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에 대한 대응전략으로서의 생태문학
엄경희
1. 생태적 사유의 기저
환경시 혹은 생태시 ‘문학생태학’이란 용어는 1774년 미국의 문학이론가 조셉 미커(Joseph W.Meeker)의 저서 The Comedy of Survival: Studies in Literary Ecology (New York:Charles Scribner's Sons, 1974)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생태시’라는 개념은 1980년대 독일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문학생태학은 눈에 보이는 환경파괴현상만이 아니라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우리의 생활방식과 의식구조, 욕망 등을 문제삼는다. 환경문학은 환경파괴문제를 다루고 있는 문학을, 생태문학은 생태적 인식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환경과 생태적 인식의 촉발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둘을 엄밀하게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용민, ?생태사회를 위한 문학?, ??현대문학??, 2000년 7월, 159~166면 참조) 한편 환경문학이나 생태문학의 경계가 모호한 것과는 달리, ‘환경주의’와 ‘생태주의’는 자연에 대해 서로 다른 태도나 입장을 나타내는 용어라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환경주의는 인류의 과학기술이 지금의 환경을 개선할 수 있을 거라는 인간중심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반면, 생태주의는 테크놀로지의 오용과 남용을 경계함과 동시에 인간의 환경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관심을 갖는다.(김성곤, ?자기중심 의식에서 생태의식으로 - 환경을 넘어서는 예술?, ??문화예술??, 한국문화예술진흥원, 2000년 4월, 27~29면 참조).
는 고도성장을 추구해왔던 산업화의 부산물인 환경문제가 두드러지면서 발생한 일군의 자연시이다. 한국 사회에서 환경운동이 대두된 것은 1970년대 후반 김호기(1995), ?환경사상과 환경운동의 흐름 및 쟁점?,??창작과 비평??, 1995년 겨울호, 63면.
이며, 이러한 기류가 생태문학적 담론 1990년대 이후 환경과 생태에 대한 문학적 담론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큰 성과를 보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 종합정리하고 있는 논의로는 신덕룡의 ?생명시 논의의 흐름과 갈래?(??시와 사람??, 1997년 봄호)와 임도한의 ?생태문학론의 현황과 과제?(??동강문학??, 2002년 통권 제3호) 등이 있다.
으로 본격화된 것은 민중문학의 기운이 가라앉기 시작한 199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생태시는 문명적 인간 삶의 양태를 전면 반성한다는 점에서 문명비판적 시들과 연계됨과 동시에 그 이전의 자연시와는 차이를 보인다. 이전의 자연시들이 현실의 부조리를 자연과의 합일로 대체함으로써 보다 나은 인간 삶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면, 생태시가 추구하고 있는 자연 지향은 대체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공생 자체를 문제삼는다는 특징을 지닌다.
근대 이후 발생한 생태시의 기저는 우리 전통 시가의 자연인식의 틀 윤사순(1986), ?존재와 당위에 관한 퇴계의 일치시(一致視)?, ??한국유학사상론??, 열음사, 77~96면 참조. 성리학을 정리 집성한 퇴계 이황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는 태극이라는 ‘한 리(理)의 체계’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조화로운 생성의 우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소이연(所以然)(존재로서의 자연법칙)과 소당연(所當然)(당위로서의 규범법칙)의 일치, 즉 변화와 생성의 필연성과 목적이 서로 일치하는 유기체적 질서를 함의한다. 그는 우주 전체의 견지에서는 일종의 부조화를 의미하는 ‘세(勢)’(사물 밖의 외적 조건)로서의 ‘편리(偏理)’의 현상이 있을 수 없다고 보며, 우주 만물의 생성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자기 원인에 의한 조화로운 생성을 거듭한다고 본다. 이와 같은 그의 우주관은 인간의 윤리의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퇴계는 소당연으로서의 ‘사(事)’에는 리(理)의 성질이 내포되어 있다고 역설한다. 즉 소당연인 사(事)는 자연적인 본성의 실현인데, 그 본성이 다름 아닌 소이연인 리인 것이다. 인간에게도 소이연과 소당연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은 인간과 자연(우주)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따라서 그는 ‘천인합일’의 경지를 윤리적 행위의 최상의 경지로 간주한다.
