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소시집> 모란문 찻사발과 바다 외 4편 / 김경성
<신작소시집>
모란문 찻사발과 바다 외 4편 / 김경성
모란문 찻사발과 바다
김경성
속성을 잃어버린 것들도 긴 시간 끝으로 가서 보면 처음의 마음이 남아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입술의 지문은 지워지고
밀물과 썰물의 주름을 타며
인도차이나반도 눈썹 끝에 올라가 있다
뿌리가 없는 그는 바닷속에 노숙할 집을 지으며
가끔 바다의 등지느러미에 올라가서 별이 되고 싶었으나
바닷속 둥근달로 떠 있다
찻잎을 담고 차향을 머금었던 몸으로 따개비를 끌어안았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일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날아가는 새들의 부리만큼이나
단호하게 닿을 수 없는 뜨거움이었다
모란꽃에 붙은 따개비의 가계는 꽃잎 번지듯 천천히 몸을 불려 가고
닻을 내린 목선木船의 휘어진 선미에도 오를 수 없는 아득함
그 누구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오직 우물 같은 몸 안에 바다를 담아놓고
수평선의 본선이 되고 싶을 뿐
찻사발 모란꽃에서 날갯짓하는 나비 위에
휘어진 실금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검정말
김경성
갈기가 흔들릴 때마다 약속처럼
나도 흔들린다
물 밖은 위험해
솟구쳐 오르는 욕망을 물방울 하나로 누르며
멀리 나가고 싶은 마음마저 내려놓고
멈춤이 아니라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갈기를 키우는 말은 암막 커튼을 걷어내고
발굽 아래로 흘러가는 길의 지류를 이마에 붙이는 일이라고
생이가래, 붕어마름, 올챙이솔, 쇠뜨기말, 솔잎가래, 물수세미 ……
그 사이에서 떼로 자라는 검정말은 달리는 말馬이 되었다가
물속 말이 되었다가
토슈즈를 신은 왕버드나무도
치마를 한껏 펼치고는 호수 속으로 뛰어 들어가
검은 말을 타기도 하고 검은 물풀이 되기도 하는
가을 한낮
당신은 안녕하신가
안부를 묻는 듯
물고기 떼를 품고 있는 검정말의 갈기가 흔들린다
붉은 방에 번지는 무늬
김경성
겹 창문 위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잘라낸다
구부러지지 않고 직선으로 뻗어가는 선은
지워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고
문을 뜯어내고
창문에 눈目을 얹으니
한 사람이 빛 속에 서 있다
처음부터 그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양이 울음을 문틈으로 밀어 넣을 때
눈먼 그림자만이 온갖 색을 지우며
점점 먹빛을 덧칠해가고
어떤 말에도 닿을 수 없어 본문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골목을 빠져나가는 바람보다 더 빠르게 잊히는 이방인이 되어
낡은 책 표지만 되새김질하는
누구라도 들어와서 내밀한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온몸을 구부려서 둥근 방을 만들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무엇이 될 수 없는 막막함이라니
한꺼번에 무너지는 토성土城이 되어
상처가 상처를 핥아주는 밤
붉은 방에 번지는 주술사의 말들
잠망경
김경성
단단한 몸을 풀어내는 부들의 가계가 구름의 족속 같다
어쩌면 비단실 같기도 한
저 흰 실 꾸러미
부풀어질 대로 부풀어져서 옅은 숨의 색을 섞어가며
고요를 짜서 제 무늬를 짓는
지난여름 피워 올린 연꽃의 습한 말들이
제 속에 우물을 파놓았는지 흑단 빛이고
물 밖으로 솟아있는 연밥 속 수많은 눈은
물 위에 떠 있는 새들을 바라본다
조금 멀리 있을 때 더 잘 보이는 것이라고
내가 알던 당신이 낯선 사람이 되어 나를 비켜 갈 때처럼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연밥 동굴 속에 적막을 묻어둔다
호수 밑바닥에 눈동자를 넣어두고
몸 뒤집는 연밥 잠망경에
부들의 깃털 씨앗이 구름새가 되어 앉아있다
잘 짜진 말들이 잠망경에서 발아하여
끝 간 데 없이 번진다
달이 녹는다
김경성
어둠을 만진 달이 녹는다
점점 묽어지다가 어느 순간 다 녹아서 사라진다
달의 즙이 온 세상에 젖어 들어 탱자나무 가시에도 고이고
숲 깊숙이 들어가서 나무를 휘감고 잎 잎마다 습자지 빛으로 본을 뜬다
달그림자가
미처 닦아내지 못한 나의 눈물을 어루만지며
한마디 말도 없이 방안에 고이는 것을 본 적 있다
오직 어둠 속에서만 일어나는 은밀한 위안
세상의 행간을 연결하는 전봇대의 서늘한 빛마저도 묽게 만들며
잘 벼린 어느 은장도 칼집 속으로 스며들려는지
한여름이면 부풀기도 전에 녹아드는 날이 많아졌다
밤이 지나고 흠뻑 젖어있는 새벽이 오면
지상에서 다시 돋아 오르는 달의 씨앗,
제 몸속에 단단하게 뭉쳐두었던 즙을 꺼내
이름도 모르는 어느 은자隱者의 눈 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느리게 차오른다
김경성
전북 고창 출생. 2011년 《미네르바》 등단.
