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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타자, 동행의 시간을 만나다 / 박해림

by 丹野 2010. 1. 24.

                                                                                                                                                           p r a h a

 

 

우리詩월평■ 

 

 

                              타자, 동행의 시간을 만나다

 

 

                                                                       박해림(시인 · 문학박사)

 

 

임연태,「부부」(《열린시학》2009년 겨울호)

이은환,「그 마을에 누군가 불을 켜고 있다」(《우리詩》2009년 12월호)

한옥순,「홀아비 서 씨」(《우리詩》2009년 12월호)

전 숙,「팔자 고치기」(《열린시학》2009년 겨울호)

하정임,「벽」(《열린시학》2009년 겨울호)

김 경,「무량한 노숙」(《서정과현실》2009년 12월호)

박서영,「카프카의 잠」(《현대시학》2009년 11월호)

 

 

 

  같이 길을 감, 함께, 더불어 함의 뜻을 가진 ‘동행同行’은 매우 따뜻한 긍정의 말이다. 험하고 거친 이 세상을 살아내는 일이 모두 함께일 것 같지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철저히 ‘홀로’일 경우가 많다. 특히 금전적인 문제가 개입된 경우엔 말할 나위가 없다. 우선 순위가 오직 ‘나’에 국한되어 있다. 동시에 ‘함께’는 거의 실종되고 만다. 시절이 팍팍해질수록 ‘함께’는 멀어지고 ‘홀로’가 득세를 하고 있음은 이를 반증한다.

  그렇다면 가족은 어떠한가. 가족관계는 이미 운명적으로 내정이 되어 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세상 끝까지 가게 되어 있는 공식적인 ‘동행’의 관계라 볼 수 있다. 타인과 타인이 만나 부부가 된 후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치고 산다. 이럴 때 절대적인 타자와 절대적인 또 다른 타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으며 가정을 갖게 되는데 부부야말로 가장 가까운 가족이면서 동시에 가장 먼 타자의 관계에 놓인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고 엎치락뒤치락 크고 작은 온갖 성질의 희노애락을 나눈다. 절대적 타인과 구분 짓는 분명한 이유가 되며 ‘우리’라는 공동체적 삶의 원형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요즘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는 대형 가족 살해 사건을 대하면 이마저 붕괴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직 나만을 위하여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고 형제간에 살육전을 벌이는 처절한 가족 해체극은 동행의 의미를 무색케 한다.

  부부가 중심이 되어 자식과 더불어 철저히 가까운 타자의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의 삶.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또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미 운명적으로 내정된 관계가 아닌 타자 대 타자로 부부만큼 가까운 이웃, 즉 남은 없다. 언제든지 조건에 따라 철저한 타자가 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는 ‘동행’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동행이 숭고와 유사성을 가졌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숭고(崇高)를 축어적으로 본다면 높은, 고상한, 고양된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에서 유래한 용어로 롱기누스는 숭고를 여러 다양한 의미를 가진 것 중 특별히 정신의 한 가지, 감정의 어떤 특질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식구’라는 지극히 감정적이고 무비판적인 의미 외에 좀 더 진하고 묵직한, 짠하면서 애틋하고 이성적인 ‘동행’의 관계는 없는 것인가. 그러나 분명히 존재한다. 이타적인 삶이 그렇다. 종교적인 목적성이 아닌 자발적 의지에 의해서 관계 짓는 이러한 행위는 요즘 들어 양적으로 질적으로 늘어났고 비중 또한 커졌다. 가족 관계=동행이라는 지극히 당연하고 구태한 방법을 뛰어 넘는 이타적 행위는 그야말로 진정한 ‘동행’의 진정한 의미에 근접해 있다.

  ‘남과 남’이라는 당연시되는 타자와 타자의 관계에 이타적 동행이 개입된다면 일반적인 인식으로서 타자 대 타자가 아니게 된다. 특별한 의미로 승화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이면서 함께이기를 갈구하고 갈급하는 타자 대 타자의 특별한 인식의 알레고리는 시의 진정성을 부여하게 된다. 자아의 타인에 대한 배려가 어떻게 한 편의 작품 속에서 승화되는가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 임연태, 이은환, 한옥순, 하정임, 박서영, 김경, 전숙의 경우가 그렇다.