, 즉 우주관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산업화에 따른 자연의 황폐화가 생명체의 공동 기반을 와해시키고 있다는 비판적 인식은 새로운 환경을 인간의 삶의 조건으로서 건설하고자 하는 생태적 사유의 근간이 된다. 따라서 생태적 사유는 삶의 조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의 공생의 토대를 만들고자 한다. 즉 생태적 사유가 지향하는 친자연적 세계는 오로지 자연만을 위한 것도, 반대로 인간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연속적 세계관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곽신환은 그의 저서『주역의 이해』에서 “만물이 다같이 자라되 서로 해치지 않고, 도가 함께 행해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萬物?育而不相害 道幷行而不上悖)”는??중용(中庸)?? 30장의 말을 근거로 “자연 속에서 사는 인간이야말로 이 대생명의 과정에 참여하여 화육하는, 이른바 공동의 창조자이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은 대립자가 아니다. 양자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곽신환,『주역의 이해』, 서광사, 1990, 301-302면.
라고 동양적 우주관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우주론적 전제는 자연과 이상적 사회를 연속적 관계로 파악하는 ‘강호가도’의 지향과 맞닿아 있다. 성기옥은 고산 윤선도의 자연인식의 틀을 “그에게 역시 자아의 완성은 사사로운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도, 자연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도, 사회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 사회로 열려져 궁극적으로 우주에까지 확산된 세계와의 합일에서 이룰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성기옥, 「고산 시가에 나타난 자연인식의 기본 틀」,『고산연구』, 고산연구회, 1987, 233면.
라고 규명함과 더불어 유가의 천인합일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주적 자연(天)과 인간과의 관계를 연속적이며 동시적인 질서 속에서 보는 연속적 실재관은 유가나 도가를 막론하고 세계의 존재에 대하여 가해온 가장 전통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중략) 유가의 천인합일의 사상은 오히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천인합일의 이상을 실현해 나가야할 주체로서의 인간적 실천의 문제가 중심을 이룬다. 따라서 이 이론적 성격은 본체론적이기보다는 인성론에 가깝고 존재론적이기보다는 당위론에 가깝다. 인간의 완성이 궁극적으로 전일적 우주(天)의 완전성과 하나됨에 있다는 명제의 실천론으로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본성(本然之性)을 다함으로써 우주와의 조화로운 전체성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밝히는 것이 그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성기옥, 앞의 책, 231면.
유가의 우주론이 강조하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연속적 세계관은 인간과 분리된 절대자연의 세계로의 귀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의 우주론은 인간사회와 자연 모두를 포괄한다. 따라서 강호가도는 자연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합일하는 이상적 사회 건설이라는 과제를 내포하고 있다.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천인합일이 당위론과 실천론으로 인식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생태시의 발생론 또한 세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기저로 새로운 세계 건설, 즉 인간사회와 자연이 연속적으로 상생하는 세계를 만들어야한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전통적 우주론과 상통한다. 유가에서 강조하고 있는 당위와 실천으로서의 천인합일 정신 또한 생태시의 근본적 성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생태시는 전통적 자연시와 달리 자연 자체의 위기 상황을 문제삼고, 인간의 생존마저 위협하는 황폐한 생명적 토대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한다. 즉 전통적 자연시에 나탄난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인식은 그것이 생태 지향성을 드러낼지라도 자연 자체에 대한 위기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2. 한국 생태문학의 발생 원인
생태적 사유의 뿌리와 더불어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우리의 생태문학적 담론이 출발하고 있는 거점이다. 대부분의 생태문학 담론은 서구 이성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환경문제가 전지구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전지구적인 범주로 확산된 데는 서구의 근대 기획이 근본 원인이라는 점에서 서구의 근대적 사유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일견 타당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거시적 인식의 틀은 환경문학 담론을 피상화하거나 혹은 모든 환경파괴의 책임을 서구에 전가하려는 태도를 내포할 소지를 갖는다.
여기서 서구에서 말해지는 ‘인간중심주의’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7세기 합리주의와 18세기 계몽주의를 기저로 하는 그들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 능력을 확신하는 데서 비롯한다. 이성적 능력에 대한 확신은 곧 진보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믿음을 통해 서구세계는 물질문명과 과학문명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발전의 이면에서 증식하고 있는 근대의 부정적 측면들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환경문제라 할 수 있다. 20세기 후기구조주의 철학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이성에 대한 부정, 진보에 대한 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등은 그들이 자기 이해를 위해 이끌어낸 반성적 사유라 할 수 있다.
