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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부부젤라 소리 앞에서 ‘잡초’라는 말과 ‘월든’을 생각합니다.

by 丹野 2010. 6. 30.

[나무 생각] 부부젤라 소리 앞에서 ‘잡초’라는 말과 ‘월든’을 생각합니다.



   [2010. 6. 30]

   부부젤라 소리는 듣고 또 들어도 익숙해지질 않네요. 주말 지나면서부터는 아무 부담 없이 들어도 될 듯한데도 그렇네요. ‘등짐도 정 들면 내 등짝’이라지만, 부부젤라 소리는 도무지 정이 들지 않아요. 지난 주의 ‘나무 편지’ 마무리 부분에서 제가 부부젤라를 이야기했던 게 떠오릅니다. ‘누군가는 그 나팔 소리를 즐거워할 것이고, 그 소리를 듣고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슬리기만 하는 나팔소리, 그렇게 웃어 넘기는 순간, 그 거슬리는 소리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처럼 상큼하게’    들리지 않겠느냐고 했지요.

   헌데 그건 아무래도 진정에서 배어나온 이야기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다른 모든 소리를 집어삼킬 듯 우우 밀려오는 부부젤라의 굉음이 자아내는 짜증은 어쩔 수 없네요. 우리 경기가 있던 날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 경기 때에도 그랬어요. 문득 마이클 폴란의 《세컨 네이처》라는 흥미로운 책의 한 단락이 떠올랐습니다. ‘잡초’라는 말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마이클 폴란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비롯한 여러 매체를 통해 식물에 관한 글을 왕성하게 발표하는 작가이지요. 《세컨 네이처》는 《욕망의 식물학》(최근에는 이 책이 《욕망하는 식물》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습니다)과 함께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입니다.



   제가 떠올렸다는 대목은 이렇습니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의 《월든》에서 소로가 콩을 기르는 과정을 꼼꼼히 짚어가며 쓴 대목입니다.

    〈자연주의자적인 관찰자로서 소로는 자연을 계급적으로 구분짓는 일을 시종일관 거부해왔다. 소로는 정원보다는 습지를 더 좋아한다고 할 정도로 자연의 어떠한 위계질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콩을 경작하면서 자연 속에 존재하는 적들을 만났다. 차별해서는 안 될 벌레, 아침 이슬, 우드척과 잡초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소로는 콩밭으로부터 ‘자신을 대지에 결속시켜준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자연 속에서 자립하고자 하는 자신의 실험이 성공하리라는 희망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두루미를 상대로 한 싸움이 아니라, 해와 비와 이슬을 지원군으로 둔 무수한 트로이의 전사인 잡초와의 길고도 무료한 전쟁”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로는 “콩들은 내가 괭이를 들고 나타나 그들을 구해주기를 바랐다. 그들의 적을 물리쳐서 밭이랑 사이에 시체들을 쌓아놓으라고 아우성쳤다”고 적었다. 그는 자신이 “어느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괭이로 다른 한 계급의 종족을 모두 물리쳐야 하는 차별적 행위를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폴란은 소로가 겪어야 했던 갈등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폴란의 책 《세컨 네이처》는 정원에 대한 이야기이거든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과 소로의 경험을 견주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갑니다. 폴란의 발칙한 이야기를 조금 더 인용하겠습니다.

   〈소로는 정원을 가꾸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자연에 대한 그의 낭만주의적 사고를 내던져야 했다. 그것은 오늘날 자연주의자들이 환호해 마지않는 그의 ‘생태중심주의 biocentrism’ 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콩밭은 생태중심주의적 사고를 굳히도록 해준다. 그는 에머슨적인 사고로 되돌아온다. 소로는 콩밭 가꾸기에 대한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태양은 우리의 경작지, 벌판과 숲 모두를 아무런 차별 없이 비춰준다. ( … ) 이 콩들이 우드척을 위해서 자란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 … ) 그렇다면 우리의 콩 농사가 실패했다고 해서 그리 낙담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풍성한 잡초가 새들에게는 보다 풍부한 먹잇감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그렇게 콩을 경작하는 소로의 상황을 풀어놓고는 이 단락의 맨 뒷 문장을 다음과 같이 유쾌한 비아냥으로 마무리합니다.

   〈아무렴 즐겁지, 헨리. 그리고 굶어죽는 거야.〉

   불경스럽게도 우리의 헨리 데이빗 소로를 그렇게 냅다 비웃어버린 겁니다. 그야말로 자연 생태에 관한 한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만 여겨온 헨리 데이빗 소로를 비아냥거린 겁니다.