 

 

홍천 시외버스터미널 하차장

큰 가방 작은 가방 하나씩을

메고 끌며 버스에서 내린 부부

 

두 리 번

두 리 번

두 리 번

 

가방처럼 작은 키

가방처럼 뚱뚱한 몸

가방처럼 때 절인 얼굴

가방처럼 낡은 외투

가방처럼 이국땅에 던져진 불안

 

한참 만에 나타난 승합차에서

 

뒤뚱

뒤뚱

뒤뚱

 

사람이 가방을 끌고 가는지

가방이 사람을 끌고 가는지

 

붉은 가을햇살 밟으며

달려가는 부부

                 -임연태,「부부」(《열린시학》 2009년 겨울호)

 

 

  노부부의 모습이 후 불면 지워질 낡은 이발소 그림처럼, 탈색이 이미 이루어져 조만간에 지워질 듯 이 시는 시골 시외버스 터미널이면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도시로 떠나보낸 자식들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노년의 궁색. 한 평생 서로 의지하며 동행한 타인의 익숙한 우리의 부모가 연출하는 안쓰러운 모양새가 아닐 수 없다. 식구는 있으되 각자의 삶에 급급해 타자가 되어 있음을 유추케 한다. ‘홍천’이란 지명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강원도라는 한정된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적조를 배경에 두었겠지만 ‘가방처럼 작은 키/ 가방처럼 뚱뚱한 몸/ 가방처럼 때 절인 얼굴/ 가방처럼 낡은 외투/ 가방처럼 이국땅에 던져진 불안’의 구체적 묘사를 통해 공통점을 발견한다. 함께 불안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한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이다. 분명 따로인데, 한 몸인 이들 부부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동행은 이런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 연의 ‘붉은 가을햇살 밟으며/ 달려가는 부부’에서 승합차에 태워진 부부의 모습은 오히려 아름답기까지 하다. 외모에서 풍기는 모습은 비록 궁기가 흐르지만 잘 끼워지고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서로 어긋남 없이 불안함까지 함께인 모습에서 타자인 시인은 타자끼리 만나 오랜 시간 ‘함께’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함께이며 ‘가을’이 함의하는 시간 속에서 끝까지 함께일 것이라는 것을 긍정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시는 ‘나’와 ‘식구’의 운명적인 만남, 즉 가까운 타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본다.

 

 

먼저 잠이 든 식구들을 보고 있으면서 서먹해진다

어디쯤 가 있는지, 먼 왕국처럼

지금 그 꿈속을 내가 갈 수 없다

 

따라잡을 수 없는 다른 생각의 마을들

불이 켜지고

거기 문득, 없는 눈밭 위의 내가 궁금하다

내가 디뎌볼 수 없는 시간의 나를,

누군가 물으며 따라오는 내가 궁금하다 그 후미에

 

찍히는 발자국들 궁금하다, 멀어져간 나란

그건 나일까 마음일까 사실일까

내게서 풀려나간, 거기에 가서 꽂힌,

내가 쏜 화살 그게 나가 맞나 거기 익숙한 그 사람 누군가

앞서 걷던 발자국들 사라지고

문득 설원

 

잠 든 아이가 뒤척인다 어디쯤에서 달음박질치는지

막다른 골목에 마주치는 어둠이나 없으면 한다

잉잉 겨울밤에

불기는 없이 불빛이 먼, 내 아이적 추운 가로등 같은

가난하고 위태로운 밤은 되지 말기를

 

매캐하니 식구들 꿈속에서 슬그머니 물러나와

열려있는 창문 꼭꼭 닫아준다

창 밖에 가로등이 뽀얗게 켜 있다

지금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란 그 불빛의 근처 뿐이다

                        -이은환,「그 마을에 누군가 불을 켜고 있다」(《우리詩》 2009년 12월호)

 

 

