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野 2023. 1. 30. 17:52

홍옥의 안쪽​

​   김지민


트럭이 떨어뜨리고 간
붉은 홍옥 한 알로부터

한 시절이 통째로 굴러오기도 해요.

내 발치에 멈추어 선 홍옥은 붉고 생뚱맞았죠. 이제 막 이젤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홍옥이었어요. 누군가 아침마다 붉게 덧칠한 듯한 홍옥이었어요. 저를 데려가 달라고 말하는 듯한 홍옥이었어요. 그대로 두면 산산이 부서질 게 분명한

홍옥을 두고 돌아섰어요.

우리는 이제 집마다 하나씩 있는 이상한 친척이 되어 창가를 서성이죠. 밤마다 털이 부드러운 짐승을 쓰다듬으며 잠이 들고 해가 뜨면 두고 온 맹세들이 부끄러웠죠. 우리 각자의 둥지 안으로 해마다 쌓이는 노랗고 붉은 낙엽, 그 낙엽을 우려 차를 마셨죠. 떨떠름한 뒷맛을 곱씹으며 당신은 종종 웃는가요?

두고 온 홍옥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고 있어요.

홍옥은 붉은 배경이 되어 외따로 떨어진 우리의 옆얼굴을 물들여요. 밤이 우리를 놓쳐서 우리는 자꾸만 구르고 매일 아침 낯선 천장 아래 머리를 부여잡으며 깨어났죠. 거울에 붉고 생뚱맞은 얼굴을 비춰보다가 남몰래 웃기도 해요. 뒤늦게 이해되는 농담의 형식으로 우리는 서로의 발치로 굴러가고

자꾸만 붉어지는 홍옥이었어요.
들여다볼수록 윤이 나는 홍옥이었어요.

한때 우리는 기꺼이 베어 물었죠. 턱을 따라 흐르는 과즙을 훔치며 지나온 밤들이 홍옥 더미처럼 한가득 쌓여 있어요. 우리가 찾던 밤은 여느 밤 속에 고요히 묻혀 있고

산산이 부서진 홍옥을 새들이 쪼아 먹고 있어요.

새들은 홍옥의 한 조각을 훔쳐 뿔뿔이 날아가고
홍옥의 안쪽은 과연 눈부셔요.


             ―월간 《현대시》 202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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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민 / 1996년 경기 부천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2020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 시 당선.


출처  /  푸른시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