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울금 외 2편 / 안차애
丹野
2022. 5. 23. 22:30
울금(외 2편) 안차애 키 큰 작물이라고 생각했던가 딱딱한 과채라 생각했을까 파초와 칸나 중간쯤 되는 울금잎 보고 놀랐네 시월 하순에도 밭둑 가득 차오른 푸른 잎사귀 너무 넓고 겁먹은 표정 앎 직하지만 모르는 이름 조금 예쁘고 조금 서럽기도 한 이름 늦가을에 피운 꽃송이가 부끄럽다는 듯 늘어뜨린 잎 속에 엉거주춤 꽃을 감추고 있는 울금 나는 부모님이 시골의 백모에게 몇 년간 대리 양육을 부탁한 아이 친딸이 아니어서 백모는 늘 예삐라 불렀지 예쁘지 않아도 한사코 예쁘다고 불러 주는 이름처럼 내놓고 울지도 못하는 울먹 파랗게 질린 게 아니라고 처음의 색깔과 지문을 꼭 쥐고 있지 금 간 시간을 깨물고 있지 아직 처음의 궁음도 열지 못한 얼굴 꼭 깨문 각음도 닫지 못한 몸짓 이제 그만 쏟아져도 괜찮아 가을은 슬프고 아픈 엄마 꼭 꼬집어 우릴 붉게 울려주지 딸꾹질로 울음을 참고 있는 표정 지레 입술부터 깨무는 버릇 착한 얼굴을 터뜨려 쩌렁쩌렁 울어 보렴 예쁜 이름 밀어서 마음껏 사지를 버둥거리렴 * 오음 :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사랑스러운 당신의 이마 —모비딕풍으로 인상학도 한때의 우화일 뿐 굴곡진 이목구비에 기댈 수는 없다 얼굴이 흐린 벽으로 남을 때 이마는 묵묵히 깊어지는 상형象形이다 이맛전에 물결과 바람을 풀어놓는 사이 고래는 부력의 방향으로 떠오르고, 수부들의 이마에 주름살 몇 개 새겨지듯 해류가 서로 엉기다 외눈박이 허리케인을 일으키듯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득이고 몇 철이 동시에 어른거리는 것은 다만 고래의 이맛전에서 일어난 일 가장 먼 봄이 이슥도록 머물다 간다 쓰지 못할 문장들이 사이렌의 노랫소리보다 독하다 시간은 내내 역류 중이었던가 수면 위 양피지의 행간이 손금처럼 환하다 당신의 수심이 깊어질 때 표정 바깥이 표정으로 그만 갸웃해질 때 흰 두루마리의 오랜 헌사가 있다 초록을 엄마라고 부를 때 초록 초록한 것들을 보면 엄마라고 부르고 싶다 초록은 뜯어 먹고 싶고 초록은 부비부비 입 맞추고 싶고 초록은 바람과 그늘을 불러 모으고, 슈펭글러(Oswald Spengler)는 초록을 가톨릭의 색이라고 했으니, 마리아 엄마,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다시 발을 씻어 주세요 초록은 도착하자마자 휘발하기 시작하고 어느새 모르는 색상표가 나를 둘러싼다 어떤 색을 흐느꼈던 감각은 남고 지문은 사라졌으니 초록의 냄새 초록의 데시벨 초록의, 젖가슴을 찾아 주세요 물색이 번지면 뒷걸음질 치는 초록의 불안 기억이 오류를 견디듯 본색은 제 무게가 힘에 겨웠을까 다가가면 벌써 흐려지거나 독해지는 초록이라는 기호 묽어지는 색처럼 증발하는 중인가요, 마리아 바닥이 없는 아래로 떨어지는 중인가요 초록이 빠진 것뿐인데 모든 색들이 무너지고 있잖아 초록이 빠진 구멍이 엄마, 엄마 부르며 나를 쫓아오고 있잖아 감춘 입들을 쏟아내며, 내내 ⸺시집 『초록을 엄마라고 부를 때』 2022년 4월 --------------------- 안차애 / 200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어교육 전공. 시집 『불꽃나무 한 그루』 『치명적 그늘』 『초록을 엄마라고 부를 때』, 교육 도서 『시인 되는 11가지 놀이』 등. |
출처 / 푸른시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