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임 시집 『마사의 침묵』
김정임 시집 『마사의 침묵』, 지성의 상상 시인선 013
시인의 말
누군가 숲의 침묵을 ‘소리 나는 곳’이라 불렀다. 나를
돌아보게 하고 쓰게 하는,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었나.
목적 없는 문장처럼 미끄러지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만나게 되는 먼 숲의 빛과 어둠, 그러나 다시 영원과도
같은 한순간을 놓치고 만다
2019년 여름
김정임
마사의 침묵
김정임
마사는 백년 전 멸종된 나그네비둘기의 암컷
박물관에서 긴 잠 자네
새 떼가 블루베리 숲을 지날 때면
얇은 새 가슴살이 먹고 싶은 사람들이
총을 겨누며 기다렸다는데
나그네비둘기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네
고압 전선에 앉아 있는 산비둘기
사라지지 않기 위해 두 발을 구름에 묶나
곧 녹아내릴 구름인데
날개를 접어 다시 숨을 고르나
그리워라, 참을 수 없는 블루베리 맛
수북이 쌓인 먼지를 떨며 마사가 언덕을 오르네
블루베리 숲에서 사랑하고
그 사랑 잃어버리고
믿었던 일들이 모두 새어나간 둥지에서
당신의 고독을 위해 가슴살을 떼어 줄까
그 숲에 가면 가슴 없는 새들이 둘러앉아 있을까
각자의 가슴에 얼굴을 숨기고
아주 멀리 떨어진 곳 위로가 닿지 않는 곳으로
마사는 날아갔을까
소리 나는 곳
김정임
먼 숲에서 돋아나는 네네 잎사귀 번식기 동물들이 숲
을 달구는 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숨 막히는 향수에 끌린다 혹
동고래의 울음은 세기 이전부터 있어온 연가 대기는 팽
팽해지고 침묵이 둥지를 튼다
수컷 두꺼비와 꽃무니 침을 벼린 모기의 춤으로 감각
적이 되는 숲 그 위로 또 다른 침묵이 달려든다
요정들이 귀를 활짝 열어 한 방울씩 떨어뜨린 나무의
전언을 듣는 때
누군가 숲의 침묵을 ‘소리 나는 곳’이라 불렀다
다가섰다 물러서며 동그랗게 입술을 모으는 소리 우
리가 듣지 못하는 이유는 요정들이 네네 잎사귀를 거둬
들였던 것*
대왕자고새가 공중에서 원을 그리다 멀어지고 둘러보
면 숲의 한낮, 지금은 모기처럼 두꺼비처럼 다정한 입김
을 나누어 마시며 침묵이 새잎을 피우는 때
멀어지는 사이 가까워지고 이름 짓기 이전의 소리가
내내 잎사귀에 내린다
*『감각의 박물학』
모감주나무 이야기
김정임
당신 가슴의 잎들이 속잎을 벗겨내는 밤이다
쐐기풀을 뜯어 옷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같이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더는 가지 못하고
언제부턴가 몸 안에서 새가 울었다
가슴에 꽉 찬 물소리에서 붉은빛이 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별처럼 지난 이야기가 어떤 고백
을 끝낸다
처음부터 없었던 생이라고 백지에 쓰면 사물들은 가
벼워지는데 군대군데 구멍 난 당신의 못자국을 통해 일
요일의 해가 뜬다
곧 떠날 나라의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새
떨어뜨려야 할 것들이 많아 서 있는 바람들
모든 일은 한결같이 일어났지만
당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다만 기다릴 뿐
금요일 저녁가지 서 있어야 할까
찬바람 사이 모감주나무가 흔들리고, 어딘가에서 당
신은 오고 있다
나는 캄캄해지고 환해지고
감자 깎는 저녁
김정임
도라지꽃 바다에서 가슴이 내려앉던 그날이 있었다
어디선가 수도원 종소리가 들렸던가
그날은 달의 서식지가 되었을까
너였을까, 나였을까
감자를 양손에 들고
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으면서
수백 개 종이 한꺼번에 울리던 날들을 나란히 바라본 것 같았는데
어디에서부터 멀어진 걸까
문득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지만
날아다니다 어두워지면 너를 지나갈래
김정임 시인
대구출생
2002년 『미네르바』,등단.
200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붉은사슴동굴』 등이 있음.
미네르바작품상. 서정주문학상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