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가을 바닷가 外 5편 / 고성만

by 丹野 2010. 12. 16.

 

 

고성만 신작소시집 * 「가을 바닷가」외 5편

 

  

  가을 바닷가 고성만

 

 

  꽹과 꽹과 꽹과르르르…… 만국기처럼 펄럭이는 깃발 거칠게 몰려오는

폭풍우

 

  말갛게

  물기 걷힌 날

  조약돌의 무늬 희미해지고

 

  등뼈 시린 고기들이 느릿느릿 헤엄치는 바닷가 절벽 구절초 아흔아홉

마디마디 흐드러지는데

 

  머언 항로航路,

 

  나뭇잎 같이

  배가 지나간다

 

 

 

 

 

 

  숫꿈·1 / 고성만

  -우물에 기르는 물고기

 

 

  혼자 자취하는 처녀선생님 방에 책 빌리러 간 날

 

  “자고 가도 괜찮아 너는 반장이잖아” 향긋한 화장품 냄새 풍기는 젖

가슴 사이에 끼어 찌질찌질 오줌 지릴 때 우물에 물고기를 집어넣고 매일

매일 자라는 꿈을 꾸었다

 

  물을 긷던 어머니께서 “왜 이리 비린내가 난다냐?” 하고 물으시면

 

  “매화꽃 위로 구름이, 석류꽃 안으로 가물치가 지나갔나 봐요” 평상시

하지 않던 거짓말을 꾸며내고는 바알개진 귓불로

 

  살살 들춰보는 선녀의 속옷

 

  “벼락 맞을 자식!” 화가 난 선생님이 번쩍, 잠버릇 나쁜 나의 볼따구

니를 사정없이 후려치는데 어느 해 우기인가 불어 넘친 우물물에 허옇게

뱃가죽 뒤집은 붕어 미꾸리 민물새우를 보고 깨달았다

 

  아무리 눈물을 받아먹어도 자라지 않는 꿈이 있다는 사실을

 

 

 

 

 

 

  숫꿈·2 / 고성만

  -으름

 

 

  누군가 보내온

  메일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분홍빛 연체동물들 꿈에서도

  결제를 요구한다 움찔,

 

  털 난 입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던 까까머리 중학생 무렵 오십 원을

주고 친구에게 빌려본 잡지에 젖소 같은 서양 여자 그 후 자주 머릿속에는

짚신벌레들이 기어 다녔지 따지고 보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접힌 페

이지라 위로해 보지만

 

  퍽퍽 낫질 끝에 덩굴은 벗겨지지 않았는데 나뭇가지를 타고 줄줄 흘러

내리는 수액

 

  핥는다 헉헉

 

  한사코

  바위 속으로 숨는 숫양처럼

  옷도 집도 없이 기어이

  기어가는 민달팽이처럼

  없는 뿔 들어 푹,

 

  갈색봉지가 찢어지면서 검은 씨앗이 우수수 쏟아진다

 

 

 

 

 

  슬픈 로라* / 고성만

 

  앞 유리창에 비친 얼굴이

  당신을 꼭 빼 닮았군요

  갈색 스웨터 길지 않은 머리가 어찌 그리 비슷한지

  깜짝 놀랐어요

 

  황홀하게 불타오르다

  잎 떨군 나무를 보고 있습니다

 

  어느 봄날의 공원

  우연히 마주쳤을 때 당신은 당신 아이 손을 잡고

  나는 내 아이 손을 잡고 있었지요

  잠깐이나마, 당신 아이 손잡은 나

  내 아이 손잡은 당신을 상상했었답니다

  종착역이 다른 기차처럼 스쳐지나간 뒤

 

  나뭇잎

  곱게 물든 저녁

  가장 예쁜 잎사귀 주워 편지를 썼지요

  제발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한 번만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때 그 아이가 저렇게 컸을 까요?

 

  발정난 수사슴같이 “저기요!” 하고 부르면

  “왜요?” 하고 돌아보던

  이백마흔일곱 뼈마디

  살짝살짝 골이 지는 가슴 햇살 흘러넘치는 쇄골

  다 들은 노래를 되감기하듯

  당신을 생각해요

 

  하늘 끝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나타난 별처럼

  깜박깜박

 

  아아, 안녕

  로라

 

 

     * 프랑스 영화‘슬픈 로라’의 주제가

 

 

 

 

 

 

  메타세콰이아 가로수 길에서 / 고성만

 

 

  초식공룡이다

  울퉁불퉁 억센 근육 숨기고 있으므로

  천둥번개 치는 날 기다리는 공포의 기억

 

  갈필로 하늘의 말을 받아 적다가

  제 그림자 풀어

  푸른 물

  들이는 오후

 

  두 봉우리에 길을 담은 채

  터벅터벅 걸어가는 낙타처럼

  기나긴 순례는

  사막을 지나 초원을 지나

  빨간 지붕이 아름다운 북국에 다다른다

 

  우수수 바늘 끝 같은 머리칼

  떨어트리며 불어오는 바람 속

 

  목관악기를 부는 밤

 

  사랑이 무서운 여자들은

  나무 사이사이

  가녀린 등불을 달고

 

  어둠이 그리운 남자들은

  자신만의 창문을 밝힌다

 

 

 

 

 

 

  11월, 애인에게 / 고성만

 

 

  11월은 쓸쓸한 달, 흰 항아리 같은 달이 뜨고 잎 진 나무들 사이 배고픈

유령들이 우는 밤

 

  잠은 오지 않고 보고 또 보고 싶어지는 애인아

 

  눈부시게 휘날리는 머리칼로 만나자 훨훨 벗어버릴수록 단단한 피부로

 

  북서쪽에서 확장하는 저기압 가장자리에 들어

 

  “왜 이리 춥지?” 속삭이면서 어깨 위에 얹은 손을 내려 두툼한 스웨터

안으로 집어넣으려하면 모르는 척 슬쩍 빠져나가는 애인아

 

  볶은 원두커피 혹은 흑설탕에 재어놓은 과실처럼

 

  저절로 향긋해지는 시간

 

  걱정하지 말자 나날이 실업자 수가 늘어나고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고

연인들은 헤어지리니 텅 빈 이 세상, 네가 없어도 나는

 

  빨간 스토브 켜진 카페에서 일찍 저문 거리의 불빛처럼 설렌다

 

 

 

 

   고성만 시인

* 1998년《동서문학》등단

* 시집『올해 처음 본 나비』

『슬픔을 사육하다』가 있음

* kobupoet@hanmail.net

 

출처 / 우리詩회

 

 

 

1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