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김정임 시집 『마사의 침묵』

丹野 2019. 7. 26. 17:35





김정임 시집 마사의 침묵』, 지성의 상상 시인선 013 




시인의 말

 

   누군가 숲의 침묵을 소리 나는 곳이라 불렀다. 나를

돌아보게 하고 쓰게 하는,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었나.

목적 없는 문장처럼 미끄러지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만나게 되는 먼 숲의 빛과 어둠, 그러나 다시 영원과도

같은 한순간을 놓치고 만다

 

   

                                                     2019년 여름

                                                             김정임

 

 

 

 

마사의 침묵

 

김정임

 

 

마사는 백년 전 멸종된 나그네비둘기의 암컷

박물관에서 긴 잠 자네

 

새 떼가 블루베리 숲을 지날 때면

얇은 새 가슴살이 먹고 싶은 사람들이

총을 겨누며 기다렸다는데

나그네비둘기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네

 

고압 전선에 앉아 있는 산비둘기

사라지지 않기 위해 두 발을 구름에 묶나

곧 녹아내릴 구름인데

날개를 접어 다시 숨을 고르나

 

그리워라, 참을 수 없는 블루베리 맛

수북이 쌓인 먼지를 떨며 마사가 언덕을 오르네

 

블루베리 숲에서 사랑하고

그 사랑 잃어버리고

믿었던 일들이 모두 새어나간 둥지에서

 

당신의 고독을 위해 가슴살을 떼어 줄까

 

그 숲에 가면 가슴 없는 새들이 둘러앉아 있을까

각자의 가슴에 얼굴을 숨기고

 

아주 멀리 떨어진 곳 위로가 닿지 않는 곳으로

마사는 날아갔을까

 

 

    




 

소리 나는 곳

 

김정임

    

 

 

   먼 숲에서 돋아나는 네네 잎사귀 번식기 동물들이 숲

을 달구는 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숨 막히는 향수에 끌린다 혹

동고래의 울음은 세기 이전부터 있어온 연가 대기는 팽

팽해지고 침묵이 둥지를 튼다

 

   수컷 두꺼비와 꽃무니 침을 벼린 모기의 춤으로 감각

적이 되는 숲 그 위로 또 다른 침묵이 달려든다

 

   요정들이 귀를 활짝 열어 한 방울씩 떨어뜨린 나무의

전언을 듣는 때

 

   누군가 숲의 침묵을 소리 나는 곳이라 불렀다

 

   다가섰다 물러서며 동그랗게 입술을 모으는 소리 우

리가 듣지 못하는 이유는 요정들이 네네 잎사귀를 거둬

들였던 것*

 

   대왕자고새가 공중에서 원을 그리다 멀어지고 둘러보

면 숲의 한낮, 지금은 모기처럼 두꺼비처럼 다정한 입김

을 나누어 마시며 침묵이 새잎을 피우는 때

 

   멀어지는 사이 가까워지고 이름 짓기 이전의 소리가

내내 잎사귀에 내린다

 

 

 

*감각의 박물학

 

 

 

 

        

 

모감주나무 이야기

 

김정임

    


 

   당신 가슴의 잎들이 속잎을 벗겨내는 밤이다

 

   쐐기풀을 뜯어 옷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같이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더는 가지 못하고

 

   언제부턴가 몸 안에서 새가 울었다

 

   가슴에 꽉 찬 물소리에서 붉은빛이 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별처럼 지난 이야기가 어떤 고백

을 끝낸다

 

   처음부터 없었던 생이라고 백지에 쓰면 사물들은 가

벼워지는데 군대군데 구멍 난 당신의 못자국을 통해 일

요일의 해가 뜬다

 

   곧 떠날 나라의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새

 

   떨어뜨려야 할 것들이 많아 서 있는 바람들

  모든 일은 한결같이 일어났지만

 

   당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다만 기다릴 뿐

 

   금요일 저녁가지 서 있어야 할까

 

   찬바람 사이 모감주나무가 흔들리고, 어딘가에서 당

신은 오고 있다

   나는 캄캄해지고 환해지고

 

 

    


 

 

감자 깎는 저녁

 

김정임

 

 

  도라지꽃 바다에서 가슴이 내려앉던 그날이 있었다  


  어디선가 수도원 종소리가 들렸던가

  그날은 달의 서식지가 되었을까  


  수백 년이 흐른 것 같다  


  나는 여전히 감자를 깎으며 서쪽 창으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것은 아니었는데, 실족하듯 떨어지는 감자의 눈  


  그날을 향해 눈을 뜨면 그날의 파도가 밀려온다


  너였을까, 나였을까  


  일기를 쓰다 불려나온 저녁처럼


  감자를 양손에 들고

  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으면서  


  중세의 창가


  수백 개 종이 한꺼번에 울리던 날들을 나란히 바라본 것 같았는데  


   어디에서부터 멀어진 걸까

  문득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지만  


  이젠 중세를 향해 내려가지 않을래


  날아다니다 어두워지면 너를 지나갈래  


  한 줄 문장처럼 감자의 눈이 나를 떠다닌다  


 


      

 

김정임 시인

 

대구출생

2002미네르바,등단.

200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붉은사슴동굴등이 있음.

미네르바작품상. 서정주문학상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