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양소은 시집 『노랑부리물떼새가 지구 밖으로 난다』

丹野 2018. 7. 11. 23:25


 





노랑부리물떼새가 지구 밖으로 난다

 

 양소은


 

달나라에서 쑥을 캐는 여자가 있다 당초문에 이끌려 풀밭을 헤맨다 솜털이 하르르 눈을 겨우 뜨기도, 차가운 칼끝을 반짝, 손톱 밑 경계에 아르르 색이 돈다

 

밤이 되어도 눈을 감지 못한 쑥은 별들로 뜬다 입꼬리가 간지러운 별이 새처럼 쏟아진다 행성들이 우주 속으로 무늬 지고 여자의 아이들은 민들레처럼 노랗게 익어간다

 

반질, 봄이면 달이 언덕 위로 날아오르고 구름이 사선으로 흘러갈 때 쑥은 파랗게 운다 내 옆구리에서 노랑부리물떼새가 지구 밖으로 난다 태양을 돌고 있는 중이다

 

 






클림트의 꽃밭

 

   양소은

 

 

햇살이 닿는 곳마다 입술이 부푼다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그곳은 클림트의 황금 꽃밭

 

봄의 발걸음이

살짝, 노랗다

프리지아 향기가 나는 꿈속에서도

들키고 싶지 않아

 

입맞춤이 내려앉는 눈빛

창문만한 봄을 흔들어

너에게 가는 길

 

너는 나비로

타인의 심장을 따라

노란 발자국 서성인다

 

황금 꽃밭

느긋이, 떠돌아다니는

잠이 봄의 어깨 위를 날고 있다

 


구둔역*


양소은


언제부턴가 내 몸에서 기적 소리가 났다

검표원이 찍은 비둘기호처럼,

길 위에 서 있다 입도 귀도 없는 행인들 속 또 한밤이 지난다

가방 속 양은 도시락 덜컹덜컹

멀어진 그림자

창문으로 고개 돌린

당신 얼굴의 몇 번째 칸에 내가 있을까

어둔 불빛 속으로 내가 스쳐 지나간다

당신은 강을 건넌다 아침을 건너서 저녁을 돌아온 새들의 울음

나뭇잎들 쉼표 없이 객차에 오르고

나훈아 가슴 속이었을, 남진의 웃음소리거나 이미자의 한숨이었을

천 개의 발을 가진 시간표, 구름을 밀어내는 이정표,

풀은 침목 사이를 뚫고 자라

녹슨 철길이 지평역으로 휘어진다

차단기가 내려가고 목쉰 신호음을 따라

기차표는 황금티켓을 꿈꾼다

각기 다른 속력으로 떠나고 돌아왔을 사람들

오래된 타자기에서

액자에 담긴 역사들이 걸어 나온다

막다른 길이 뿌리를 깊게 내린다

나는 철로에 귀를 대고

단음절로 우는 청량리행 막차를 기다린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에 있는 폐역 된 간이역


시집노랑부리물떼새가 지구 밖으로 난다(2018. 4)에서

    




  양소은

1964년 전북 부안 출생. 본명 양영숙. 영남이공대학교 가정과 졸업.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3년 계간시와소금》봄호에 신인상 당선.

시집 노랑부리물떼새가 지구 밖으로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