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나호열 시집 『안녕, 베이비 박스』

丹野 2019. 11. 17. 17:33




나호열 시집 『안녕, 베이비 박스』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시집『안녕, 베이비 박스』 시로여는 세상 기획시선015






나호열 시집- 『안녕, 베이비 박스』

《시로여는세상》기획시선 15권. 나호열 시인의 시집『안녕, 베이비 박스』가 발간되었다. 나호열 시인은 충남 서천출생으로 1986년《월간문학》과 1991년 《시와시학》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현재 도봉문화원 도봉학 연구소장, 한국탁본자료관 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호열 시인의 이번 시집의 시들은 시간과 이 시간 속에서 더욱 간절해지는 인간의 욕망의 관계를 생각하게 해 준다. 그의 시들을 읽으며 그의 언어가 다시 불러내는 시간 속의 여행이라고 황정산 시인은 말한다.


추천사

시간은 사이를 메꾸는 질료이다.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 또한 관여한다. 사이를 좁히고 관계를 긴밀히 한다는 것은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간을 공유하지 못할 때 같은 한 존재라 하더라도 분리되어 또 다른 존재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간의 거리는 인간의 능력의 발전과 노력으로 좁힐 수 있지만 시간의 거리는 현실적으로 좁히기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존재와 존재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이야말로 어떤 존재의 의미와 다른 존재와의 차별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나호열 시인은 바로 이 다른 시간들의 차이와 그 시간의 간격을 사유하는 것을 통해 그의 시에 고유한 미학을 만들어 내고 있다. - 황정산 해설 「시간에 대한 사유와 사이의 미학」중에서






시인의 말


나에게 시는 세상으로 날아가는 파랑새였지만 결국은 때 묻고 허물만 남아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돌팔매였다. 순간순간 내게 달려들던 괴물의 정체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 시詩와 인人의 불화를 또 부끄럽게 내놓는다.


2019년 가을,
울타리가 없는 집에서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숲으로 가는 길 | 에필로그 | 만항재에서 파랑새를 만나다 | 몽유 | 꽃처럼 | 벚꽃엔딩 | 오월의 편지 | 내가 뭐라고 | 함박꽃 | 감자꽃 | 포스트잇 | 영웅을 기다리다 | 긴 편지 2 | 겨울우화 | 꿈길 | 눈길 | 예뻐서 슬픈 | 동백 후기 | 십이월


제2부

목발 1 | 목발 2 | 목발 3 | 목발 4 | 목발 5 | 목발 6 | 목발 7 | 목발 8 | 목발 9 | 목발 10 | 목발 11 - 나들이 | 목발 12 - 내가 새가 된 이유 | 목발 13 - 상강 지나며 | 목발 14 - 어느 날의 하프 | 목발 15 - 뼈의 말 | 목발 16 - 대학 강의 | 목발 17 - 바람의 무게 | 인생

제3부

물끄러미 | 의자 4 |바람의 언덕 |상원사 적멸보궁 | 잊다와 잃다 사이 | 수화의 밤 | 칼과 자 | 바람 센 날 | 동문서답 | 뾰족하다 | 커피 | 바람과 놀다 | 천수관음 | 옆집 | 빈 집 | 다섯 살 아이

제4부

늦기 전에 | 구둔역에서 | 어느 장례식 |너무 많은 |드라마에 빠지다 | 산 의자
등 | 누구시더라 |손 | 그믐달 약관 | 가난한 연보 | I -It | 메리 | 골드 스타 | 페넬로페 카페 | 숯| 개소리 |준에 대한 오해 | 안녕, 베이비 박스

해설|시간에 대한 사유와 사이의 미학_황정산






<시집 속의 시>

에필로그



마지막 숨을 거두며
어린 병사가 부른 어머니
꽃들이 필 때
나는 그 소리를 듣는다

열목어가 수백 리 물길을 온몸으로 더듬으며
절망보다 더 높은 폭포를 거슬러 올라
거친 숨을 산란할 때
아득한 절벽 둥지에서
태어나자마자 비오리 어린 새끼가
처음이자 마지막 투신을 마다하지 않을 때
폭죽이 되어 떨어지는 꽃비

저 거센 물살과 수직의 허공에
수를 놓듯 펼쳐진
봄날이 이룩한 장엄한 에필로그
외로워서 걷는 길의
한 장면이다





함박꽃



아침에 아내는 국수를 삶았다
이가 아픈 남편은 아무 말 안 했다
후루룩 국수 가락이 목으로 넘어가는데
손가락에 관절염이 온 아내는
연신 헛가락질을 하고 있을 때
남편은 속으로 많이 늙었네
목구멍이 간질거릴 때
늙은 아내가 활짝 꽃 피었다
함박꽃이 웃었다

많이 늙었네




의자 4


사람은 의자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는지 모른다 사람이 사람이라 불려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기꺼이 제 몸을 내어줄 때 일 것이다 의자는 오랜 시간 홀로의 시간을 견디고 자신에게 아무런 고마움을 느끼지 않고 잠시 고단한 발걸음을 멈춘 이들이나 다른 일을 하기 위하여 하인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미련 없이 떠나는 그때까지 묵묵하게 무게를 견딜 뿐이다 세월이 흐르면 의자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허물어 쓰레기가 되어 산화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마땅히 의자가 되어야 한다 나를 닮은 어떤 일들에 필요한 노역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안녕, 베이비 박스



안녕
이제 떠나려 해
혹한과 눈폭풍 속에서도
서로의 황제가 되었던
짧은 며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부화를 꿈꾸는 돌을 닮은 생명
난 뒤돌아보지 않아
이제 저 푸르고 깊은 바다로 갈꺼야
나의 몸부림이
멋진 자맥질이라고 오해하지는 마
봄이 오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다시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뒤돌아보지 않으려 해
너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으려 해
부디 짧은 추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금 너무 느리게 걸어가고 있을 뿐

나의 베이비 박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