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 바람 / p r a h a
구름의 유목 / 신현락
유목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곳을 떠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저 구름이 흘러가던 곳
그쯤에서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유목민들이 반점처럼 흩어져간다
그 반점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몸에 깃들어 있던 꼬리뼈가
무럭무럭 자라고 깃발처럼 나부낀다
물론 대초원을 지나가는 바람의
배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몇 천 년을 흘러온 그리운
바람만이 안다는 구름의 망명지
천 리를 말을 타고 갈 수도 있다
거기에서도 몇천 리를 더 뻗어 있는
노을이 조용히 그의 몸을 눕히는 곳
구름의 족보를 들추면 거기엔
죽은 자들의 이름뿐이거나
울음 끝에 호명되는 이름들이
다문다문 몽고반점처럼 박혀있는 돌무덤
여전히 바람의 배경으로 나부끼는 깃발이
촘촘하게 바람을 빗질하고 있는 그곳
양들의 순한 피가 뿌려지던
바람의 신전 앞에 쓰여진
구름의 비문을 점자처럼 더듬는다
그쯤에서 빈손으로 마주하는 유목의 하늘
여기는 그곳의 머나먼 이역
유목이라는 말, 구름과 함께
나는 이미 그곳을 지난 것이다
바람이 내 낡은 정처를 읽고 가는
그 옛날의 저녁에
회향(回向) / 신현락
1
골목길 이면도로에 채 녹지 않은 그리움들이 자꾸 미끄러지며 헛바퀴 도는 해빙기의 아침, 연탄재 같은 메마른 슬픔이라도 길바닥에 부리고서야 길은 제 몸 밖으로 나서는 길을 허락한다 갈대숲을 보러 가는 길, 때마침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철새는 날아가고’*, 구슬픈 피리소리를 따라서 콘도르는 마추피추의 산정에서 날아오른다 더 오를 곳 없는 산정 같은 곳에서도 날아야 할 까닭이 있어야 했음을 그 시절엔 짐작이나 했으려나
나에겐 정신의 높이가 그들에겐 삶의 바닥이었으니
그 노래의 슬픈 악보를 이미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2
내 생의 간선도로가 단선일 때, 먼 곳이 그리워지면 철새의 지도를 펴고 방향을 가늠하곤 했었다 가늘게 떠는 나침반의 바늘 끝은 쇄빙선으로도 갈라지지 않는 빙하기, 기억의 결가부좌, 돌아오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극지를 가리켰던가
추월금지의 황색선이 도로의 중앙을 가르며 멀어지는 방향은 철새가 날아오르는 쪽이다 울퉁불퉁한 노면을 읽느라고 지친 차를 세운 갓길, 주정차금지구역과 철새보호지역이란 푯말이 나란히 서 있다 아이들 오줌을 누이던 사람들 슬금슬금 갈대숲 사이로 숨어들고 더러는 지평선을 바라본다 철새를 구경하러 가는 사람들과 같이 서서 보는 습지의 물길
생각해보면 내게만 있었던 굴곡이 아니었는데 내 생은 왜 늘 갯벌의 만곡처럼 안쪽으로만 길게 휘어져야만 했는지, 그 질퍽이는 바닥에 더는 발목을 담그지 못하고 쫓기듯 도망쳐왔던 기억의 내항을 누군들 가지고 있지 않았으랴
3
저쪽, 철새가 나는 곳, 피안의 강기슭,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근원 같은 곳으로 점점점 말줄임표로 사라지는 철새의 푸른 울음소리를 옮겨 적은 이의 애틋한 눈빛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눈빛 끌어안고 세상에서 멀리 간다고 바람과 날개 부딪던 울음 겹겹이 몸에 두르며 홀로 떠돌던 길들이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안다
그 길의 끝에서 나는 노래의 잔여울이 생의 이면도로를 열고 보여주는 지평선을 본다. 그리움의 간선도로가 무한한 단선으로 이어지는 거기, 서로의 몸을 기대면서 혹은 부비면서 수만 평의 무량한 울음으로 회향하는 갈대숲
4
늘 한 옥타브 낮은 저음의 밀물이었던 내 노래의 피안은 여기까지였을까
산정에서 날아오르는 콘도르의 비상은 천상과 지상의 사이시옷소리, 자유를 갈구하는 춤이었으니, 방랑하는 영혼이여!