이때 유의해야 할 사항은 그들의 인간중심주의에는 양가적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이성 능력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으므로 자연을 착취와 도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서구의 태도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는 오만으로 낙인찍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태도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믿음과 존중, 그리고 그 믿음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자존심이 함께 내포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신과 불가항력적인 자연성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노력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현재의 혼란과 파괴, 불확실성, 무질서를 낳았다는 것은 결과적인 문제이다. 물론 그 결과 또한 그들이 책임져야할 몫이다.
이와 같은 서구 인간중심주의의 양가성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문학적 생태 담론은 그 거점을 달리할 필요성을 갖는다.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과연 인간 존재에 대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던가? 합리주의나 이성주의에 대한 집요한 반성철학이 있었던가? 혹은 홍익인간이나 인내천 사상과 같은 인간존중의 전통이 계승되었던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지극히 회의적이다. 식민지와 6?25, 그리고 산업화로 점철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몰두했던 것은 ‘실용적 가치’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우리의 산업화 과정은 인간 착취와 자연 착취가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환경문제는 서구적 의미의 인간중심주의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천박한 자본주의의 권력과 그 자본주의가 대중들을 물질의 노예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자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병두, 「자본주의 사회와 환경문제」,『한국 공간환경의 재인식』(한울, 1992); 최병두, 「자본주의의 위기이면서 동시에 포드주의의 위기인 환경위기」,??경제와 사회??(1992년 겨울호) 참조. 국내의 환경문제가 실용주의적 가치 태도에서 기인했다는 것은 곧 자본주의체제의 파행성과 직결됨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의 이윤추구, 자본의 자기증식과정, 욕구와 소비의 확대재생산을 환경문제의 발생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는 최병두의 환경이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본주의 자기증식적 본성이 노동의 착취만이 아니라 생산수단을 제공하는 자연을 착취해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의 경제개발 정책은 ‘잘 살아 보자’라는 구호 아래 사람들을 종속시켰을 뿐, 진정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가치론을 제공하지 못했다. 산하는 파헤쳐지고 사람들은 고향과 안식처를 잃어갔지만 ‘잘 산다’는 의미는 지금도 여전히 ‘돈’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환경과 생태문학은 실용주의, 혹은 산업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극복할 전략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3. 한국 생태시의 양상과 문제점
생태시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빈번하게 거론되고 있는 작품은 신경림의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하석의 ?폐차장?, 김지하의 연작시 ?새봄?, 최승호의 ?공장지대?, 이형기의 ?전천후 산성비?, 김광규의 ?서울꿩?, 정현종의 ?환합니다? 등이다. 그간 수많은 생태시가 문학지면을 통해서 발표었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이들 몇몇 작품이 반복 거론되는 까닭은 이들 시가 보여주고 있는 시적 긴장미와 생태 지향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후 발표되고 있는 작품들이 내용과 형식면에서 도식화되고 있거나, 더 이상의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생태에 대한 문제의식을 좀더 복합적으로 밀고 갈 세계관적 지평이 미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자체의 내재성만을 본다면 비교적 성공작으로 평가할 수 있는 2000년대 생태시의 일면을 통해 그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겨울에 다리공사를 한 적이 있다
콘크리트를 치는 삽질 속으로 소복눈이 쏟아졌다. 내장을 삶는 가마솥에도, 김장김치와 돼지비계를 볶는 솥뚜껑 위에도, 수제비만한 눈송이 뛰어들었다. 공사를 마치고 거푸집을 떼내자, 돼지 불알만한 구멍들 숭숭했다. 오줌보만한 것도 두엇 있었다. 그래도 볏가마니 그득한 경운기가 다니고, 트랙터며 콤바인 잘도 건너다녔다. 그런데 삼 년 만에 다리를 철거해야 했다. 산골짝 다랑 논까지 경지정리를 하기 때문이었다. 다리는 한나절도 안 되어 가라앉았다. 콘크리트 덩어리가 냇물을 막고 철근더미가 둑에 쌓였다
엉성했던 콘크리트의 구멍과 교각 틈바구니에 둥우리가 껴 있었다. 새들이 지푸라기며 보드라운 이끼로 공사를 마무리한 것이었다. 둥우리 위로 리어카가 지나가고 트럭이 부릉거리는 사이, 주먹만한 비곗덩어리와 돼지 불알 속으로 어미 새가 먹이를 나른 것이었다. 배고픈 눈송이와 돼지 오줌보에게 한 꾸러미씩 새알을 건넨 것이었다. 얼었다 풀렸다 하던 너털웃음과 김 무럭무럭 솟구치던 솥단지를 점찍어놨던 새들. 눈송이와 새들의 하늘 길처럼 아름다웠던 논두렁도 경지정리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논배미의 이름도 몽땅 사라져버렸다
사람 한 명 부르지 않고 레미콘이 새로운 다리를 놓고 있었다. 헛배 부른 익룡의 내장 안에 사람 하나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하늘 깊숙이, 다시 새들이 날고 있었던가. 눈송이와 돼지 오줌보에 둥지를 트는 새가 있었다.