  식구라는 울타리를 치고 사는 시적 화자는 한 밤 중에 홀로 깨어 있다. 고즈넉한 고요 속에 내던져진, 익숙한 식구들이 저마다 잠든 모습을 보고 문득 ‘낯섦’을 본다. 누구든 깨어 있을 때와 다른 모습을 연출하지만 그 또한 반복된 일상 속에서 굳이 낯설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다 누구인가, 나와 어떤 관계인가, 새삼스러운 타자의식이 시적 화자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식구들의 꿈속을 궁금해 한다. 타자가 아니므로 나와 이미 ‘식구’를 형성했으며 운명을 함께 하기로 울타리를 쳤으므로 이미 나는 이들에게 타자가 아님을 말하고 싶다. ‘따라잡을 수 없는 다른 생각의 마을들/ 불이 켜지고/ 거기 문득, 없는 눈밭 위의 내가 궁금하다’ 시적 화자는 식구들을 통해 이번엔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있다. ‘찍히는 발자국들 궁금하다, 멀어져간 나란/ 그건 나일까 마음일까 사실일까(중략) 앞서 걷던 발자국들 사라지고/ 문득 설원’에서 말하듯 삶이란 긴 여정에서 평생을 함께 할 이들 식구들의 모습에서 스스로 타자화하다가 자아를 발견한다. 동행에서 홀로를 발견한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할지라도 과연 이들과 끝까지 동행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란 그 불빛의 근처뿐이다’에서 고백하듯 다가가고 싶으나 한계를 발견하고 만다. 어릴 적 느꼈던 그 경계에 서서 현재에서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래의 관찰자의 시야에 잡힌 서 씨는 철저히 혼자다.

 

 

가수 문주란을 알고 살기를 잘했다며

홀아비 서 씨가 대낮부터 취해서 게걸댄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에 ‘동숙의 노래’를 들으며

젓가락 장단에다 발가락 장단을 맞추고 있자니

안경 너머로 보이는 가식투성이의 이놈의 세상이

맨 정신으로 버티기엔 소가지 끝에서부터

어쩐지 구역질이 끓어 올라올 것 같다며

멀미나는 어지러운 쓰레기 같은 세상 속에서

가끔씩은 지금처럼 비 뿌려주는 날 있어

막걸리 사발 째 들이키는 시큼한 맛도 보고

백열등 위에서 기다렸다는 듯 소용돌이치며 잔속으로

다이빙하는 하루살이가 자기 신세 같다는 얘기며

노가다판 오야 놈 욕설과 밀린 셋방 걱정을

눈치 없는 척 떠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빈속에 들이킨 낮술에 취해 그 동안 맘에 두었던

태양다방 마담 엉덩이 얘기도 털어놓을 수 있으니

가수 문주란을 알고 살기를 백 번 잘했다며

곰팡이 냄새 풍기는 입으로 ‘돌지 않는 풍차’를 부르던

홀아비 서 씨가 웃다 울다 엎어져 잠든

평상 위로 비릿한 하루가 저문다

                          -한옥순,「홀아비 서 씨」(《우리詩》 2009년 12월호)

 

 

  제목에서 암시하듯 ‘홀아비 서 씨’는 동행할 그 누구도 없다. 있다면 가수 문주란이다. 문주란의 음성과 음성이 만들어낸 분위기와 노래가사다. ‘너무나도 그님을 사랑 했기에/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뉘우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를 통해 확인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자학이다. 동행할 대상을 떠나보낸 자책이며, 자신을 떠난 님을 잊지 못한 넋두리이다. 떠나간 님을 향한 원망은 노래에서 재현된다. 혼자이기에 더욱 넓어진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망과 수다와 좌충우돌의 하루를 ‘울다 웃다 엎어져 잠’들고 만다. 스스로 타자화된 자신을 세상 속으로 내던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오직 관찰자의 입장에서 타자인 ‘서 씨’를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시의 화자는 어쩌면 자신이 타자화되고 있는 것이 걱정되는 것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동행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공동체적 삶의 원형을 가족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객관화시킴으로써 동행의 의미를 곱씹고 있는 것은 아닐까.

 

 

  꽃양귀비 모종을 얻으러 갔다. 이미 꽃이 무성하여서 이식하기엔 늦었단다. 구석진 자갈밭의 옹색한 꽃을 잡아당기니 자갈 사이에 불안불안 떠있던 뿌리가 선심 쓰듯 들려나온다. 모종을 심으려는데 화단이 온통 자갈밭이다. 작년에 주차장부지에서 골라낸 돌을 화단에 무심코 던져두었던 것이다. 도리 없이 자갈밭에 꽃을 심고 자갈을 흙처럼 덮어주었다.

