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나팔꽃 / 박수현
丹野
2022. 1. 14. 22:30
나팔꽃
박수현
당신의 손목은 무사한지요
보드랍게 깍지 끼어 건네던 손길이 어디로 가나요
지난여름 여리고 따듯한 우주의 새끼들을
슬하에 풀어 기르던
그 푸성귀처럼 푸른 힘 이제 어디로 가나요
당신의 슬하에 고요가 깊어지고 있어요
저것 좀 보세요 온통 하얀 중환자실
손등의 힘줄에도 당신의 덩굴손들이
있는 힘을 다해 기어 오르네요
막무가내로 기어 오르네요
당신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어요
당신은 이제 말문을 닫았는데
조곤조곤 당신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이 가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당신의 손목을 덩굴손처럼 부여잡아요
당신에게 안부를 전하려면
나는 저 작고 까만 씨앗들을 얼마나 모아야 할까요
얼마나 높이 허공의 사다리를 디디고 올라
씨앗들을 뿌려야 꽃의
새끼들이 먹먹하게 피어 오를까요
⸺계간 《시와 편견》 2021년 겨울호
박수현 /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과 졸업. 2003년 《시안》 등단. 시집 『운문호붕어찜』 『복사뼈를 만지다』 『샌드 페인팅』.
출처 ㅡ 푸른시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