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서주영 시집『나를 디자인하다』

丹野 2017. 10. 19. 23:12




바닥이란 말


 

서주영

 

 

 

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바닥은 끝이 아니다

반환점을 돌 때

바닥을 치고 다시 시작하라는 뜻이다

 

바닥이란 말,

바다의 맨 밑바닥을 ㄱ자로 몸 굽혀 받치고 있다

허리 한 번 못 편 채 안간힘 다해 사는 바닥,

바닥이란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기름 유출사고에

악취를 뒤집어쓰고 바닥에 붙들린 바닷새들,

살아남기 위해 부리로 제 깃털을 몽땅 뽑거나

무거워진 날개의 반을 뭉텅뭉텅 쪼아 잘라낸다

갈가리 찢긴 마음은 날개도 깃털도 없는 울음이다

날아다니는 바닥이다

 

 


 

 

봄의 간격

 

 

 

꽃잎이 공기 사이에서 지고 있다

어둠과 어둠이 당신의 속살을 물들일 때

고요는 날마다 꽃의 창가에서 자란다

 

당신은 붉어져가는 속도에 몸을 던진다

보름이 지나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자목련

나는 하룻밤 사이에 출구를 잃었다

 

자목련처럼 허공도 붉었던가

사월의 허리쯤에

수많은 별자리들이 떨어지고

 

떨어진 것은 헤어진 것이 아니라고

바람에 꽃잎이 날아올랐다

당신은 나로부터 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디자인하다

 

 

 

외딴 곳에 나를 보낸다

 

깊은 산골짜기,

계곡물 흥얼대며 흐르는 먼 강원도 어디쯤,

이끼 낀 나를 몽땅 부려놓고

다시 나를 디자인하고 싶다

 

산야초 향기에 홀려 헤매다가

두메 어디쯤에 홀연히 갇혀

멧새며 산노루처럼 온 산을 쏘다니며

벌이며 풀쐐기에 쏘이며

 

포식자 호랑이가 나타나

이 지루함을

멀리 멀리 몰아낼 때까지

 

나의 디자인실은

32일에도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시집『나를 디자인하다』(2017. 9)에서





서주영

1957년 충남 아산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9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나를 디자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