 

  팔방놀이하는 언니에게 업혀있던 아기 복룡댁의 허리가 뒤로 꺾이고, 한 번의 꺾임이 한평생 지고 갈 눈물이 되어버린 복룡댁. 다른 꽃들 다 찾아먹는다는 붉은 열흘을 구경도 못해본 곱사등이 꽃은 시집간 지 사흘 만에 소박맞았다. 생과부가 목숨처럼 키운 유복자는 스무 살에 속립성결핵으로 그녀 곁을 영영 떠나고 말았다.

 

  우물이 기울어졌다. 쓴 물이 울컥거렸다. 누구도 어찌해볼 수 없는 복룡댁 팔자 때문에 속을 끓이던 우물의 쓸개가 경련하고 있었다.

 

  자갈밭에서 뽑혀와 또 다른 자갈밭에 이식되는 것이 저 꽃의 팔자일까? 나는 양자바른 터에 부드러운 객토를 듬뿍 깔고 모종을 옮겨 심었다.

 

  어쩌다 복룡댁과 마주쳐

  “어떻게 살아요?”물으면

  순하게 웃으며 “봉사하며 살지요.”

 

  복룡댁의 가슴에도 누군가 부드러운 객토를 듬뿍 깔아준 것일까.

                                          -전숙,「팔자 고치기」(《열린시학》 2009년 겨울호)

 

 

  하지만 위의 시 ‘팔자 고치기’는 앞의 ‘홀아비 서 씨’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혼자 된 것은 피차일반인데 자기 앞의 생을 밀어내느냐 끌어안느냐의 양태를 보이는 것이다. ‘서 씨’가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와 ‘돌지 않는 풍차’에 자신의 삶을 대입시키고 있다면 ‘복룡댁’은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는 모진 운명의, 누구도 어찌해 볼 수 없는 팔자를 이타적인 삶으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데서 끌어안는 삶을 보인다. 꽃모종을 얻으러 갔다 발견된 자갈밭의 ‘옹색한 꽃=복룡댁’은 시의 화자의 시야에서 동일시된다. ‘작년에 주차장부지에서 골라낸 돌을 화단에 무심코 던져두었던’ 탓에 화단이 자갈밭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자갈밭에 꽃을 옮겨 심고 보니 ‘소박맞은 복룡댁’의 팔자를 기억해 낼 수밖에 없다. 곱사등이 복룡댁이 유복자마저 잃고 철저히 혼자가 된 것을 안타까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행 없이 세상에 남겨진 홀로된 복룡댁의 신세를 모른 척 할 수 없어 ‘어떻게 살아요?’ 묻는다. 하지만 뜻밖의 답변이 들려온다. ‘봉사하며 살지요.’ 이쯤 되면 복룡댁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셈이다. 일대 다수의 동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족관계에서만 동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복룡댁의 가슴에도 누군가 부드러운 객토를 듬뿍 깔아준 것일까’로 마무리되는 따뜻한 시선은 동행의 의미를 새롭게 변주하고 있다. ‘팔자 고치기’의 제목이 참신하다.

 

 

지금 내 손에 남은 냄새가 무엇인지

당신을 떠올리고 X라고 긋고 나니

당신의 배꼽만 남았다

남은 배꼽을 벽에 걸어두니

겨울외투와 코르덴바지가 가서

그 낡은 벽을 채운다

 

남은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니

당신의 로봇이 지붕을 꿇고 오를 기세

Z는 사실 마징가도 아니지만

벽에 걸려 있는 당신에게

Z라고 쓰고 보니 당신은

머리도 다리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미안한 일은

우리의 방에서 일어난 일을,

로봇이나 못 생긴 배꼽이 고통의 순간을 견딘다는 것

내가 그 어두운 방에서

벽면 가득히 새겼던 말들을

그 방에서 다시 시작할 사람이 있다면

O라고 나는 적는다

머리도 다리도 없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이

내 손에 남은 냄새를 다 지우겠다고

손톱을 세우고 벽을 할퀴고 있는

펄럭이는 저 벽 속의 벽

                                          -하정임,「벽」(《열린시학》2009년 겨울호)

 

 

