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한영수 시집 『눈송이에 방을 들였다』

丹野 2018. 9. 8. 16:00

 

한영수 시집 『눈송이에 방을 들였다』 파란시선, 2018. 08. 20

 

 

시인의 말

 

누군가 웃어 정오였다

소소했으므로 계속 기억했다

기억 하니하나가 눈송이에 방을 들였다

칠월에 폭설이었다

 

 


눈송이에 방을 들였지

떠오르고

떠오르다 잠이 들었네

구석으로 구석을

업고 업힌 방

철없이 겨울이 내렸어

방은 어디에 있나

구름의 눈동자에 묻어난다

반달이 반을 읽고

새가 돌아본다

깊은 오후

깊은 숨이 숨는 방

수소폭탄 서른 개의 폭발 에너지를 가진 손이

하나로는 만들 수 없는 눈송이

눈송이에 방을 들였네

새끼손톱만 했네

주춧돌은 없었지

손톱으로 긁어 파낸 바닥은 있었지

일 년에 두 번 정도 울어도 좋은 방

바람은 계산하지 말자

손을 모았지

눈송이, 세계를 떠다닌다

봄 가지 어디에도 주저앉지 않고

 

 

 

 

어둠상자

 


조용을 다해 흔들어 본다

모서리에 귀를 대 본다

 

어둠은 이미

무엇이고

 

이마 위에 얹혀 있다

 

돌아눕다가

하품을 하다가, 와락

기침이 터져 나올 때도

 

만지작거린다

 

몇 개의 명사와 형용사, 동사가 지나간다

사실은, 지나가게 둔다

 

어둠의 눈동자에 머물러 있다

 

안에 안이 있다

안의 안이 또 있는

 

옆얼굴이 셋

목소리도 일곱 꿈틀거린다

 

 

 

분수

 

 

 

너를 바라볼 수 있게 가슴을 두고
꽃이 열리듯

 

발을 들어 올린다 허리 높이로
어깨 높이로 머리 위로
너를 부르는
최초의 높이로

 

조금만, 조금만 더 가까이
네가 있는 쪽으로

 

정점을 향해 가던 분수는 순간,
정지한다 온몸을 움직여

 

저를 저버린다

 

가지 않는 것 또한
가고 있는 것

 

비는 모를 거다
내리기만 하지
빗방울은 모를 거다
꼭 쥔 주먹은 매달릴 줄만 알지

 

그 하루 눈을 뜨고
솟구치며 쏟아져 내리는
눈물

 

완성하기 위해서
있어야 하는 중간

 

저를 독재하는 짐승의 포효
은하를 그린다
제때에 얼굴을 돌리는 것
분수는 아는 거다

 

 

 

 

 

한영수

 

전라북도 남원에서 출생했다.

2010년 <서정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케냐의 장미> <꽃의 좌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