쫓겨 다니던 날개의 더운 눈물이여!
해빙의 바람은 곧 저 갈대숲 수만 평의 울음마다 불의 날개를 매달 것이다 봄은 햇잎의 보료위에 만다라의 햇살 펼쳐주리라
더 갈 거니? 갈대숲은 정신의 높이와 슬픈 악보의 차이를 묻는다
여기서 더 가려면 슬픔의 중력으로 가라앉던 울음의 지평선을 밟고 가라고 한다.
*Simon &Garfunkle의 ‘Elcondor Pasa’, 우리에게 ‘철새는 날아가고’로 알려져 있는 이 노랫말에 나오는 ‘콘도르(Condor)’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잉카인들에게 신성시되는 새라고 한다. 이 노래의 원곡은 스페인의 학정에 항거하기 위해 농민봉기를 일으킨 중심인물인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의 이야기를 작곡가인 ‘다니엘 알로미아스 로블레스’ 가 1913년에 작곡한 오페라타 ‘콘도르칸키’라고 한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아련한 아픔 같은 느낌이 늑골 사이로 밀물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사이몬과 가펑클의 다소 감상적인 목소리와는 달리 이 노래의 배경에는 삶의 터전인 마추피추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잉카인들의 슬픔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2010년 애지 여름호>
울림 / 신현락
1
시를 읽다가 들려오는 북소리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
소리에는 나이가 있다 가령
장구소리는 발랄한 이십 대의 소리
콩닥콩닥 뛰다가 내 앞에서 샐쭉 돌아앉는 계집의 장단이라면
꽹과리소리는 장쾌한 삼심대의 소리
우르르르 쾅쾅 달려가는 더운 바람의 맥박 사이를 잡아채는 사내의 장단이라면
북소리는 과묵한 사십대의 소리
묵묵히 쟁기질 하던 소가 문득 창자를 쥐어짜듯 새끼를 부르는 부모의 장단이라면
징소리는 幽玄한 오십대의 소리
천 개의 강물에 스며들어 하나의 음으로 휘감아 도는 귀신의 장단이다
하나의 음을 듣는다면 그것은 이미 세월이다
2
계집과 사내 사이의 일에 그런대로 아쉬움이 사라지는
남자 나이 쉰이면 귀신도 보인다는데
오늘은 어인 일로 북소리가 눈에 밟힌다
시의 행간 그 먼 들판을 울리며 소들이 돌아온다
식구들을 데리고 도시의 변두리로 세 살러 온 아버지는 마흔 일곱이었다
지금의 나보다 젊었던 아버지의 등이 기억나지 않으나 멍에를 진, 소의 잔등처럼 잔뜩 휘었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의 등 뒤에서 울리던 우리 식구들의 발자국을 들으며 아버지의 눈동자는 무슨 음을 떠올렸을까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는데
오늘 읽는 시의 행간마다 북소리 둥둥 울리는 까닭이 무엇인가
3
하나의 음이 되기 위해서 무한한 인내가 필요하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장단이라면
어미소가 새끼소를 부르듯이
새끼소가 어미소를 찾듯이
무한한 인내와 절실함이 넘쳐야 한다
그것만이 자기의 몸을 넘어서는 울음이 된다
자기의 몸을 넘어서는 울음만이
다른 몸을 울릴 수 있는 울림이 되는 거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몸을 넘어온 거다
그 젊은 아버지는 오직 맨몸으로 당신의 몸을 넘어서 울림이 된 거다
4
오늘은 북소리가 내 몸을 울린다
내 몸을 넘어서 범람하는 북소리는
무한한 인내를 되새김질 하던 아버지 울음을 닮아 있다
입 밖으로 아버지의 초식성의 울음이 새어나왔다
나이 쉰이 되어서야, 시의 행간 속에 숨어있던 그 울음에 눈을 맞춘다
억장에 올려놓았던 울음이 무너진다
전생의 어느 한 순간
나는 아버지의 목젖을 본 듯도 하다
얼음구멍 / 신현락
저수지에 얼음구멍이 뚫려 있다
누군가 저 물 속을 오래 들여다보고 갔나보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 눈빛을 기억하기 위해
저수지는 온몸을 꽁꽁 얼리고 있다
얼음구멍 가장자리로 살얼음 조각이 떠있다
