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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감정 드러낼수록 시적 영감은 반감된다 / 안도현

by 丹野 2009. 5. 6.

 

 

 

감정 드러낼수록 시적 영감은 반감된다 / 안도현


13. 형용사를 멀리 하고 동사를 가까이 하라 한심한 언어 / 동사의 역동성과 종결어미의 변화

 

 

13. 형용사를 멀리 하고 동사를 가까이 하라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가 쓴 동시 한 편을 읽어보자. 어느 어린이 글짓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동시를 쓴 아이에게는 참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이런 유형의 동시를 보면 화가 난다. 한숨이 절로 쏟아진다. 이 동시를 쓴 아이 때문이 아니다. 이런 동시를 쓰게 하고, 심사를 해서 상을 주고,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하는 어른들이 한심해서다. 좀 더 과하게 말한다면 이 작품은 동시도 아니고 시도 아니다.

커다란 황금물감 푹 찍어
가을들판에 가만가만 뿌려놓았다
탱글탱글 누우런 벼이삭
살랑살랑 가을바람 불어오면
빠알간 고추잠자리
두둥실두둥실 흥겨운 춤사위

참새친구 멀리 이사 가도
외롭지 않은 허수아비
허허허 허수아비의 정겨운 웃음소리에
농부아저씨 어깨춤 덩실덩실

우리는 이 동시를 읽으며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아니, 의문을 가져야 한다). 물감을 과연 커다랗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물감을 강하게 ‘푹’ 찍었는데 왜 조심스럽게 ‘가만가만’ 뿌리는가? 그렇게 물감을 뿌리는 주체는 누구인가? 호두나 감자도 아닌 벼이삭의 생김새를 ‘탱글탱글’로 표현하는 게 맞는가? 고추잠자리의 비행이 일정한 격식을 갖춘 춤사위라고 할 수 있는가? 허수아비와 참새는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참새를 쫓기 위해서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서 있어야 할 허수아비가 왜 웃는가?(실성을 했나) 농부아저씨는 추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어깨춤을 추시는가?(낮술이라도 한잔 드셨나)
제목은 <가을맞이>다. 왜 그냥 <가을>이라고 하지 않고 <가을맞이>라고 했을까? 이 동시는 가을의 일반적인 풍경을 그저 평이하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가을을 맞이하는 그 어떤 적극적인 자세도,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탐색도 없다. ‘가을’이라고 하면 맨송맨송해서 다만 무엇인가 덧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맞이’라는 접미사를 붙이면 왠지 시적인 표현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는 으레 꾸미고 몇 글자를 덧붙이는 것이라는 잘못된 의식이 시 아닌 것을 시로 행세하게 만들고 있다.


<형용사는 감정 직접노출 독자의 상상력 마비시켜>
<동사의 역동성 키워야 은유와 상징 되살아나>


글을 아름답게 하려고 다듬고 꾸미고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일을 수사(修辭)라고 한다. 이 동시는 온전히 수사의 기술로 쓴 동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쓰인 시어 중에 명사는 모두 10개다. ‘황금물감·가을들판·고추잠자리·춤사위·참새친구·이사·허수아비·웃음소리·농부아저씨·어깨춤’이 그것이다. ‘이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교롭게도 두 개 이상의 단어가 결합한 복합어의 형태다. 이 명사들은 가을을 피상적으로 바라본 결과로서 그 스스로 빛나는 시적 영감을 던져주지 못하고 시를 위해 동원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기에다 의성어와 의태어를 포함한 부사가 ‘푹·가만가만·탱글탱글·두둥실두둥실·멀리·허허허·덩실덩실’ 등 7개이고, 색깔이나 상태를 표현하는 형용사로 ‘커다란·누우런·빠알간·흥겨운·정겨운’ 같은 말들이 쓰이고 있다. 이러한 부사와 형용사를 빼고 이 동시를 한 번 읽어보자.

“황금물감 찍어/ 가을들판에 뿌려놓았다/ 벼이삭/ 가을바람 불어오면/ 고추잠자리/ 춤사위// 참새친구 이사 가도/ 허수아비/ 허수아비의 웃음소리에/ 농부아저씨 어깨춤”

이렇게만 해도 작자가 형용사를 통해 대상을 간섭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기회가 대폭 줄어든다. 엘리어트는 일찍이 시가 “정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고 정서로부터의 도피”라고 강조하면서 시에서 감정의 직접적인 표출을 경계했다. 형용사는 시인의 감정을 직접 노출시키는 구실을 한다. 쉽게 시인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는 형용사가 유리한 것이다.
그러나 형용사의 과도한 사용은 시의 바탕이라 할 은유와 상징이 설 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미지가 들어앉을 자리를 형용사가 차지하고 있으면 그 시는 겉으로 화려해 보이지만 내용이 없고, 그 뜻은 쉽게 드러나지만 깊이가 없어 천박해진다. 사물의 핵심을 표현하는 데 게으른 시인일수록 형용사를 애용한다. 그가 제시한 형용사를 따라다니다 보면 독자는 상상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된다.

