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이야기 II] 청초하게 피어난 수선화, 그리고 나무편지 10년
[2010. 5. 3]
일본의 애니메이션 가운데 미아쟈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라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 있지요. 수목원을 걷다가 '이웃집 토토로'가 떠오른 건, 위 사진의 열매들 때문이었습니다. '이웃집 토토로'를 보신 분들은 제가 뭘 말하려는 지 벌써 아셨을 겁니다. 작품 속의 모든 캐릭터들이 정겹고 귀엽지만, 그 가운데 '까망먼지'라는 게 있잖아요. 사진 속의 열매들이 바로 그 '까망먼지'들을 닮지 않았나요?
조용한 수목원의 윈터가든 안을 서성이다가, 서서히 꽃잎을 떨군 목련 Magnolia 'Early Bird' 쪽으로 난 길을 들어서던 참이었어요. 처음엔 깜짝 놀랐어요. 사진에서처럼 좁다란 길 전체에 이 '까망먼지'들이 출몰한 겁니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그랬듯이 그 길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깜짝 놀래키려는 듯한 몸짓으로 와락 나타난 것이었어요. 발 디딜 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한가득이었습니다.
Magnolia 'Early Bird' 맞은 편에 그만큼 큰 키로 우뚝 서있는 대만풍나무(Liquidambar formosana)가 지나는 사람을 놀래키려고 한꺼번에 떨군 열매들입니다. 대만풍나무는 풍나무에 속하는 4 종의 식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북아메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이지요. 이 가운데 대만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에서 자라는 나무가 대만풍나무입니다. 키가 10미터 넘게 자라며, 가지도 그만큼 넓게 퍼지는 훌륭한 나무입니다.
우리 수목원의 대만풍나무도 윈터가든 가장자리의 키 큰 삼나무 몇 그루와 함께 10미터 가까이 잘 컸습니다. 대개의 대만풍나무는 잎사귀가 셋으로 갈라지는데, 때로는 다섯개로 갈라진 것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잎은 버즘나무처럼 넓어서 전체적으로 시원스러운 나무이지요. 또 늦가을에 붉게 물드는 단풍도 매우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단풍이 곱게 드는데다, 잎 모양도 단풍나무과의 나무들과 비슷해서 일쑤 혼동하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대만풍나무의 열매들을 밟지 않으려고 한 알 한 알, 피하며 걷자니 걸음이 불편합니다. 숲길을 걸으며, 이런 불편함은 참 달콤합니다. 가만가만 발 디딜 자리를 찾아가며 천천히 걸어야 하니까요. 봄소식을 전할 때마다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봄은 언제나 낮은 곳에서부터 찾아옵니다. 그래서 봄 내음을 더 깊이 느끼려면, 몸을 낮추어야 하지요. 또 걸음도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햇살 따사로워지면 낮은 곳에서 움츠리고 있던 작은 생명들이 봄 햇살을 맞이하려, 하나 둘 꿈틀거리고 올라옵니다. 전혀 기대하지도 못했던 자리일 때도 많습니다. 천리포수목원에서는 목련을 빼면 이 즈음에 눈에 띄는 대부분의 꽃은 모두 낮은 곳에서 피어납니다. 위의 사진은 Chionodoxa lucilliae 'Rosea' 라는 식물입니다. 이른 봄에 푸른 빛이 도는 분홍 빛 꽃을 피우는 예쁜 식물입니다. 잘 커야 고작 어른 손 한 뼘 크기 밖에 안 되는 작은 식물이지요.
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봄꽃들 가운데 요즘 한창인 수선화는 그나마 큰 키에 속합니다. 하지만 수선화 가운데에도 애처로울 만큼 작은 종류가 있습니다. 키도 작고 이파리도 가늘며, 꽃도 앙증맞게 작은 수선화입니다. Narcissus 'Tazetta' 라는 이름의 이 수선화는 꽃 송이가 작아서 유심히 찾아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활짝 펼쳤다고 해 봐야 꽃 송이의 지름이 겨우 2센티미터 쯤밖에 안 되는 꽃이거든요.
온갖 가지 꽃들이 만발한 봄 수목원의 숲을 산책할 때에는 이처럼 작은 꽃들을 그냥 지나치는 수가 많습니다. 큼지막한 꽃송이를 활짝 열고 요염한 자태로 눈길을 끄는 식물들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우니까요.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몸을 낮추고 천천히 조금 더 천천히 걸어보세요. 이처럼 작은 꽃들이 외치는 봄의 함성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올 겁니다. 수목원 산책의 기쁨을 두 배 세 배로 늘리는 방법이지요.
붉은 기운이 도는 노란 수선화가 흔하게 눈에 띄지만, 천리포수목원의 숲에서는 그밖에도 다양한 종류의 수선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마 수선화 가운데에는 가장 특이한 모습으로 피어나는 종류가 바로 위 사진의 수선화일 겁니다. Narcissus 'Irene Coprland' 라는 이름의 수선화입니다. 그냥 봐서는 수선화라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독특합니다.
