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열 시인/[시선집]울타리가 없는 집

나호열 시선집『울타리가 없는 집』

丹野 2023. 10. 3. 20:48

나호열 시선집    『울타리가 없는 집 』   2023년 9월 8일  에코리브르 출판
 
 
 
  철학자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읽고 얘기한다는 것은 부담스럽다.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고, 그의 깊은 생각을 좇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우리를 부담스럽게 한다. 그러나 나호열 시인의 시 읽기는 즐겁다. 그는 분명 철학자이면서 시인이지만 어려운 이론으로 설교하지 않는다. 쉬운 말과 부드러운 가락으로,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면서도 무심코 지나쳐 버린 우리네 삶의 아픈 곳을 노래한다. "자신을 위로하지 못하는,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자신과 대화하지 못하는 그런 시를 두려워한다."(''서문'')라고 그가 말하듯 그의 시는 자신과의 대화를 넘어 우리에게로 쉽게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가 잊고 사는 생의 진실을 낮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일깨워 준다.
 
-시집《 낙타에 관한 질문》 헤설 중에서  -  김삼주 (문학평론가, 경원대 교수)
 
 
 
 
 
 
 

 
집과 무덤

 
나호열
 
저녁에 닿기 위해 새벽에 길을 떠난다
 
 
 
 
 
 
 


 
나호열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당신에게 말 걸기 

 
나호열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는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흘러가는 것들을 위하여

 
나호열
  
 
용서해다오
흘러가는 강물에 함부로 발 담근 일
흘러가는 마음에 뿌리내리려 한 일
이슬 한 방울 두 손에 받쳐드니
어디론가 스며들어가는
아득한 바퀴 소리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들을 위하여
은밀히 보석 상자를 마련한 일
 
용서해다오
연기처럼 몸 부딪쳐
힘들게 우주 하나를 밀어 올리는
무더기로 피어나는 개망초들
꽃이 아니라고
함부로 꺾어 짓밟은 일
 
 
 
 
 
 

修行

 
 
나호열


내가 오랫동안 해온 일은 무릎 꿇는 일이었다
수치도 괴로움도 없이
물 흐르는 소리를 오래 듣거나
달구어진 인두를 다루는 일이었다
오늘 벗어 던진 허물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때와 얼룩이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함부로 팽개치지 않는 사람은 
자동세탁기를 믿지 않는다
성급하게 때와 얼룩을 지우려고 
자신의 허물을 빡빡하게 문지르지 않는다 
마음으로 때를 지우고
마음으로 얼룩을 지운다
물은 그 때 비로소 내 마음을 데리고 
때와 얼룩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빨랫줄에 걸려 있는 어제의 깃발들을 내리고
나는 다시 무릎을 꿇는다
때와 얼룩을 지웠다고 어제의 허물이
옷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의 아니게 구겨진 내 삶처럼 
무늬들의 자리를 되찾기에는 또 한 번의 
형벌이 남겨져 있다
쓸데없이 잡힌 시름처럼 주름은 
뜨거운 다리미의 눌림 속에 펴진다
내 살갗이 데이는 것처럼 마음으로 펴지 않으면 
어제의 허물은 몇 개의 새로운 주름을 만들어 놓고 만다
부비고, 주무르고, 헹구고, 펴고, 누르고, 걸고
평생을 허물을 벗기 위해
오늘도 무릎 꿇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음지식물
 

나호열


태어날 때 어머니가 일러주신 길은
좁고 어두운 길이었다
기억할 수 없지만, 내가 송곳이 아니었다면
어머니의 울음은 그렇게 푸르지 않았을 것이다.
몸에 남아있는 푸른 얼룩은 고통의 살점
알 수 없는 적의는 죄와 길이 통하고
먼저 내 살점을 뚫고 나서야
허공을 겨눈다
이른 봄 벌써 목련이 지기 시작하는 때
저만큼 새가 날아가고 난 뒤에
그림자는 하얀 발자국으로 남는다
그 발자국 따라
좁고 어두운 길을 따라 나는 여기까지 왔다
세상의 발밑이지만 허리를 꺾지 않는 까닭은
굽지 않고 나를 적중하는 햇화살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푸른 울음 끝에
나의 몸은 아주 작게 균열되었다
알을 슬기 위하여 수 천리를 날아가는 노랑나비
한 마리가 수 만 마리로 깨어지는 꿈을
긴 편지를 쓰기에는 봄이 너무 짧다
 