문장에서 형용사는 뒤에 오는 말(명사)을 치장하는 역할을 한다. 쓸데없는 치장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특히 형용사 중에 색채를 표현하는 ‘빨갛다·파랗다·노랗다·하얗다’와 같은 감각형용사는 아예 잊어버려라. 조지훈이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민들레꽃> 앞부분)라고 했더라도, 서정주가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국화 옆에서> 부분)라고 했더라도 당신은 ‘노오란’이라는 말이 아예 한국어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우리는 그동안 ‘노오란’을 시에 너무 많이 동원했고, 혹사시켰다. 제발 ‘노오란 개나리’ ‘빨간 장미’ ‘빠알간 고추잠자리’ ‘파란 바다’ ‘파아란 가을하늘’ ‘검은 밤’ ‘하얀 백지’ ‘하아얀 눈송이’라고 쓰지 마라. 그 색채 형용사들을 쉬게 하라. 색채 형용사들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동사의 역동성으로 채워 시를 살아 꿈틀거리게 하라. 기어가게 하라. 뛰어가게 하라. 날아가게 하라.

형용사가 사물의 성질, 감각, 색깔, 시간, 수량 등 정지 상태를 표현하는 데 반해서 동사는 사람이나 사물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역동적인 어휘다. 동사가 움직이는 선이라면 형용사는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점에 불과한 것이다.
“동사는 경험과 실질의 세계다. 동사는 감각의 세계다. 동사는 우리가 사는 얘기다. 자고, 먹고, 누고, 낳고, 좋아하고, 미워하고, 울고, 웃고 하는 게 다 동사로 표현된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동사가 많이 쓰일 수밖에 없다. 잘 자, 많이 먹어, 이리 와, 빨리 가, 울지 마, 웃어 봐, 때리지 마, 안아 줘….” (<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한겨레, 2007. 12. 16.) 그러니 당신은 가능하면 형용사를 미워하고 동사를 사랑하라.

한국어로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국어의 언어적 특성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말은 조사의 종류가 많고 어미의 변화가 매우 다양한 언어다. 당신은 반드시 조사와 어미의 변화에 주목하라. “명사나 동사, 형용사만을 중시하지 말아라. 한 편의 시에서는 토씨도 명사나 동사 이상으로 율조에 큰 역할을 하며 울림에 크게 기여한다.”(최하림, <멀리 보이는 마을>, 작가) 토씨, 즉 조사 하나가 시의 어조와 호흡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문장을 맺는 어미를 종결어미라고 한다. 우리말은 종결어미를 통해서 시제, 경어법, 화자의 태도, 시의 리듬에 적지 않은 변화를 꾀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시를 쓰는 시인이란 어미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종결어미는 ‘-ㄴ다, -ㅂ니다, -오’의 평서형, ‘-(느)냐, -니, -는가, -ㄹ까’의 의문형, ‘-구나, -군, -네’의 감탄형, ‘-어라/-아라, -게, -오’의 명령형, ‘-자, -세, -ㅂ시다’의 청유형으로 크게 나눈다. 이는 다시 ‘해라체·하게체·하오체·합쇼체’로 나눠지면서 경어법을 구별하게 된다.
근대 이전의 시에서 주로 쓰이던 ‘-노라, -도다, -지어다’와 같은 종결어미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죽은 어미가 되었다. 그러면 ‘-이다’는 어떤가. “나는 소금/ 좌판 위 주발이다/ 장날 폭설이다/ 지게 목발이다/ 헤쳐도 헤쳐도/ 산, 고드름의/ 저문 산/ 새발 심지의/ 등잔”(박용래, <겨울 산>) 은유적 표현에 기대어 의미를 단정하는 ‘-이다’는 70년대까지 시에 자주 나타났다. 그런데 요즈음 시인들의 시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일상대화에서 요새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같다’가 시를 점령할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닐까? 종결어미 하나가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미래를 다 짊어지고 갈 수도 있는 법이니까. 정말, 그럴 것도 같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