수선화에도 종류가 많거든요. 식물도감에서는 그 많은 종류의 수선화를 꽃의 생김새에 따라 크게 11개로 나누었더군요. 그 가운데 Narcissus 'Irene Coprland' 는 겹꽃으로 분류된 종류입니다. 이처럼 겹꽃에 속하는 수선화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Golden Ducat', 'Pencrebar' 'Rip van Winkle' 'Tahiti' 등이 같은 겹꽃 종류의 수선화입니다. 모두가 예쁘기도 하지만 참 독특한 생김새를 갖춘 꽃입니다.
이 가운데 Narcissus 'Irene Coprland'는 하얀 색과 노란 색이 한 꺼풀씩 반복되면서 돋아나서 강렬하다기보다는 싱그러운 느낌을 전해주는 꽃입니다. 우리 수목원에서 이 꽃은 전망대를 지나는 길을 가다가 겹벚꽃이 예쁘게 피는 길가 오른쪽에 좁다랗게 낸 사잇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볼 수 있습니다. 가느다란 오솔길이 둘로 나눠지기 전에 꽃산딸나무가 한 그루 나오는데, 이 수선화는 바로 그 나무 아래에 피어있습니다.
야생도 아닌, 수목원의 식물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소개하는 데에도 머뭇거림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네요. 혹시라도 이 글을 보는 누군가에 의해 우리의 예쁜 수선화가 또 생명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말씀 올린 동강할미꽃과 노랑할미꽃 도난 사태가 생각나서이지요. 제발 앞으로는 그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수선화 꽃 가운데에는 노란 색 꽃을 피우는 종류가 가장 많은 듯합니다. 우리 수목원 뿐 아니라, 식물도감을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노란 꽃 다음으로 많은 건 하얀 꽃입니다. 우선 나팔처럼 불쑥 튀어나온 부관(혹은 부화관) 부분이 노란 색이거나 주홍 색이고, 꽃잎이 하얀 색인 꽃이 여러 가지 있어요. 이런 꽃의 경우 부관이 꽃잎보다 조금 짙은 색깔을 가집니다. 위에 보여드린 넷째 사진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아예 꽃잎과 부관이 모두 하얀 색으로 이뤄진 꽃도 있습니다. 위의 사진이 그렇게 온통 하얀 꽃의 수선화입니다. Narcissus 'Mount Hood'라는 이름의 수선화입니다. 꽃술의 노란 색 때문에 부관 부분에 노란 빛이 돌긴 하지만, 그냥 하얀 수선화라고 불러도 될 만한 꽃입니다. 워낙 화려한 색깔의 꽃들이 많은 계절이어서일까요? 하얀 꽃이 가지는 아름다움은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청초하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지 싶습니다.
아마도 이 봄에 우리 천리포수목원을 다녀가신 분이 적지 않을 듯합니다. 봄에 다녀가신 분들 가운데 천리포수목원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식물을 꼽으시라 하면 많은 분들이 수선화를 꼽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물론 목련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리포수목원이니만큼 목련을 첫손에 꼽는 건 분명하겠지만, 목련 다음으로 꼽는 게 수선화 아닐까요?
봄에 우리 수목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식물이 수선화라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가운데 볼록 튀어나온 부화관이 마치 입을 맞추어 한 목소리로 봄 노래를 부르는 듯해서 더 그렇습니다. 나팔 모양으로 꽃송이를 부풀린 수선화 꽃 송이가 무리지어 솟아올라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몸을 틀고 노래하는 모습은 이 봄을 오래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아름다운 풍경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5월입니다만, 날씨 참 믿기 어렵네요. 백년만이라는 봄 추위를 애면글면 견뎌내고 있는 우리 수목원의 목련들이 참 애처로운 날들입니다. 동백도 여러 송이가 올라왔는데, 고뿔 들지 말고 잘 이겨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5월 들어서까지 추위를 걱정하는 게 그리 어색하지 않은 정말 수상한 봄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편지가5월 들어 올리는 첫 편지입니다. 한 가지 조용히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솔숲닷컴의 독자 여러분들께 보내드리는 나무 편지가 이 5월로 꼭 10년 됐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인터넷으로 나무 편지를 만들어서 처음으로 배달한 날이 바로 2000년 5월 8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불규칙하기야 했지만 그래도 10년 동안 이처럼 나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던 걸 스스로 축하하고 싶습니다.
특별한 보상이 전제된 일도 아니었지만, 그저 나무를 만나는 일이 즐거웠고, 또 적지 않은 독자 분들께 나무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일이 참 즐거웠습니다. 게다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러분들의 격려와 성원은 더 할 나위 없는 큰 힘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지난 10년 동안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아니라, 여러분들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더 좋은 나무 이야기 전해드릴 수 있도록 더 살갑게 보살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생각 같아서는 '나무 편지'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일이라도 그럴싸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래도 여러분의 성원으로 계속 해온 일이니만큼 함께 축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끝에 첨부한 두 장의 목련 사진은 우리 토종 목련인 Magnolia 'Kobus' 입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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