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나무의 발성법 (외 2편) / 박완호

丹野 2025. 4. 17. 17:57


나무의 발성법 (외 2편)

   박완호
 
 
씨앗이라고, 조그맣게 입을 오므리고
뿌리 쪽으로 가는 숨통을 가만히 연다.
새순이라고 줄기라고 천천히
좁은 구멍으로 숨을 불어 넣는다.
길어지는 팔다리를 쭉쭉 내뻗으며
돋아나는 가지들을 허공 쪽으로
흔들어 본다. 흐릿해지는 하늘 빈자리
연두에서 초록으로 난 길을 트이며
이파리가 돋고 꽃송이들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을 위해
아직은 나비와 새들을 불러들이지 않기로 한다.
다람쥐가 어깨를 밟고 가는 것도
몰래 뱃속에 숨겨둔 도토리 개수가
몇 개인지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한다.
하늘의 빈틈이 다 메워질 때쯤
무성한 가지들을 잘라내고 더는
빈 곳을 채워 나갈 의미를 찾지 못할 만큼
한 생애가 무르익었을 무렵
가지를 줄기를 밑동까지를 하나씩 비워가며
기둥을 세우고 집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의자와
몇 권의 책 빈 술병을 올려둘 자리를 준비한다.
그리고는 어느 한순간 잿더미로 남는
황홀한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더는 아무것도 발음할 필요가 없는
바로 그 찰나, 나무는 비로소
한 그루 온전한 나무가 되는 것
 
나—無라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천천히 발음해 본다.
 
  
 
홀수
 
 
 
짝을 짓는 사람은 그때마다 살아 있고, 게임에서처럼
 
죽은 사람의 숫자는 언제나 홀수, 사과도 배도 차가워진 부침개까지도 셋 다섯 일곱…… 홀수는
 
죽음 쪽에서 건너오거나 죽음 쪽으로 다가서는 발소리
 
홀수와 홀수가 만나 짝수가 되는 건 이곳의 일, 거기서는 홀수의 합은 무조건 홀수,
그건 어쩌면
 
끝내 홀로 남고 마는 인생의 상수 같은 것, 홀수가 아름다운 까닭은 그것 때문이지
 
바람은 홀수로만 불고 꽃들도
홀수로 피고 지고 너와 내가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아도
결국은 홀수,
그러니까
 
홀짝의 마무리는 어차피 홀수인 셈이지
 
 
  
훗날의 꿈
 
 
 
지나간 훗날을 더는 꿈꾸지 않으리
한 손가락 굽은 여자의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나지 않으리
그녀의 순한 눈망울을 닮거나
숱 많은 머리카락을 물려받지 않으리
오월 햇살같이 다사로운,
엄마라는 발음의
나보다 어려지는 한 사람을 품지 않으리
슬픔의,
아무 데서나 엇갈리는 걸음을 재촉하거나
꿈꾸지 못하는 밤을 책처럼 쌓아두지 않으리
문밖 살구나무 아래를 서성이는
자국 없는 발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리
제대로 늙어보지도 못한 아버지
깜깜한 물소리 끼고 산등성이로 향하는
마지막 걸음을 그대로 두지 않으리
서러운 꿈의 궤적을 비껴가는
어떤 내일도 돌이키지 않으리
 
 
 
              —시집 『나무의 발성법』 2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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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호 / 1965년 충북 진천 출생.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안의 흔들림』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 『아내의 문신』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너무 많은 당신』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 『나무의 발성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