 
 
 
 
 

 
긴 편지

 
 
 나호열
 
 
   風磬을 걸었습니다 눈물이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거든요 너무 높이 매달아도 너무 낮게 내려놓아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우두커니 오래 있다가 이윽고 아주 오랜 해후처럼 부둥켜 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와르르 눈물이 깨질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씨앗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날마다 어디론가 향하는 손금 속으로 사라지는 짧은 그림자 말 이지요 너무 서두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솟아올라 고이는 샘물처럼 풍경도 슬픔을 제 안에 채워두어야겠지요 바람을 알아버린 탓이겠지요
 
 
 


저녁 부석사


나호열


무량수전 지붕부터 어둠이 내려앉아
안양루 아랫도리까지 적셔질 때까지만 생각하자
참고 참았다가 끝내 웅얼거리며 돌아서버린
첫사랑 고백 같은 저 종소리가
도솔천으로 올라갈 때까지만 생각하자
어지러이 휘어 돌던 길들 불러 모아
노을 비단 한 필로 감아올리는 그때까지만 생각하자
아, 이제 어디로 가지?




 
 
 
 

천국에 관한 비망록 

  -42.195km
 
나호열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옥을 통과해야만 한다
비록 이 길이 지옥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이 길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태어난 곳으로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이 길이 죽음으로 완성되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너무 짧거나 아니면 너무 긴 이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
진다
동전 떨어지듯 상쾌한 햇빛을 밟으며
헤엄쳐 가거나 날아가거나
짙어지는 안개 속을 해쳐 나가기 위해서는
차라리 눈감고 뛰어가리라
지옥은 아름답다 그리고 풍요롭다
고통의 신음과 환희의 웃음소리가
꿀물처럼 갈증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사람아, 이윽고 내가 너에게 닿을 때
풀린 다리와 가쁜 숨과 땀내 가득한 한마디 말로
굳게 닫힌 천국의 문이 열리리라
기다림으로 황폐해진 정원, 그 가슴팍에
한 톨의 검은 씨앗으로 너의 가슴에 깊이 파묻히련다
산도 넘다 보면 강이 되더라
흘러가다 보면 강도 산이 되더라

 
 

 
 
 
 