  팍팍한 세상에서 ‘그대’로 통칭되는 타자와의 관계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 마련이다. ‘지금 내 손에 남은 냄새가 무엇인지/ 당신을 떠올리고 X라고 긋고 나니/ 당신의 배꼽만 남았다/ 남은 배꼽을 벽에 걸어두니/ 겨울외투와 코르덴바지가 가서/ 그 낡은 벽을 채운다’ ‘배꼽’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배꼽은 태아가 모태의 자궁에서 생명을 연명하고 있는 끈이자 생명줄이다. 남은 당신의 배꼽을 벽에 걸어둔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배꼽을 상징하는 X의 중첩 이미지를 다의적으로 해석하게 한다. 하지만 부정의 대상이 되어버린 ‘그대’가 한 때는 마징가 제트였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본다. 시의 화자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초합금Z 로 설계된 인조인간 마징가제트는 적과의 싸움에서 초강력 에너지와 기술로 악을 퇴치하고 지구를 지켜주는 로봇의 대명사이다. 그러므로 시의 화자는 ‘그대’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해 보인다. 역설적 이미지를 끌어내어 ‘그대=벽’임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막상 마징가를 떠올려보면 머리도 다리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봐도 그렇다. 이미 부재한 ‘그대’는 몸통만 남아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내가 그 어두운 방에서/ 벽면 가득히 새겼던 말들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대’는 벽이 된다. 아무 귀도 입도 눈도 없는 오직 출구와 입구를 봉합한 벽이란 얼마나 처절한 단절인가. 동행할 수 없는 부재의 ‘나’만 남는 것이다. 아래의 시 역시 철저히 혼자인, 스스로의 벽을 보여주고 있다.

 

 

한 사내의 경사진 죽음 이후, 여기

소리 없는 노숙이 자랐다

달의 생젖을 먹고 자란 그는

검은 발목을 가진

달의 의붓자식이다

방어산 바람물머리 골무꽃을 불러들여

곤곤함을 견디는 마애불

난치성 무좀처럼 하룻밤 자고 나면 다시 도지는

 

 

풋잠 속 각진 꿈들이

썰물 대신 어진 물살이라도 만났을까 어느 날

그는

초경도 치르지 않은 처녀의 손목을 끌고

상반신만 남은 바위굴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수십 번도 더 흔들어 깨웠지만

단 한 번도

그를 깨고 나온 적 없다

한때는

역사의 기록에 무릎 꿇은 적 있었으나 이제는

다만 침묵만으로 견디고 있는 그를

참견하지 말라

깨우려고도 하지 말라 쉽게 부서지려 하는

골형성부전증 그의 이름에 대해 더 이상 그에게

그의 골계에 대해,

250만 년 전에도

그는 떠도는 달이었다

                              -김경,「무량한 노숙」(《서정과현실》 2009년 12월호)

 

 

  하지만 위의 시를 자세히 살펴보면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음을 발견한다. ‘한 사내의 경사진 죽음 이후, 여기/소리 없는 노숙이 자랐다’의 신선한 진술이 암시하듯 ‘방어산 바람물머리 골무꽃을 불러들여/ 곤곤함을 견디는 마애불’의 모습에서 동행 없이 철저히 홀로인 사람을 병치시키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초경도 치르지 않은 처녀의 손목을 끌고/ 상반신만 남은 바위굴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수십 번도 더 흔들어 깨웠지만/ 단 한 번도/ 그를 깨고 나온 적 없다’ 비구니가 되어버린 처녀의 수행, 삶의 곤곤하고 핍진함을 오직 ‘침묵’으로 견디고 있는 마애불은 구도의 인간 세상을 양각하고 있다. 암벽이나 구릉에 새긴 불상, 또는 동굴을 뚫고 그 안에 조각한 불상이다. 양각(陽刻:浮彫) ·음각 ·선각(線刻) 등 다양한 모습은 세상의 그 어떤 풍파에도 오직 철저히 혼자인 것이다. 오히려 비구, 비구니, 보살들로 대표되는 불자들의 동행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혼자이나 결코 혼자이지 않음을 양각의 ‘무량한 노숙’으로 각인시키고 있다. 세세대대, 역사의 긴 두루마리 속에서 이따금 왜곡된 적은 있으되 앞으로 영원히 동행의 모습을 유지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의 골계에 대해,/ 250만 년 전에도/ 그는 떠도는 달이었다’를 통해 확인된 종교적 동행은 함께 하기로 작정한다면 결코 타자를 타자이지 않게 한다. 혼자이면서 철저히 함께이기를 전제하면서.