이정록, ?눈송이에 둥지를 트는 새? 전문(??제비꽃 여인숙??, 민음사, 2001)
섭새마을부터 정선까지
길이 없으리라.
道理(도리)없으리라. 우선, 만지동이 잠기면
만지동 사람 목이 잠겨
아리랑 가락 나오지 않으리라.
그 위 된꼬까리 여울물 소리 없고
어디에서든 구석진 수달의 사랑은 끝나고
어라연의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은
별을 비추지 못하리라.
이하석, ?동강댐 막으면? 부분(??녹??, 세계사, 2001)
서해에 닿기 전에, 만경강과 동진강은
개펄에 이르러
진흙에다 몸을 문지르며 좀 놀았는데요
밤이 되면 물가에 알을 슬어 놓고는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도둑게들의 발자국 소리를 다 듣고
손바닥만한 대합이 달빛을 한입에 넙죽 받아먹는 소리를 다 듣고
갯지렁이가 허리를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자기 삶을 밀고 나가는 소리를 다 듣고
때로는 가까운 바다에서 새우떼가 꼬리로 일제히 세상을 탁탁 치는 소리도 다 들었다는데요
그때서야 바다로 스며들어
바다하고 한 몸이 되었다는데요
씨펄씨펄,
개펄이 소리 없이 죽어 가요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서 울음바다
강은 인제 망했어요
안도현, ?개펄에서 놀던 강? 전문(??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현대문학북스, 2001)
?눈송이에 둥지를 트는 새?에서 이정록은 ‘돼지 부랄만한 구멍들 숭숭’ 나있는 엉성한 다리, 부실하기 그지없는 다리를 지탱시켜준 것은 다름 아니라 새들이 만든 둥지의 지푸라기와 이끼와 알이었음을 밝힘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아름다운 세계를 부각시킨다. 이와 더불어 부실한 다리 위로 ‘볏가마니 그득한 경운기가 다니고, 트랙터며 콤바인 잘도 건너다’닐 수 있었던 것은 내장을 삶고 돼지비계를 볶으며 다리 공사를 함께 했던 마을 사람들이 공유한 의식임을 아울러 드러낸다. ‘다리’를 헐겁게 하는 ‘구멍’들이 이러한 것들로 채워질 때 비로소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온전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가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음을 이 시는 역설하고 있다. ‘사람 한 명 부르지 안고’ 새로운 다리를 놓고 있는 ‘레미콘’은 공생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기계적 삶의 방식을 표상한다. 즉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새와 논두렁과 논배미만이 아니라 그것들에 붙여졌던 ‘이름’이며, 그 이름 속에 담겨있던 공생의 시간들이다. 기계문명은 이 모두를 밀어내며 삶의 ‘틈’에 서려있던 아름다운 가치들을 시멘트로 무참하게 지워버리고 있는 것이다. 과연 새와 인간의 정으로 메워졌던 삶의 ‘틈’을 시멘트 문화가 대신할 수 있을지 시인은 회의하고 있다. 공생을 역설하는 이 시의 생태지향적 상상력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세계를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맥락을 구체적인 상황 묘사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호소력을 지닌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과거에 대한 향수로 윤색되어 있다는 한계를 갖는다. 생태시는 과거에 대한 향수보다는 현실의 심각한 사태의 원인을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이하석은 시집 『투명한 속』(문학과지성사, 1980)을 1980년대 초에 선보임으로써 환경과 생태에 대한 관심을 선취적으로 보여준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출간한 생태시집 『녹』(세계사, 2001)은 그가 얼마나 지속적으로 환경과 생태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가를 입증해주는 또 하나의 시집이라 할 수 있다. 이하석의 ?동강댐 막으면?은『녹』에 실려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는 동강댐이 수몰시킬 수많은 생명체와 만지동 사람들의 터전에 대한 시인의 비감함을 드러내고 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강댐 사태는 정책 집행자들의 일관성 없는 태도와 환경단체의 극렬한 저항, 그리고 그 틈에서 몰락한 동강 주민들의 삶이 이해관계의 측면에서 서로 엇갈리면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공생을 도모하기가 결코 쉽지 않음을 시사한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날카롭게 대립되는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이 시는 다소 감상적인 차원에 머무는 감이 없지 않다. 즉 시가 현실의 복잡성을 다 간파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안도현의 ?개펄에서 놀던 강?은 ??현대문학??