 
 책소개 

   50여 년 시인 인생의 결실, 나호열 시인의 시선집 출간!글을 쓰기 시작한 지 50여 년, 이제 고희에 이르러 그동안 펴낸 20여 권의 시집에서 시 213편을 골라 시선집을 엮었다.이번 시선집 《울타리가 없는 집》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에는 첫 시집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부터 《당신에게 말 걸기》(2007)까지 중 109편을 추렸고, 2부는 《타인의 슬픔》(2008)부터 《안부》(2021)까지 중 104편을 골랐다. 3부는 지금까지 나온 시집에 수록된 해설을 실었다.1부의 해설을 쓴 정병근 시인은 나호열 시인의 시에 흐르는 주요 정서를 ‘고독과 슬픔’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고독은 배제와 소외에서 비롯된 실존적 감정이고, 슬픔 혹은 쓸쓸함은 모든 시의 바탕을 이루는 배경음과도 같다. 시를 쓸 때 시인은 고행을 마다않는 고독한 구도자와 같은 역할을 스스로 떠맡음으로써 시의 숭고한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유한한 세계에서, 고독과 슬픔은 사회적인 연대에서 얻는 기쁨보다 더 근원적이며 세상의 아픔을 서슴없이 껴안고 그 껴안음에 기꺼이 깃들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시는 혼자 쓸쓸하게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차이성과 분열성을 옹호하는 모더니즘보다는 과거를 성찰하고 융합하는 동일성의 세계관이 더 가깝게 작동하며, 사회적인 기여보다 개별자의 삶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세계관은 그의 대표 시라고 할 만한 〈북〉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비장함마저 드는 이 시는 고독이나 슬픔이 단지 감정의 낭비가 아니라 얼마나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북은 소리친다속을 가득 비우고서가슴을 친다한마디 말밖에 배우지 않았다한마디 말로도 가슴이벅차다그 한마디 말을 배우려고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말을 건다한마디 말로평생을 노래한다하지만 시인은 고독과 슬픔의 세계에만 갇혀 있지 않는다. 그는 〈백지〉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노래한다.백지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백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네가 외로워서 술을 마실 때나는 외로움에 취한다백지에 떨어지는 눈물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숨어 있다숲과 짐승들의 발자국눈 내리던 하늘과 건너지 못하는강이 흐른다네가 외로워하는 것은 그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만네 옆에 내가 갈 수 없음이 외로움이다그러므로 나는 숲에다 편지를 쓴다길에다 하염없는 발자국에다 편지를 쓴다백지에는 아무것도 없다눈만 내려 쌓인다시인은 이 시에서 ‘외로움’의 원인과 속성을 ‘백지’라는 상징물을 빌려 역설적인 화법으로 표현하면서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려는 마음을 내비친다. 드디어 시인은 ‘숲’에다 ‘발자국’에다 편지를 쓴다. 편지는 소통의 수단이 아니던가! 대화와 소통이 시작될 때 정말 아름다운 시가 탄생한다.당신에게 말 걸기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화난 꽃도 없다향기는 향기대로모양새는 모양새대로다, 이쁜 꽃허리 굽히고무릎도 꿇고흙 속에 마음을 묻은다, 이쁜 꽃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네게로 다가간다당신은 참, 예쁜 꽃시인의 시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시이기도 한 〈당신에게 말 걸기〉는 시인의 세상에 대한 시선이 얼마나 따뜻한가를 잘 보여준다.못난 꽃이 어디 있겠는가. 꽃은 가장 아름다운 환대의 형색으로 우리의 눈을 붙잡는다. 빛을 타고 나타나는 모든 만물이 꽃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이 세상은 저마다 꽃을 피우고 살아가는 대동 세상인 것이다. 이 시를 보면 한쪽에 외따로 떨어져서 피어 있는 작은 꽃에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듯하다. 꽃은 자기가 예쁜 줄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은 그런 꽃에게 말을 걸며 “당신은 참, 예쁜 꽃”이라고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아준다. 여기에서 ‘당신’은 늙은 사람이거나 소외된 이웃 또는 배우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빠짐없이 보살피는 천수천안의 그것과도 같은 사랑을 보인다. 이것이 시의 사명이고 시인의 숭고함이다.나호열 시인의 시는 스스로 고독자의 길을 걸으며 염결한 슬픔으로 세상의 아픈 부분을 짚어내고 그곳에서 초월의 희망을 길어 올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호열 시인

(羅皓㤠): 본향은 충남 서천, 피난지인 부산에서 태어났다. 은행원이던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다 여섯 살에 서울 정릉에 정착했다. 경동고등학교, 건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괴정을 마쳤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우울한 청소년기를 지나며 실존주의 철학에 매료되어 철학을 전공으로 삼았다. 연극과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으나, 우연히 대학신문에 꽁트를 게재하면서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울림시 동인(1980)으로 《우리 함께 사는 사람들》 1, 2, 3집에 작품을 발표했으며, 《월간문학》(1986)과 《시와 시학》(1991)으로 등단했다. (사)한국예총 정책연구위원장 겸 월간 《예술세계》 편집주간, (사)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역문화위원으로 문화예술정책분야에서 활동했다. 현재 도봉문화원 부설 도봉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첫 시집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이후 《눈물이 시킨 일》(2011), 《촉도》(2015),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2017), 《안녕, 베이비 박스》(2019), 전자 시집 《예뻐서 슬픈》(2019) 등을 상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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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가 없는 집

글을 쓰기 시작한 지 50여 년, 이제 고희에 이르러 그동안 펴낸 20여 권의 시집에서 시 213편을 골라 시선집을 엮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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