물방울에도 어떤 모서리가 있어서 둥근 얼음구멍 밖으로
투명한 결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빙어의 어신으로 고요한 그의 응시가 단 한 번 깨졌다는 것일까
단지 빙어가 기다림의 내용이 될 때는 아름답다
그의 내면을 회유하던 빙어가 한 번은 물 밖으로 나왔다는 듯이
둥근 얼음구멍이 잠시 출렁인다
얼음구멍을 통해 나는 그의 내면을 본다
말하자면 그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흔들리는 고요가
그와 나 사이에 놓인 기다림의 형식인 셈이다
발밑으로는 수심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인데
얼음구멍에 맑은 물이 찰랑거린다
문득 살얼음 엷게 깔리던 그의 눈빛을 생각한다
나는 얼음구멍을 다시 들여다본다
얼음구멍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이다
두 눈이 얼면서 오래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사람은 기다리면서 비로소 기다림의 내용이 된다
세상에서 사람이 기다림의 내용이 되는 것 보다 외로운 일은 없다
빈소의 저녁 / 신현락
빈소 앞에 서면 늘 어리둥절하다
저 많은 신발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제각각 다른 표정과 각도로
방문 앞에 놓인 신발들
한 생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것은 그 무렵이다
혼란스럽지만 저마다 주인이 있는
조문객들 신발 사이 어딘가에 놓여질 내 자리를 찾을 때
촛불 너머 영정사진이 자네 왔는가, 라고 물어볼 때
부의봉투를 확인하는 방문록에 기록되는 것으로
문상은 일단락 짓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그 사이 위치가 바뀐 내 신발을 찾기 위해서
나는 한참을 생각해야 한다
내 발을 닮은 신발, 왼쪽 발등이 부어오른
내 발의 표정을 닮은 신발, 오랫동안 비칠거리며 걸어온
길바닥을 닮아서 뒤축의 반이 헤진 특징을 기억해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신발은 그렇고 그런 삶의 모습처럼 서로 닮아 있다
모든 신발은 자기 주인의 삶을 닮아 있다
내 생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지는 때는 그 무렵이다
나는어떤길을걸어왔는가나는그길을어떻게걸어왔는가나는신발을벗어어떤자세로놓아두는가나는신발을얼마나아끼며가꾸었는가지금까지내삶의무게를견뎌주었던신발의표정을나는얼마나기억하고있는가
문상을 가서 죽음이 건네는 생의 안부에 대답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내 신발의 소재를 묻는 내가 딱한지
빈소의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누군가에게 배달되지 못한
수취인 불명의 신발 위로 희끗희끗 눈이 쌓인다
문득 저승길 갈 때는 꼭 맨발이어야 하는가 라는 생각
골목과 조등은 서로를 더욱 깊이 껴안고
한때 서로를 스쳐갔던 인연들은
불빛 아래 둥그렇게 모여앉아 화투패를 돌린다
빈소의 저녁은 그렇게 온다
상상임신 / 신현락
일월이 지고 이월이 떴다
일월보다 이틀이나 사흘이 부족한
이월은 일월에서 이체된 그리움을 하역하지 않는다
이월의 그리움은 바다에 뜬 달의 쪽잠이다
몸은 그믐에 가까워도
꿈은 여전히 만월의 곡선과 접속 중이다
지상에는 없는 달의 아이를 초음파로 찍고 있는 중이다
검푸른 바다 위에 인화되는 결핍의 시간과
양수에서 태동하는 몸짓이 뒤섞이고 있다
보름달 같은 환한 인연이란 건
한 생애가 한 번은 품어야 할
간절한 생명을 그리는 것, 그러나 만월은
이틀이나 사흘 전에 지워진 아이의 표정으로
몸 한 쪽이 지워진다
이월이 진다 달 속에서 출렁이는 입덧의 물결
삼월의 첫잠으로 이월의 그리움은 다시 이월된다
인(燐)이 박이다 / 신현락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물 보다 먼저 담배를 찾는 것은 내 오랜 습관
전 보다 더 심해졌다고 인이 배겼다며
이제는 당신 몸에서 아저씨 냄새가 난다고 아내에게 또 한 소리 듣는다.
