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해외로 반출된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매우 고조되고 있습니다.
해외에 있는 문화재를 소개하는 어느 프로그램으로 촉발된 관심은 때마침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의 반환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많은 국민이 십시일반 모금하여 귀중한 문화재 한 점(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을 되찾아오는 성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반출된 해외문화재를 소개하는 글, 방송에서 꼭 빠지지 않는 문화재 한 점이 있습니다.
작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에 개관했을 때 서화실을 보던 중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림을 발견하고 진품인줄 알고 너무나 감격스러워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키려 힘들었습니다.
일본 천리대에서 박물관 개관을 기념하여 대여해준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그림은 아주 정밀하게 제작된 모사본이었습니다. 소유자인 일본 천리대에서 조차 전시를 하지 않고 보관만 하는 그림을 우리나라에 쉽게 대여해 줄리 만무하겠지요. 아마 88년 올림픽때 대여해준 것이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우리나라에 대여될 때마다 환수여론이 들 끌어 대여를 극히 꺼리는 그림,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국보로까지 지정했었던 그림, 바로 조선 산수화의 걸작 중 걸작, 바로 현동자 안견의 [몽유도원도] 입니다.
이렇게 멋진 그림을 이렇게 형편없이 찍을 수밖에 없는 사진실력이 원망스럽다.
이 그림을 안견이 그리게 된 연유는 이렇습니다.
세종 29년(1447) 음력 4월 21일. 화원으로서는 도화원에서 출세할 수 있는 최고직인 종6품의 별제(別提)와 선화(善畵)가 전부였던 시기에 예술을 사랑했던 세종의 총애로 정 4품인 체아직호군 이라는 파격적인 직책을 수여 받은 안견은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안평대군 댁에서 급히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안평대군 사저인 수성 궁으로 달려갔습니다.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이 누구입니까?
시, 서, 화, 음악 등 다방면의 훌륭한 재능을 가진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는 왕자가 여덟명 있었는데 그 중 문종, 세조, 안평대군은 글씨를 잘 썼고 그림과 음악은 영응대군과 안평대군이 뛰어났다고 하니 부왕의 풍부한 예술적 기질을 온전히 타고난 왕자는 바로 셋째 왕자 안평대군 이였습니다. 이름은 용(瑢)이고 자는 청지, 호를 비해당, 낭간거사, 매죽헌이라 했습니다.
예술을 사랑한 안평대군은 호탕한 성격과 자유분방한 생활태도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며 예술적 재능 있는 사람을 몹시도 아꼈던 당대 최고의 문객이자 풍류남아였습니다.
또한 그는 당시 최고의 중국그림 소장가였는데 신 숙주가 1445년에 쓴 <화기畵記>를 보면 안평대군 서화소장목록이 나오는데 그 목록을 보면 안 견의 그림이 30점, 일본 화승 철관의 작품이 4점, 그리고 나머지 222점은 중국 송, 원시대 명품들입니다.
특히 산수화는 중국 이곽파의 작품들이 대부분이고 그 중 곽희의 작품이 17점이나 들어있는 것이 특징인데 뒤에서 말씀드릴 안견의 화풍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평대군과 마주앉은 안견은 안평대군에게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꿈이 어떤 꿈 이야기인지는 몽유도원도 바로 뒤로 이어지는 <몽유도원기>에 잘 나와있습니다.
몽유도원기는 그림의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하므로 인용을 하겠습니다.
몽유도원기, 계유정난이후 안평의 글씨는 거의 다 불태워졌는데
살아남은 몇 안되는 안평대군의 글씨이다.
정유년 4월 20일 밤에 바야흐로 자리에 누우니, 정신이 아른하여 잠이 깊이 들어 꿈도 꾸게 되었다. 그래서 박팽년과 더불어 한곳 산 아래에 당도하니, 층층의 멧부리가 우뚝 솟아나고, 깊은 골짜기가 그윽한 채 아름다우며,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고, 오솔길이 숲 밖에 다다르자,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서성대며 어디로 갈 바를 몰랐었다.
한 사람을 만나니 산관야복(山冠野服)으로 길이 읍하며 나한테 이르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이외다.” 하므로 나는 박팽년과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니, 산 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며, 시냇길은 돌고 돌아서 거의 백 굽이로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한다.