   19세기 최고의 자연주의 실천가로서, 자신의 삶을 빼어난 문장으로 걸러낸 걸작, 《월든》의 가치를 폄하하고자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산업사회의 찌꺼기를 벗어버리고 월든 호숫가의 숲에 들어가 자연주의적 삶을 실천한 소로의 경건한 삶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저 역시 그런 의도로 마이클 폴란의 글을 인용하는 건 더더구나 아닙니다. 폴란이나 제가 감히 소로를 비난할 깜냥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폴란에게도 소로는 자연주의적 삶의 변함없는 모델일 뿐이지요. 저로서도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사숙의 전범임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월든》은 누가 뭐라 해도 자연과 생태에 대한 인식 패러다임을 전환시켜준 매우 훌륭하고도 귀중한 책입니다. 언어유희가 아니라, 실천적 삶을 토대로 하여 쓰여진 글이라는 까닭도 그 책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하는 근거입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법정 스님께서 추천한 책이라 해서 서점가에서 갑자기 잘 팔리는 책이 되기도 했지만 저는 젊은 대학생들에게 필독도서로 꼭 권하는 책입니다. 《월든》과 소로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제게도 경이로움과 감동의 충격을 남긴 책이니까요.

   마이클 폴란은 그처럼 고귀한 《월든》의 정신을 비아냥거린 것이 아니라, 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신 빠진 현대인들을 비난한 것입니다. 소로(1817-1862)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1백 년도 더 지난 우리의 시대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변했지요. 소로에게서 배울 것은 그의 실천적 삶이지, 숲으로 들어가 숲에 온전히 자신의 삶을 맡겼던 방식까지는 아니어야 합니다. 소로의 모든 것을 그대로 따르려는 신비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소로의 진정한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는 일 아닌가 싶은 겁니다.



   소로만큼 훌륭한 실천가를 우리 곁에서 찾아내지 못한 까닭에 지나치게 신비화하고 있는 우리 풍토에 견주어볼 때, 폴란의 비아냥은 상쾌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태운동을 실천한 20세기 중반의 머레이 북친도 생각하게 됩니다. 생태사상가 북친도 그랬습니다. 진정한 생태운동은 ‘생태 신비주의’를 극복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했지요. 과문한 탓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도 생태 운동을 이야기할 때, 《월든》과 헨리 데이빗 소로에 지나치게 경도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도 있습니다. 어딘지 균형을 잃은 것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제 넘는 이야기는 그만두고 다시 잡초와 부부젤라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마이클 폴란은 잡초에 대한 생각을 랠프 왈도 에머슨의 이야기로부터 풀어갑니다. 잡초란 말 자체가 그 풀이 지니고 있는 미덕을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증거라는 거지요. 달리 이야기하면, 잡초는 사람의 잘못된 인식이 만든 개념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잡초라는 말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폴란은 에머슨을 생각하며 잡초를 뽑아내지 않고, 자신의 정원을 자연스럽게 유지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그가 몇 해에 걸쳐 자신의 정원을 가꾸며 겪는 과정을 이 짧은 편지에서 낱낱이 소개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처음에 그가 정원에서 자라는 모든 풀들을 그대로 살리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삶과 문화의 한 표현인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 원치 않는 풀들을 뽑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불경스럽게도 소로에게 '즐겁게 굶어죽으라'고 한마디 던진 뒤, 폴란은 잡초를 뽑으러 정원으로 나갑니다.

   부부젤라 소리를 놓고, ‘이 굉음이 누군가에게 즐거움이 되고, 힘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썼던 제 이야기에 폴란 식으로 대꾸하자면, ‘아무렴 즐겁지. 그리고 너희는 처참하게 눈물을 흘리고 마는 거야’가 되는 것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부젤라 소리에 더 큰 힘을 얻었을 나이지리아 선수들 때문에 가슴 졸이던 지난 주 수요일 텔레비전을 보면서 특히 그랬습니다.



   앞으로도 며칠은 이 부부젤라 나팔 소리를 더 듣게 되겠지요. 그때처럼 마음 졸이며 보는 일이야 없겠지요. 알베르 까뮈처럼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모든 의무와 도덕’을 배우기 위해서는 아니라 해도 이만큼 흥겹고 신나는 뜀박질을 보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니까요. 오늘 밤에도 늦게까지 텔레비전 앞에서 부부젤라 소리에 귀 기울이며, 다시 한 번 잡초를 떠올리겠습니다. 갈피가 안 잡히고 소로와 폴란이 번갈아 떠오르면 알람 시계를 새벽 3시30분으로 맞춰놓고 텔레비전 앞에서 등걸잠이나 자야겠습니다. 꿈에서 ‘인간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잡초다’라는 폴란의 결론이 가지는 의미를 한번 더 떠올릴 수 있으면 더 좋겠네요.

   지루할 수 있는 오늘 편지, 그림과 함께 보시라고 첨부한 사진들은 《나무 사진집 ‘동행’》에 수록한 사진들입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인터넷 서점에서 나무 사진집 '동행'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