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시창작교실
말의 힘
나호열
15주차 강의
오월을 일컬어 흔히들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 솜사탕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듯이 바람은 만물에 스며들고, 살아 숨쉬는 뭇 생명들이 營養과 번식하기에 알맞은 때이기도 하다.
때에 맞추어 꽃들이 하나 둘 피어나서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에 빠져드는 때가 바로 요즈음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오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이 있으며 오늘이 바로 스승의 날이다. 이 세상에 어린이 아닌 자가 없고, 어버이 안된 자가 드물며, 어버이 된 자로서 스승이 아닌 사람이 없으니 따져보면 가정의 달은 바로 나 자신을 둘러보고 반성하면서 '나와 너', '나와 우리들'의 소중함을 일깨워보자 함이다.
그러나 오월은 예전의 오월이 아니다. 때가 이름에도 꽃들이 서둘러 피고, 여름 장마처럼 비가 연일 내리는가 하면 눈이 내리기도 한다. '기상이변'이라고 단정해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갈수록 봄, 가을이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는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한마디로 원칙이 무너지고 불확정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원칙이 무너지면 생명체는 멸종하거나 멸종하지 않더라도 심각한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예측이 불가능한 삶은 결국 우리 인간들에게도 '나와 너'의 관계가 모호해지고 마치 불온한 안개처럼 서로를 떠돌게 마련이다.
어디 가정의 달을 국한해서 말하랴? 일년 열두 달이 어린이 날이고, 어버이날이며 스승의 날이 아니겠는가?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글을 생활 가까이에 둔다는 것은 생활 속에서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그 행위 속에서도 먹음의 의미, 잠의 의미, 배설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예측불가능하고 영영 보이지 않을 것 같던 험로와 애로가 눈을 트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고가 절실하지 않거나 영글지 않으면 글은 말장난 내지는 放談에 그치고 만다. '말과 글은 그 사람의 창이다' 라는 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우리네 떠도는 말이 그저 떠도는 말이 아님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글 쓰는 이는 '말과 글'을 글 쓰지 않는 사람들보다 폭 넓게, 속 깊이 窮究하는 사람들이다. 그저 겉으로 번지르르한 글에 현혹되거나, 기어로 세상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려고 노심초사한다면 필시 그 뜻을 이루기 힘들 것이다. 왜 마음의 창인가? 언행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거니와 글을 통해서 우리는 얼마든지 그 사람의 인생관, 버릇, 환경 등을 눈치챌 수 있다. 창이라는 것은 내가 밖을 내다보기 위함이지만, 거꾸로 밖에서 안을 드려다 볼 수 있는 것임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글을 통해서 밖을 내다본다는 것은 글 쓰는 행위, 또는 작품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행위, 작품이 왜곡되어 있거나 삿 된 욕망의 분출에 그치고 만다면 차라리 글을 접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글은 누에고치가 실을 잣듯이, 그 실을 잣는 행위가 단지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결국은 羽化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할 때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시인이나 작가는 육체적 美醜를 넘어서 자신이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고 하는 자세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사람이다. 진실로 아름답다면 그 누구가 그 아름다움을 마다하겠는가?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것은 너무나 그 뜻이 간절하여 감동됨이 있다는 것이다. 뜻의 간절함과 감동은 필시 아름다운 행위로 이끌리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라는 칼은 쓰기에 따라서 비수가 되기도 하고 부엌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소중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요는 비수가 되던, 조리도구가 되던 칼은 날카롭게 벼려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글을 쓰는 사람은 우선 칼을 벼려야 한다. 모난 생각, 잘못된 생각, 어두운 생각을 갈고 닦아두어야 한다. 그 다음 그 벼려진 칼을 어디에 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정말로 맑은 샘물처럼 솟구쳐 오르는 영감이 떠오를 때, 긴 겨울과 같은 현실에서 노고지리가 되어야 한다고 발분 할 때 그 칼은 비파가 되고, 노래가 된다. 그렇지만 이 뜻을 곡해한 나머지 감정이 넘쳐나거나, 자신을 돌보지 않을 때 그 칼은 자신의 정수리를 향하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른 달 보다 이번 달에는 수필 작품이 눈에 먼저 들어 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작품을 발표하는 분도 있음을 눈여겨보았다. 수필을 흔히 붓 가는 대로 쓰는 형식이라고들 한다. 붓 가는 대로는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이 아니다. 사전을 뒤져가면서 책을 보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에 작가에게 함축되었던 교양과 지식이 자연스럽게 분출된다는 것이다. 더 부연하자면 글은 巧言令色이 아닐 진데, 수필은 더더욱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시나 소설에서는 작품 속에서 작가가 사라지거나 숨어버려도 그만 이지만, 수필에서는 글을 쓴 작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붓 가는 대로'의 바른 해석이라고 나는 믿는다.
베이컨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편견 idola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배어들어 있다. 그러나 현명한 이는 자기 자신이 편견에 가득한 인간임을 깨닫고 그 편견 속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작가 또한 그러해야 한다. 내가 경험했던 일들이 마치 나 혼자만이 체득한, 나 혼자 만이 깨달은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때 글의 시작은 신중해질 수 있다. 겉으로는 그럴싸하고 읽을 만 한데 읽고 나면 개운하지 않은 글들이 너무 많다. 그런 글들은 대부분 자신을 드러내는데 골몰하거나 의식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자신을 드러내게 되는 우를 범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글은 的確한 표현을 구사해야 한다. 이 말은 글이 과학적 진술이라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적확하다는 것은 꼭 그 單語, 그 句, 그 節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표현의 절실성을 말하는 것이다. 반드시 표현되어야 할 사항이 뭉텅뭉텅 빠져 버리거나, 한 마디로 하면 될 것을 반복하고 지루하게 나열하여 드러내는 것은 글의 압축과 묘사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세 편의 산문은 내용의 드러냄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거나, 아니면 내용의 내실이 알차지 못한 한 가지씩의 아쉬움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드린다.
이은경 시인이 오랜만에 작품을 발표했다. '여자의 노예'와 '소풍'의 두 편이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가 시심을 놓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반갑다. '여자의 노예'는 요즈음의 세태를 풍자한 시이고 '소풍'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겨 보는 슬픔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세태 풍자나 추억의 재현에 있어서 독자들에게 보편적 사실을 인식시킨다는 목적을 가질 때 작품이 진부성에 떨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시인의 개성은 어떤 시적 체험의 보편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수화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데, 이는 시를 짓는 모든 이에게도 필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박미란의 시 '걸음마'는 진부해 보이는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서도 시 읽는 재미를 선사해 주는 작품으로 읽힌다. 말의 힘이란 의미의 영역에서도 느껴지지만, 이와 같이 담담한 진술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앞으로도 이렇게 힘을 뺐을 때 더욱 힘이 강해지는 시를 자주, 많이 접했으면 하는 바램으로 글을 접는다.
*소요문학 2004년 5월호 시평으로 게제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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