그 골짜기를 돌아가니 마을이 넓고 틔어서 2, 3리쯤 될 듯하여, 사방의 벽이 바람벽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도화 숲이 어리 비치어 붉은 놀이 떠오르고, 또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싸리문은 반쯤 닫히고 토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가 있어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신선의 마을과 같았다.
이에 주저하여 둘러보기를 오래 하고, 박팽년한테 이르기를, “바위에다 가래를 걸치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지었다더니, 어찌 이를 두고 이름이 아니겠는가, 정말로 도원동이다.” 라고 하였다.
곁에 두어 사람이 있으니 바로 최항, 신 숙주 등인데, 함께 시운을 지은 자들이다. 서로 짚신감발을 하고 오르내리며 실컷 구경하다가 문득 깨었다 …중략… 그리하여 가도 안견에게 명하여 내 꿈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다만 옛날부터 일러오는 도원이라는 곳은 내가 알지 못하니, 이 그림과 같은 것일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보는 사람들이 옛 그림을 구해서 내 꿈과 비교해 본다면 반듯이 무어라 할 말이 있으리라. 꿈꾼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림이 다 이루어졌으므로 비해당 매죽헌에서 쓴다”
안평의 꿈 이야기는 도 연명의「도화원기」와 아주 친연성이 있는데 제문에서의 몽유도원이 바로 도화원기에서 중국 진 나라의 학정을 피해 사람들이 신선처럼 살았다는 이상향, 귀거래사의 표상인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은 의미로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평대군은 천천히 자신의 꿈 이야기를 약간은 흥분된 마음으로 안견에게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안견에게 그 꿈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하였습니다.
꿈을 그림으로 그리다니. 그것도 자신의 꿈이 아닌 다른 사람의 꿈을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니.
아마 안견은 다소 난감했었을 것이나 머리를 조아리고 조용히 물러납니다. 그 후 3일만에 그림을 가져다 받치니 꿈을 꾼 날짜가 4월 20일 이었으니 4월 23일 몽유도원도는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소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3일만에 완성했다는 부분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파격적이 구도, 엄청난 정성을 드린 붓 놀림, 세부 부분의 높은 완성도와 전체와의 통일성 등 조선 최고의 산수화 대작이 3일만에 완성 되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아마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 안평대군은 안견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고 거기에 시를 얹어 합작하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몽유도원도를 그리기 4년 전인 1443년에 안견이 그린 <이사마산수도>에 대해 박팽년은 자신의 기록에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 안평대군은 안 견에게 명하여 <이사마산수도 李司馬山水圖>를 그리게 하고 자신은 그림 왼쪽에 두자미杜子美의 시를 써넣었는데, 내가 이 그림을 보니 시서화는 삼절이며, 아울러 안견의 그림은 입신지경의 것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그림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견, <몽유도원도>, 1447 비단에 담채, 38.7 X 106.5 Cm 일본 천리대 중앙도서관 소장
가로가 긴 대작인데 블러그 화면이 작아 사진으로는 웅장한 맛을 느낄수 없다.
전체적으로 웅장하면서도 꿈결 같은 몽롱한 분위기가 화면전체에 녹아져 있어 그윽하면서도 신비스러우며 당대의 화풍이 거의 망라되어있어 다양한 느낌과 분위기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면 우선 몽유도원도는 맨 오른쪽의 도원경 그리고 중간부분이 현실세계에서 도원경으로 연결되는 험난한 기암괴석군, 그리고 맨 왼쪽이 현실세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감상자에 따라 2부분, 4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으나 저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먼저 오른쪽 도원경 부분인데 이 작품은 두루마리 그림이기에 그림을 펼치는 순간에 가장 먼저 도원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안평대군이 가장 보고 싶었던 부분, 바로 도원경의 모습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도록 배치 한 것입니다.
원래 이야기상으로는 현실세계부터 도원경으로 나가는 즉 먼저 현실세계가 나오고 나중에 도원경이 나와야 정상적이지만 그림은 이러한 일반론을 뒤집고 먼저 도원경을 그렸습니다. 도원경의 나무들은 복사꽃인데 빨간 꽃잎으로 그려져 화사한 분위기가 나며 꽃술은 금색으로 반짝입니다.
