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핸들이 사슴의 뿔이라면 외 2편 / 박수빈
자전거 핸들이 사슴의 뿔이라면 (외 2편)
박수빈
안장은 머리가 되거나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담장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들판을 달리고픈 사슴이
어쩌다 뿔의 방향 잃었을까
따라오는 소리 우꾹이
벌국, 딸국으로도 들리는데
선생님은 y=f(x)라고 했다
그때 별을 그리는 마음 헤아렸더라면
학교 가는 길에 돌멩이를 툭 차지 않았을 텐데
돌멩이 혼자 구석에서 울까 봐 지각하던 날
워극, 부큭으로도 느끼며 나는 그늘로 갔다
차츰 돌멩이는 모과를 닮아가고
뿔은 좌우 상관없고
나의 내일은 그저 풍경이어도 괜찮았다
어디로 가는지 빛깔도 다르면서
이하동문 묻어간 시절들
바퀴 잃고 이제 물 건너는 사슴
휘도는 굽이에 수심 깊어진다
고개 들어 뿔 닮은 나뭇가지를 본다
검은 사람들이 내려온다
11월처럼 내려온다 10월이거나 1월이어도 상관없다 110011101 고드름이 뚝, 뚝 이진법이 자란다 디지털에도 감정이 있을까 Ctrl+C에 Ctrl+V 하며 내려온다 수많은 내가 내려온다 분신들이 넘치는 세상에 진짜 나는 어디에 있나 가난한 마음에 따듯한 눈빛 나누거나 심장 데울 수 없이 똑같은 키에 한 방향으로 복제될 뿐 가방은 돌덩이 같고 우산은 막대기 같고 모자는 봉분처럼 허공에서 폭탄이 투하되듯이 어제가 추락하고 있다 내일이 추락하고 있다 내용물이 빠져나간 포장지, 원본이 보고 싶어 손톱을 긁는다 덧그려진 고양이가 드러난다 달 먹은 고양이, 담 넘는 고양이가 드러난다
바람의 슬하
보랏빛 향기가 뎅,
오동꽃에서 종이 울린다
여러 개의 귀가 열린다
해는 저물고 벤치는 소리 박물관인 듯
사람들이 시침 분침처럼 스쳐 간다
더러 고장 난 시계 같은 사람도 있어
따라온다, 목록들
구겨진 태엽처럼 떨어진 송이들
소리의 안쪽을 살피면
환영처럼 피어나는 무게들
태양을 맞으러 현관을 나서던 날
구름 너머를 보지 못하고
이제는 오후 여섯 시의 잎으로 남았다
흐르는 시간의 하류에 저리 아름다울 수 있을까
고개를 드는데 그늘이 진다
내 피톨들이 보라, 보라, 외친다
뒤로 태양이 뜬다고 등진 관계들
등나무는 그냥 그늘을 드리우지 않는다
꽃이 대지로 스며들고 있다
그늘이 대지로 스며들고 있다
—시집 『달 먹은 고양이』 2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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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빈 / 전남 광주 출생. 아주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박사 졸업. 2004년 시집 『달콤한 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 《열린시학》 평론 등단. 시집 『청동울음』 『비록 구름의 시간』, 평론집 『스프링 시학』 『다양성의 시』 『관계와 시』. 논저 『반복과 변주의 시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