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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나무 생각] 이 곳에 명주바람, 잎샘바람, 소소리바람 건듯 불어 와

by 丹野 2011. 4. 7.

[나무 생각] 이 곳에 명주바람, 잎샘바람, 소소리바람 건듯 불어 와

   5백 년을 살아온 동백나무 줄기 끝에서 돋아난 새 잎.

   [2011. 3. 28]

   오래 됐지만, 매우 인상 깊었던 '잉글리시 페이션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전쟁같은 혹은 사막같은 사랑을 절절하게 표현한 명화로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입니다. 남자 주인공 알마시 백작을 맡은 배우 랄프 파인즈와 그의 불같은 사랑의 상대인 여자 주인공 캐서린 역할을 맡은 크리스틴 스캇 토마스의 열연이 돋보이는 영화였지요. 이 영화에 알마시 백작이 캐서린에게 바람의 종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어요.

   제게는 참 인상적으로 남는 장면이었는데요. 사막 폭풍으로 자동차 안에 갇혀 꼼짝 못하고 밤을 지새우는 상황에서 알마시는 캐서린에게 "바람에 대해 이야기해줄까?" 라고 속삭이듯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림 그리듯 그가 천천히 그려내는 바람에는 붉은 빛을 품고 사납게 불어오는 바람도 있었고, 모래를 가득 머금고 불어오는 바람도 있었어요. 모두 기억하고 싶은 바람이었는데, 오래 전에 본 영화여서 죄다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반가운 동백나무 줄기.

   건듯 불어오는 바람을 수굿하게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영화여서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끄집어냈습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일기 예보에서 빠짐없이 바람의 방향을 굵은 화살표로 표시해서 보여줍니다. 일시적이겠지만, 바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죠.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를 스치는 바람의 흐름을 확인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게 요즘의 위태로운 일상이지 싶습니다.

   바람의 과학적인 흐름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어서, 일기 예보에서 알려주는 두어 개의 굵은 화살표만 보고 안심해도 되는 것인지 제 깜냥에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바람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고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사실만큼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개의 굵은 화살표 중 하나가 가리키는 태평양 건너편 그곳에도 우리의 벗들이 살고 있으니까요. 가끔씩 전화를 통해 전해오는 그들의 침울한 목소리에서 그걸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겨울에 피어나는 꽃이건만 매운바람 피해 명주바람 맞으며 피어난 납매 꽃.

   최근 벌어진 사건들이 아니라 해도 해마다 이 즈음이면 바람결을 온 몸으로 느끼고 싶어지곤 합니다. 봄 기운 머금은 상큼한 봄 바람이 그리워지는 계절인 때문이지요. 하루하루 바람 결에 봄 햇살의 따스한 기운이 담긴 걸 또렷이 느낄 수 있는 계절이지만, 또 간간이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으로 옷깃을 여미고, 몸을 움츠리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삼월 춘설이 험악하게 흩어지던 지난 주가 그랬지요.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알마시 백작처럼 바람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 건 그래서였습니다. 우리 곁을 스치는 바람에도 많은 종류가 있지만, 이 계절에 바라볼 수 있는 바람만 찾아보지요. 봄에 보드랍게 볼을 스치는 요즘의 바람을 우리말로는 '명주(明紬)바람'이라고 부릅니다. 가늘고 고운 명주실처럼 가느다랗게 불어오는 바람이어서 그랬을 겁니다. 지방에 따라서는 '명지바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봄 아니어도 살살 불어오는 바람이 있긴 하지만, 명주바람은 봄에 부는 가늣한 바람을 가리킵니다.

   꽃샘바람 사이로 불어오는 가만바람에 살그머니 꽃잎을 연 크로커스.

   계절과 무관하게 살살 부는 바람으로 '실바람', '가만바람', '가만한바람'이 있습니다. 실버들 가지가 살살 흔들릴 정도의 바람이어서 '실바람'이고, 가만가만 부는 바람이어서, '가만바람' 혹은 '가만한바람'이라고 합니다. '가만바람'은 북한에서 흔히 쓰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살살 부는 바람이지만, 특히 보드라운 봄 기운이 담긴 바람을 따로 '명주바람' '명지바람'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명주바람 반가운 봄 철에 난데없이 바람 사이에 한기가 오싹하게 느껴진다면 그 바람은 '꽃샘바람'이라고 부릅니다. 예쁘게 꽃이 피어나는 걸 시샘하는 바람이라는 이야기지요. 꽃샘바람만큼 잘 쓰는 표현은 아니지만, 잎 나는 걸 시샘한다는 뜻에서 '잎샘바람'이라고도 하지요. 또 같은 뜻에서 '봄샘바람'이라고도 부릅니다. 매우 차가운 바람인 건 틀림없지만, 봄을 향한 기다림을 버릴 수 없다는 마음을 담은 표현일 겁니다.

   봄 기운 한 가득 머금은 꽃바람 타고 꽃잎을 활짝 펼친 영춘화.

   이른 봄에 부는 또 하나의 차가운 바람으로 '소소리바람'이라고 부르는 바람이 있습니다. 봄샘바람과 달리, 이른 봄에 살갗을 엘 듯 사납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가리킵니다. 가을에 부는 차가운 바람을 '소슬바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봄에 부는 차가운 바람을 따로 나누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겨울 되면 이 바람은 더 사나워지지요. 그래서 겨울에 부는 바람은 '매운바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때로는 이 계절에 부는 바람이 '매운바람' 못지않게 사납게 몰아쳐도 봄에 부는 바람을 '매운바람'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봄 향한 기다림이 컸기 때문이겠지요.

   이제 겨우내 웅크렸던 몸을 활짝 펼치고, 하늘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일어서야 할 봄입니다. 이 봄에 부는 바람, 이 바람은 모두를 더 아름답게 꾸며줄 '꽃바람'입니다. 모두가 더 신바람 나게 꽃바람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