시집 『와온』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가 있음.
<시작노트>
꽈리가 익어갈 때 / 김경성
꽈리 나무가 하루 동안 내려놓는 그림자를 읽으며 가을이 지나갔다.
꽃이 지고 연두 빛 열매가 열린 후, 주황에서 빨강으로 건너갈 때까지 온통 설렘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손끝에 걸리는 꽈리의 빨강, 아이들은 꽈리의 속내를 알지 못한 체 껍데기 속의 빨강만을 생각하며 소꿉놀이를 하고 버렸다.
꽈리 나무가 내 것 인양 날마다 서성거렸지만, 꽈리가 익어갈 때 아이들의 손끝도 여물어가서 하나 둘 알맹이가 사라진 꽈리 껍데기가 꽃처럼 떨어져 있었다. 빨갛게 익은 열매의 시큼한 씨를 빼낸 후 입안에 넣고 공기를 채웠다가 아랫입술과 윗니로 지그시 누르면 꽈아악 꽈악 소리가 나는 음률의 열매, 빈껍데기에서 나풀거리는 붉은 노래를 주워서 햇빛에 비추면 마치 한 세상이 그곳에 다 있다는 듯 또 다른 빛깔로 말을 걸어왔다. 빈껍데기를 주워 모아서 무명실로 엮어놓으니 다시 그대로 한 그루 꽈리 나무가 되었고, 꽈리 껍데기에서 꽈아악 꽈악… 일곱 살 내 입속에서 흘러나오던 노랫소리가 났다. 그 작은 빈껍데기가 불러내는 먼 기억 속의 따뜻한 시간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연꽃이 지고 난 저수지에는 수많은 연밥이 떠 있었다. 어떤 날에는 구름에 걸려있거나, 어떤 날에는 이파리 한 장 없는 나무에 걸려있기도 했다. 늦가을 철새들이 날아오기 시작한 저수지에 수많은 잠망경이 뜨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움직이면서 세상을 관망하는 연꽃의 은은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수지에 들어서면 내 생도 온통 물 위의 나날들인 듯 같은 눈으로 물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가 당신이 되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이 되어, 그 사소한 것들을
지그시 나지막하게 오래 바라본다는 것. 바라보며 함께 흘러간다는 것.
몸과 마음을 둥글게 말아서 세상을 둥글게 바라본다는 것.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바라보고 생각하고 기억해주는 일.
우리가 같은 강물에 두 번 몸 담글 수 없듯이 내 옆에서 함께 흘러가는 것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보낸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가고 또 가면 어느 순간 그도 나도 아닌 우리가 된다. 저수지에 떠 있는 연밥과 물속에서 자라는 검정말 생이가래, 붕어마름, 올챙이솔, 쇠뜨기말, 솔잎가래, 물수세미 ……수많은 당신의 따뜻한 말이 누군가의 가슴으로 들어가 위안이 되기를 소망한다.
- 계간 <<미네르바>> 2019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