(2001년 6월)에서 마련한 ‘새만금 특집’에 실린 작품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낙원으로서의 자연과 그것이 붕괴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아울러 말하고 있다. 그가 상상하는 낙원은 투쟁과 대립이 소거된, 모든 생명이 하나로 몸 섞는 유기체적 공간이다. 게와 대합, 갯지렁이, 새우는 물, 달, 개펄과 뒤엉켜 자기 삶을 밀고 가는 생명체들이다. ‘만경강과 동진강’은 바다와 하나가 되어 가면서 이 모든 것들의 소리를 ‘다 듣’는다. 이처럼 강과 개펄, 바다가 드러내고 있는 연속적 공간 구도는 도시의 직선로와 대조되는 곡선의 세계이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 앞에서 이러한 세계는 붕괴된다. 이때 ‘개펄’에서 동일 음상을 따오고 있는 ‘씨펄 씨펄’은 난폭한 현실의 논리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드러내는 시인의 태도를 반영한다. 그리고 ‘강은 인제 망했어요’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이제 망했음’을 시인은 아울러 환기시킨다. 하나의 생명적 고리가 끊어져 버릴 때 유기적 세계는 결핍으로 인한 불균형 상태에 놓이게 된다. 거기에 인간의 삶도 한 부분으로 자리해 있음을 이 시는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드러내고 있는 귀엽고 부드러운 어조와 아름다운 수사가 생태의식을 고무시키는 데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자칫하면 독자를 비판보다는 몽상의 차원으로 이끌고 갈 위험은 없는 것인지 묻게 된다.
우리의 환경시나 생태시의 내용은 주로 ①아름다웠던 과거의 자연이나 농경문화를 회상하고 있는 경우, ②자연이 붕괴되고 있는 현재 상황을 단순하게 드러내고 있는 경우, ③독자를 비판의식보다는 감상적인 쪽으로 유도하고 있는 경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시적 내용은 향토적 세계 혹은 낙원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거나, 아니면 자연에 대한 막연한 예찬과 동경을 일깨워주는 것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용 구성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곧 환경시나 생태시가 도식화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리얼리즘적 상상력이 서정적 정서와 결합되고 있는 최근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리얼리즘적 상상력이 서정화될 때 비판의식을 토대로 한 새로운 세계로의 전환은 약화될 가능성을 갖는다.
우리의 환경파괴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권력과 그 권력이 유포시킨 실용주의라는 막강한 가치관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환경시와 생태시 또한 막연한 향수와 감상이 아니라 보다 날카로운 비판의식으로써 이에 맞서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생경한 사회비판의 구호를 외치는 어색하고도 경직된 시가 되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직시할 것은 파괴된 자연 자체의 현상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한 힘의 실체이며, 그 힘을 만들어내는 모순된 구조이다. 그리고 그 힘의 지배 하에서 들끓고 있는 과도한 욕망일 것이다. 이를 더욱 치열하게 파고들 때 생태시가 지닌 저항의 의미와 부정의 정신이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가지게 되리라 여겨진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생태사회에 대한 성찰을 제공할 수 있는 시가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장석주는 “생태학적 상상력이란 인간의 생존의 근거를 위협하는 환경의 파괴와 훼손에 대한 주체의 대응으로서의 생태지향적 상상력이어야 한다. 그 상상력은 강력하게 문제 제기적이어야 하고, 생태계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형태의 문명과 생활양식에 대해 단호하게 항의적이어야 한다” 장석주, 「환경과 시 ― 환경/생태계의 죽음, 그 이후의 상상력」,??현대시세계??, 1991년 가을호, 37면.
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같은 견해에 하나 더 보태어 말한다면 생태학적 상상력은 자연으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무엇보다 앞서 감행해야할 것이다. 생태학적 상상력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배제한 상상력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모두에 대한 사유이자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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