오른쪽 도원경 부분
병풍처럼 기암고봉들이 도원을 감싸고 있고 특히 상단에서 보여주는 기암고봉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이곳이 신선들이 살고 있는 무릉도원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점은 부감 법을 이용해 공중에서 바라볼 때 보여주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넓게 조망하는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특히 도원 중앙 아래의 암산 가운데 부분의 높이를 현저히 낮춰 도원의 면적을 크게 보이게 한 부분은 안견의 탁월함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기암괴석과 도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모습을 한 화면에 절묘하게 배치하여 도원경이 더욱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림 가운데 부분은 안평대군이 도원을 찾아가면서 보았다던 ‘산 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며, 시냇길은 돌고 돌아서 거의 백 굽이로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한다’ 던 바로 그 모습입니다. 웅장해 보이면서 어딘지 모르게 신비스럽게 보이는 봉우리는 중첩되게 그려져 의도적으로 불안정한 느낌을 주면서 형태의 천차만별로 산중의 험준함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뭉개 구름처럼 보이는 황토산을 그리되(운두준법) 산의 밑 등을 밝게 표현하여 조광효과(照光效果)를 내었고 그 표면처리에 있어서 필선이 하나하나 구분되지 않도록 붓을 서로 잇대어 그렸는데 이러한 산악표현은 중국 송, 원대에 유행했던 이곽파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이곽파란 오대. 북송 초기의 이성(李成)이 완성시킨 북방계 산수화 양식과, 거기에 또 다른 형식을 가미시킨 곽희(郭熙)의 산수화 양식을 계승하는 화가들의 총칭이며 조선 초기 화단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화풍입니다.
왼편은 중부지방 특유의 야산의 모습에서처럼 사실적이고 실경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그렸는데 다른 부분의 비실경적 모습과 대비되며 전체적으로 웅장한 느낌을 갖게 해줍니다.
그림 곳곳에서 중국 이곽파의 영향이 무척 컸다는걸 짐작할 수 있는데 안평대군의 소장품 중 산수화는 거의 대부분 이곽파 풍의 그림들이란 점은 중국 명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안평대군의 배려로 안견의 탁월한 감각이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안평대군은 안견의 가장 적극적인 후원자이자 멘토였던 것입니다.
전체적인 구도, 공간의 기술적인 처리의 탁월함, 평원(平遠)과 고원(高遠)의 대조, 사선(斜線)운동을 활용하여 달성한 웅장감, 그리고 실경적 요소와 환상적인 세계의 교묘한 구현 등에는 안견의 독자적인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산수화로 손꼽히는 작품임이 뿐명합니다.
하지만 만약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면 [몽유도원도]는 아름다운 산수화의 하나로 기록되었을 뿐일 것입니다.
몽유도원도에는
그 중 안평대군의 [몽유도원기]에 등장하는 박팽년, 최항, 신숙주라는 세 사람과 그림을 그린 안견, 안평대군의 다섯명의 인생 행로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림이 완성된 지 6년 후에 안평대군보다 한 살 위인 수양대군이 단종 원년
어려서부터 시, 서, 화에 뛰어나 세종이 끔찍이 아꼈던 안평대군 중국의 명화가들의 그림을 모아 조선의 예원을 주도하였던 대수장가이자 예술을 사랑하여 조선 문예를 부흥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풍류왕자 안평대군은 36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과 이별합니다.
집현전의 수장이자 몽유도원도의 서문을 지었고 그림에서 안평대군과 함께 도원을 거닐었던 박팽년은 이개, 성산문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어 국문을 받는 자리에서 세조에게 단 한번도 상감이라 하지 않고 나으리라 부르다 결국 군기감 앞길에서 자신의 아버지, 성산문의 아버지와 함께 차열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혹형에 처해졌습니다.
몽유도원기 서문, 박팽년의 글씨입니다. 당시 집현전 수장으로써 세종이 그를 얼마나 아꼈습니까?
그런 그가 아비와 함께 사지를 찢어죽이는 형벌로 죽어야 했다니..
하지만 안평대군의 뒤에 갑자기 나타난 최항과 신숙주는 안평대군이 자신들을 아끼고 보살핀 은덕을 배신하고 뒤에서 칼을 꼽는 배은망덕한 행동으로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쿠데타에 가담합니다.
신숙주는 세조의 오른팔이 되어 단종의 처형을 주장했으며 최항도 쿠데타에 앞장서 정난공신이 됩니다.
함께 거닐었던 박팽년과 뒤에 갑자기 나타난 신숙주와 최항의 인생을 보면 그림이 마치 앞일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묘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경우는 바로 안견입니다.
