 처녀가 없어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신부감을 모셔와야 하는 현실, 식량의 자급율이 떨어질 때의 국가적 대책, 불합리하기 그지 없는 생산과 유통의 소비구조의 개선 등 「따뜻한 봄날」 이 공란으로 남겨둔 질문은 문학의 중요한 기능인 독자들의 각성과 행동의 불모지를 우리 앞에 던져준 것과 다름 없다. 이 모든 문제는 인간과 인간과의 소통을 넘어서서 인간과 자연의 불통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더 솔직하게 말하면 인간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자연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여문 알곡을 벌레들이 마음껏 먹도록 내버려두고, 잡초들이 무성하게 수명을 다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생태니 친환경이니 하는 미사여구를 얼버무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3.
마경덕의 「폭우」( 우리시 2011년 8월호)는 자연의 위력이 얼마나 공포스런 것인가에 대한 증언이다. 산사태에 매몰되고, 홍수에 집이 떠내려가는 재해는 일진이 나쁘거나 재수가 없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싸고 항존하는 자연의 위대함이다. 인간이 살고 있지 않은 지역에서의 자연현상을 재해 災害라고 외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담요와 모래주머니가 흥분한 물의 대가리와 맞섰지만 골목으로 몰려든 속도는 폭력적이었다. 역류된 골목이 문턱을 넘는 순간, 물이 독니를 드러냈다.
골목에 숨어살던 물뱀에게 모두 물렸다. 삽날로 물의 몸통을 찍을 수 없었다.
- 「폭우」 마지막 연
발달된 과학은 태풍이, 쓰나미가, 지진과 화산 폭발이 어떻게 일어나는 지 조금씩 알아가곤 있지만 그런 자연현상 자체를 막을 방도를 알려주진 못한다.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녹는 현상이 지구의 온난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차리긴 했지만 수십 만 년, 수백 만 년 주기의 빙하기와 간빙기의 변화일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지워버리지 못하고 있다. 「폭우」는 자연의 무시무시한 위력 앞에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반추하게 만든다. 인간의 품에 깃든 것이 자연이 아니라 자연에 종속된 것이 인간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겸손하게 기억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자연의 위력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박후기는 「쓰나미 클레멘타인」( 『미네르바』 2011년 여름호)을 통해서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태평양상에서 발생한 지진은 쓰나미를 일으키고 일본 동북부 연안을 덮쳐 완벽을 자랑하던 원자력발전소를 파괴시키므로서 또 다른 재앙을 야기시켰다.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서성이던 바다는 어디로 가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나약함을 절규하는 풍경만이 남았다.
인간이 저 혼자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은
고작 바다 위의 지붕이었다.
- 「쓰나미 클레멘타인. 1」 마지막 연
어디 그 뿐인가? 자연의 판도라 상자를 여는 오만함 때문에 ‘넓고 넓은 바닷가에는/ 물을 부어도/ 좀처럼 꺼질 줄 모르는/ 발전소의 불덩어리만/살아 남았다’(「쓰나미 클레멘타인. 2」는 자연의 보복을 되씹어야 하는 숙명에 놓이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인간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대해서 존중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난 봄 전국을 휩쓴 구제역 파동으로 수많은 소와 돼지가 살처분 되었다. 단지 인간의 식량으로 소모되기 위해서 태어난 가축들은 또 다시 인간의 안전을 위해서 무자비하게 살육 당했다. ‘워낭소리’의 감동으로 쇠고기 소비가 줄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비싼 소가죽 구두를 신고 다니면서 소에게 감사를 느낀 적도 없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겠어요
뼈는 묻고 살은 썩어서
꽃 피는 봄이 오면 이 땅을 푸르게 할 거름이 되어 드릴께요
제 무덤 위에도 밤마다 푸른 별 뜨고
철 따라 이름모를 작은 꽃들 피어나겠지요
주인님, 그동안 고마웠어요
눈물 그만 거두시고 안녕히 안녕히 게시어요, 음 - 머-
- 김용화 「소의 유언」 마지막 연 ( 『시와 시학』 2011년 여름호)
이성을 가지지 않은 동물이나 식물의 마음을 알 방도는 없다. 생각하는 힘이 없다고 감각 조차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인간을 제외한 동,식물에게도 공포와 고통이 수반된다고 느끼는 것이 어리석음이 되지 않을 때 기꺼이 우리에게 목숨을 내어주는 그것들에게 감사를 느끼는 것이야말로 생명 존중의 사랑을 배우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김일용의 「나는 무덤 안에서 살고 있다」( 『시와 산문』, 2011년 여름호)는 ‘무덤’이라는 상징 속에 숨어있는 인간의 가공물로부터의 탈출을 권유하고 있다. 실크 한복, 가죽점퍼, 밍크옷, 오리털 이불, 가구, 냉장고 속에 그득한 육가공품들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기꺼이 목숨을 버린 - 죽어도 마땅히 무방한 - 것들의 무덤이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약탈자이고 아무 것도 만들지 못하면서 영악한 머리로 인간 외적인 것들에 죄를 뒤집어 씌우는 야비한 존재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인간의 약탈 행위를 축약하여 ‘문명’이라고 간단히 윽박지른다.
주인이 할 일은 따로 없다
햇살과 바람이 먼저 일어나고 먼저 찾아와
모종들에게 일어나라, 일어나라 매일 속삭이며 가고
아랫동네 새들이 동방박사처럼 찾아와
떡잎마다 키스세례를 퍼붓고 가고
빗물조차 목마름을, 배를 불려주니
주인은 감사 기도만 하면 된다
새순끼리 뒤엉키지 않도록
키 세우는 막대기나 찔러주며
곱다, 곱다 감탄만 하면 된다
- 김금용의 「하늘 농사법」 2연 ( 『우리시』 2011년 여름호)
우리는 ‘문명’의 달콤함을 쉽사리 버릴 수는 없다.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된 채소들은 연중 도시로 공급되고, 신선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유기농 재배, 무농약재배의 표지를 붙이고 대형 마트에 등장한다. 우리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바구니에 그것들을 담는다. 그런데 아파트 옥상에 텃밭을 만들고 각종 채소를 심어 놓기만 하면 저절로 생육한다는 「하늘 농사법」의 권유는 현실보다는 꿈에 가깝다. 「하늘 농사법」 이 숨겨둔 전언은 우리에게서 멀어져버린 땅과 그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것들의 체취를 느껴보자는 것이다. 게으르게 감사기도만 하면 된다든지, 막대기나 찔러준다든지, 감탄만 하면 된다든지 하는 행위의 이면에는 생태에 대한 존중이 묻어 있다. 인간의 권위를 최소화하는 일이야말로 자연에 대해 최대의 예의를 보이는 일인 것이다.
4.
오스트랄로피테쿠스(유인원)에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현생인류)로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하기까지 오백 만 년이 걸렸다.-
* 이덕환 (서강대 교수), 조선일보 2011.08.14에서 인용
**계간 <<시와 산문>> 2011년 가을호 계간평
출처 / 세상과 세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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