인이 배긴 건지 인이 박인 건지 곰곰 생각해 보는데
흡연의 피해에 대한 뉴스를 보던 막내가 발로 툭툭 친다.
-아빠는 인이 박여서 끊기가 어려워.
-인이 뭔데? 참을 인(忍)이야?
-참을 인? 허, 고놈 참!
한자 조금 배웠다고 ‘참을 인’자냐고 묻는 막내에게 답할 말을 찾다가
‘참을 인’이면 그럴 듯하다는 생각, 열두 가지가 넘는 독성물질을 가진 담배를 하루에 한 갑씩 혹은 한 갑반씩 삼십 년을 피운 내 입술이며 목구멍이나 폐는 ‘참을 인’이 아니고는 설명 불가인 것.
성냥개비같이 외로운 영혼 하나 들키지 않기 위해 밤새 성냥불을 피우고 내뿜었던 몇 만 줄기의 연기가 배였던 자리
화인처럼 욱신거리는 중독은 이제 온전히 내 몸 안의 일인 것,
내 몸 밖에서 굴욕을 삭이는 방법이라면 인자할 인(仁)도 있고,
이젠 끊어야지, 그 말 백 번은 듣는다고 귀에 못이 박인다는 말도 있고,
점점 확대되는 흡연금지구역도 있고,
냄새를 피우지 않으면서 시를 잘 쓰는 사람도 있고,
오십 년을 피우던 담배를 끊으셨던 아버지도 있었다.
내 몸의 안과 밖은 이렇듯 투명하다.
그러므로 인(燐)이 박인 게 아니라 인(人)을 배기는 거다.
담배 한 개비의 거리에 있었던 사람을 그리움이라 하자, 그리움이 성냥갑 속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시절을 세월이라 하자. 그 사람의 눈썹을 그리고 혓바닥을 불태우던 시절을 외로움이라 하자. 입술이 까맣게 타들어갔던 침묵을 배겨야만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낙타처럼 폐허만이 가득한 사연으로 봉인된 시간을 묵묵히 건너온 사막도 있었던 거다.
티브이에서 먹을 것을 찾아 인가로 내려왔다가 창고에 갇힌 시베리아 호랑이의 인광을 본 적이 있다. 창고 속에서도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시베리아의 추위와 굶주림에 인이 박인 것임을 알겠다. 고독한 숲과 평원을 다 지나온 그에게도 배길 수 없었던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친구에게 건네듯이 문득, 그에게 담배 한 개비 권하고 싶었다. 그동안 나에게 담배를 건네 왔던 누군가에 관한 생각을 잠시,
차 한 잔 마시는 시간을 일다경이라고 한다. 나는 한 홉의 연기를 내 뿜는다. 내 가난한 영혼이 들키는 시간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연기(緣起)는 그것으로 인(因)하여 움직이고 나는 안과 밖의 중간에 있다.
중간을 틈새라고 부르는 한 연기는 그 사이를 떠돌 것이다.
금연에 관한 각서는 쓰지 않기로 한다.
누구나 하나쯤은 어찌해 볼 수 없었던 인에 관한 연대기를 갖고 있는 것이니
나는 아직 마지막 불빛을 보지 못했던 거다.
