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野 2021. 7. 27. 10:22

⸻어떤 집

 

   윤이산

 

 

 

집은 산비탈에 겨우 얹혀 있었다

 

오래 비워둔 집인데 괜찮겠냐며

주인은 내부를 보여주었다

입성이 허름했다

 

나는 그믐이 되면 떠나겠다고 했다

 

저만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집

낯선 사람과의 첫 대면처럼 서름서름했지만

더듬더듬 컴컴한 안으로 들어서니

오래 묵은 나무 냄새가 좋았다

 

짐을 내려놓고 목장갑을 끼고

아궁이에 군불부터 지폈다

먼지를 털고 걸레질을 하고

밥을 안치고 주전자에 둥글레를 끓이는 동안

달빛이 툇마루 안쪽까지 밀물져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집에 편입되는 것도 같았다

 

맞은편에 수저 한 벌을 더 놓고

허출한 듯 저녁을 먹고

앉은자리 객수(客愁)를 베고 누웠다

 

달빛이 몸 안으로 들이차는 소리를 들으며

돌아갈 길을 생각했다

 

이 집에서 한 일이라곤

쓸고 닦고 밥과 차를 끓이고

이따금 언덕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일

 

마치 그 일을 하러 온 사람처럼

 

그러는 동안 집은 조금씩 온화해지고

달빛은 점점 짧아져 갔다

 

한사리가 드높아지는 때

 

목장갑을 빨아 널어두고

옷 한 벌 벗듯 집을 빠져나오는데

정든 어떤 사람을 두고 떠나는 것 같았다

아니, 내가 나에게 손 흔들고 서있는 것 같았다

 

생시처럼 환했다

 

나는 돌아가는 중이었다

달이 빛을 다 비우는 동안 집 한 채를 쓸고 닦다

바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사는 동안 세 든 집 한 채를 쓸고 닦다 돌아가는 것이

한평생의 일이라 들은 것도 같은데

 

꿈이 끝나는 길에

 

삐끗, 문을 열어 둔 집 한 채가

저기, 저어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입성이 허름한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꿈처럼 아득했다

 

얼핏, 시계를 보니

바늘이 미생전(未生前)에 멈춰 있었다

 

 

            ⸺계간 《실천문학》 2021년 여름호

-----------------

윤이산 / 1961년 경북 경주 출생. 2009년 〈영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물소리를 쬐다』.

 

출처 /푸른 시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