계유정란 2년전 궁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 무렵 안견은 안평대군의 호출로 무계정사를 방문합니다.
무계정사는 자하문 밖에 있는데 안평대군이 몽유도원 꿈을 꾼 후 그곳에 가장 경치가 비슷한 곳을 찾아 다니다 경치가 비슷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을 무계정사라 이름 붙인 곳입니다.
<무계정사지> 각자는 안평대군 당시가 아니라 후대사람이 새긴것이라 합니다.
지난 여름에 부암동 무계정사 터를 찾아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안평대군은 안견을 반갑게 맞이하며 중국에서 새로 들여온 용매먹을 보여주면서 한번 써보라고 합니다. 이처럼 언제나 진귀한 물건을 새로 구입하면 안견에게 보여주고 사용케하여 그의 안목과 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던 안평대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고 아무런 힘도 없는 궁중화원에 불과한 자신이 이번 기회를 통해 안평대군에게서 몸을 빼야겠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안평대군과 다른 일행이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에 용매먹을 자신의 소매 속에 감춥니다. 그리고 안평대군이 돌아와 먹이 없어졌다는 걸 알고 노복에게 다그치려는 순간 그림을 그리고 있던 안견이 몸을 일으킬 때 그의 소매 속에 있던 먹이 떨어져 그가 용매먹을 감춘 것이 발각됩니다.
안평대군은 놀라움과 노여움으로 안견에게 다시는 오지 말라고 호통을 쳤고 그 말을 들은 안견은 묵묵히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다 돌아갔다고 합니다.
당대 최고의 궁중화사였던 안견이 고작 먹이 탐나 도둑질을 했을 리 만무하며 왜 그가 그랬는지 모를 안평대군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호통치는 안평대군의 말에 아무 대꾸도 없이 묵묵히 서 있었을 안견의 심정은 어떠했을가요?
자신을 발탁하고 안평대군과 어울리도록 배려해준 세종, 그를 아끼어 수많은 명화를 보여주며 그의 안목을 길러준 은혜를 입은 안견으로써는 자신의 안일을 위해 사대부가 아닌 일개 미천한 궁중화사가 취할 수 밖에 없는 행동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배신이 용서될 수는 없습니다.
안견은 결국 세조연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안견파라는 명칭이 사용될 정도로 조선 전기 화단에 중요한 일 획을 담당하게 됩니다.
위 다섯 분 이외에도 시문에 참여한 분들 중
이처럼 몽유도원도는 단순한 산수화를 넘어 권력과 정치의 비정함이 새겨져 있는 우리 선조들의 아픈 기록입니다.
요즘
시대적 당위인 개혁의 열망으로 상징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정견과 이념을 떠나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동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언제나 그래왔던 새삼스러운 모습일 것도 없습니다.
그런 정치를 진정 바꿔보고자 했다면
[몽유도원도]가 어떻게 일본으로 반출되었는지는 확인 되지 않고 있습니다. 기록을 볼 때 최소한 1893년에는 일본에 있었기에 아마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강탈된 문화재란 증거가 없어 반환을 요구할 수도 없어 영원히 고국의 품에 돌아올 가망성이 희박한 비운의 그림 [몽유도원도].
그것은 단순한 산수화가 아니라 안평대군이 꿈에도 그린 조선 만세의 이상향이자 세종이 그토록 세우고자 했던 조선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기에 꿈이라 불리는지도 모릅니다. 참여정부가 정치개혁, 지역통합이라는 당장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민중이 그랬듯이, 꿈이 이루어지던 이루어지지 않던 상관없이 우리 국민들은 이 땅에서 살아갈 것이며 오늘도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고군분투 할 것입니다.
저는 가끔 외국 영화에서 나오는 신출귀몰한 명화 골동품 털이범이 되는 상상을 합니다. 그래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몽유도원도]를 한국으로 가지고 오는 상상을 합니다. 실제로 제 스스로가 그런 능력이 있다면 그 대가로 어떤 처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럴 용의가 있습니다.
물론 이는 저의 꿈에 불과하지만 꿈은 이루어지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꿈꾸는데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떤 꿈을 꾸시겠습니까?
참고도서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이동주 학고재
<한국회화사> 안휘준 일지사
<조선왕조 충의열전> 최완수 돌베게
<이야기 조선시대 회화사 1> 조정육 고래실
<옛 그림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솔
2006 . 12 . 4
금강안金剛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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