 

 

비둘기는 환풍구 배관에서 겨울을 나고 날아가 버렸다

이젠 덕지덕지 똥만 가득 쌓여있다

화석처럼 굳어버린 잠의 배설물들

서울 가서 본 적 있다

점심시간 손님들이 북적대는 칼국수집 출입문 앞에

환기구 하나조차 얻지 못한 사내가 잠들어있었다

손님 중에는 잠든 사내의 늘어진 다리를 슬쩍 뛰어넘어

식당으로 들어간 이도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서인지

손님들도 식당주인도 사내를 잠의 배설물쯤으로 여기는 듯 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낯설고 기이한 몇 가지 풍경을 기억해냈는데

그 칼국수집 앞에서 만난 카프카와

서울역 광장 노숙자들이 하루 종일 만나는 예수와

애 밴 여자노숙자의 불룩한 배와

 

그러고 보니 서울구경 하루만에

모녀노숙자처럼 황폐해져서 아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곤 했는데

기차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져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우리를 냄새나는 잠의 배설물로 오해하더라고

침까지 흘리며 쿨쿨쿨 잘 잤다

기차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깊은 잠에 들게 했으리라

봄으로부터 출발한 기차의 몸속이 너무 따뜻해서.

                                -박서영,「카프카의 잠」(《현대시학》 2009년 11월호)

 

 

  화려한 수도 서울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온 시의 화자는 예각을 보인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도시의 겨울나기를 ‘비둘기’를 통해 증언한다. 비둘기의 똥을 통해 ‘화석처럼 굳어버린 잠의 배설물들’이란 참신한 감각을 끌어내고 있다. 번쩍이며 고급스런 도심의,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칼국수 집 앞의 노숙자. 타자와 타자의 관계가 적나라하게 표상되는 인간 집단의 공간 중 음식점이 가장 으뜸일지도 모른다. 혼자, 또는 둘, 아니면 여럿이 때마다 끼니를 채우기 위해 찾아드는 원초적인 공간이다. 먹을 것 앞에서는 누구든 철저히 타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때만큼은 완벽히 혼자인 것이다. ‘나’가 보고 감지한 거대도시 서울은 사람들 모두 타자화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손님 중에는 잠든 사내의 늘어진 다리를 슬쩍 뛰어넘어/ 식당으로 들어간 이도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서인지/ 손님들도 식당주인도 사내를 잠의 배설물쯤으로 여기는 듯 했다’가 말해주듯 타자의 관계만 성립되고 있는 것이다. ‘잠의 배설물=똥’이 되는 이 관계를 다른 식으로 풀어보면 ‘동행의 배설물= 타자’가 아닐까. 시의 화자는 여기서 끝내지 않는다. 기차에서 ‘침까지 흘리며 쿨쿨쿨’ 잠 잔 것을 사람들이 혹 ‘잠의 배설물’로 알게 될까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기차라는 역동적 삶의 도구에 실린 ‘우리’를 내세우며 절대 그렇지 않음을 풀어내고 있다. 동행의 의미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절대 손을 놓지 않을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모두가 타자이다. 타자가 될 수밖에 없다. 운명적인 관계이든 아니든 또한 우리는 동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동행의 단순의 의미를 넘어서 온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서로 견인함을 뜻하며 필요에 따라 삶의 조건에 따라 혈연을 뛰어넘는 이타적인 삶도 불사하는 것이며, 내가 너이듯, 네가 나이듯 이인삼각의 모습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시간이 다르며, 떠난 시간 또한 다르므로 오직 나의 이익과 편리에 따라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이성적이어서는 안 된다. ‘동행’의 뜻에 부합되는, 온기를 가진 긍정의 힘을 전제로 한, 숭고(崇高)의 의미 또한 가미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박해림 시인

*고려대 석사, 아주대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6년『시와시학』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1999년『월간문학』동시 당선

*2001년 서울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01년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2003년 수주문학상 우수상 수상

*2008년 이영도 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현재, 격월간『정신과 표현』편집위원, 아주대 강사

  시집

*1999년『실밥을 뜯으며』

*2003년『눈 녹는 마른 숲에』

*2004년『고요, 혹은 떨림』

*2005년『간지럼 타는 배』(동시집)

*hlm21@naver.com

 

 

 

 출처 / 우리詩회 http://cafe.daum.net/urisi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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