폐사지에서 / 신현락
봉숭아 첫물 든 물분홍 같은 마음들이
두물머리에서 콸콸 흐르는 강물이다가
끝물에는 한사리에 밀물지듯 썰물지는 게
애틋한 첫사랑의 낡은 비유라지만
당신의 하류에서
어찌 해 볼 수 없이 다 흘려보내고
상류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굽이졌던 사연들 이미 옛날이라고
주춧돌만 옹이진 마음처럼
드문드문 박혀있는 폐사지 말예요
햇빛이며 파도이거나 갈매기의 울음 따위도
한 일자로 꽉 입 다문
수평선을 보고
새삼 무슨 말을 하겠냐 싶어
깨진 기와조각이나 발로 툭툭 차보기도 하면서
출렁이면서도 늘 평형을 고집하는
수평의 날들을 부러워하면서
비며 바람이나 구름을 찾아 떠돌던 그 날을
누구는 폐허라고 하겠으나
용서라고도 부르고 싶어지는 날이겠습니다
모난 돌조각이라도 돌탑 위에 올려놓고요
후생이며 영원은 기약하지 말고요
첫물 든 마음으로 우리 생의 하류에서
이별도 두근두근 그리운 날
우리 다시 흐르는 그 날을요
구형에 대한 변명 / 신현락
1
나는 언제 구형이 되었을까
나이 문제가 아니라고,
투애니원의 멤버 이름을 아느냐고 네가 물어왔던 술자리
소줏잔을 한 번에 꺾지 못하고 나누어서 꺾기 시작했던 날
아내 앞에서 방구를 맘껏 끼기 시작했을 때
일주일이 지나도록 핸드폰에 문자메세지 하나 날아오지 않았을 때였을까
나는 매일 96년식 스포티지를 몰고 성의 안팍을 넘나든다
이것도 구형!
나는 매일 95년산 아파트에서 먹고 싸고 잠든다
이것도 구형!
나는 매일 63년생 아내와 얼굴을 맞대고 산다
이것도 구형!
나는 가끔 독자도 없는 기원전 서정시를 쓴다
이것은 더욱 오래된 구형?
신형 핸드폰도 며칠이면 구형이 된다
정말 미쳤어, 를 신선하게 부르던 손담비도 삼 개월이면 구형이 되는
유행 탓만을 하는 것도 구형이다
그러므로
어차피 내 오십의 목록에서 구형이 아닌 것이 없다
2
붓다는 28세 때 아내와 아이를 남겨둔 채 말을 타고 오래된 왕국의 성을 넘었다 한다
이른바 가출의 원형인 셈인데, 이것을
사람들은 구형이라고 하지 않는다
관건은
시간이 아니라 넘는다, 에 있다
넘는다
내가 나를 넘는다는 것
넘지 말아야 할 성을 넘는다는 것
어느 영혼이 함부로 나를 넘어간다는 말인가
아무리 썩어빠진 영혼이라도 간절함이 없이는 성을 넘어 너에게 가지 않는다
변명하자면 이렇다
내 오십의 목록은 내 사십의 목록을 넘어온 거다
시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십은 사십의 구형이지만
영혼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십은 사십을 살아온 자의 위대한 선물이다
영혼의 선물은, 아무리 오래 지난다 해도 구형이 되지 않는다
3
나는 매일 내 인생처럼 고장이 잦았던 구형 스포티지를 몰고 성을 넘어 출근한다
아시다시피 먹고 사는 일 때문이다
천근같은 아침을 넘고
가도가도 흩어지는 모래알 같은 점심을 넘고
세상의 모든 저녁처럼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92년식 티브이를 통해 손바닥 보다 얇다는 2010년식 신형 티브이를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신세대 가수의, 춤은 최신식이지만 가사는 구식인 노래를 귀에 담아보기도 한다
사랑을 잃어서 그들도 아프다고 한다
구형을 통해 신형을 보아서 그런지
그들도 구형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4
알량한 자존심과 변화에 대한 불안감으로
시간의 빗장을 걸고
골방에 틀어박혀 있는 생은 구형이다
산다는 것만으로는 신형이 되지 못 한다
존재만으로는 신생의 살과 뒤섞일 수 없다
나만으로는 상생이 되지 못 한다
불가피하게 오늘은 고백하자
내 오십의 목록에는 구형이 팔할이었다
내 시는 흘러간 노래 속으로만 흘러들었다
내 말은 대화가 되지 못하고 중얼거리는 독백일 뿐이었다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것도 구형이다
상처받기 두려웠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자
너에 대한 사랑이 나를 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넘어갈 수 있어야 너를 사랑할 수 있음을
이제야 알겠다
나는 아직 나를 넘어 너에게 가지 못했으나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답장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나는 지금 개봉 직전이다
(기대하시라, 가 아니라 기대 만땅!, 이라고 하면 신형이 되려나? 여하튼)
아내와 2000년생 아들과 함께 손잡고 잠들기 직전 2010년 겨울밤에 쓴다.
출처 / 우리詩 카페 - 감사합니다.
현악6중주 1번 B플랫장조 Op.18 2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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