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가는 길 외 2편 - 나에게서 가장 먼 길 / 김경성
김경성 시 3편, 시인수첩
사강에서 길을 찾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한결같이
날개를 활짝 편 새 한 마리씩 데리고 간다
저 새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어떤 새는 나무 숲으로 들어가고 어떤 새는 골목길에 있는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날지 못하는 새는 눈물 흘리며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날개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아무도 귀를 기울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사소한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젖어 있을 때만
날개를 펼 수 있는 새의 운명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날개 접은 새를 안고 버스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 문이 여닫혀도 놀라지도 않고
부리로 무언가를 쓴다
모스 부호 같은 말들을 읽느라 내릴 곳을 놓쳐버린 나는
우음도로 가는 사강 어디쯤에서
지도에도 없는 길 너머로
젖은 새를
날려 보냈다
암화巖花
김경성
한 생이 피었다가 지는 동안 숨결 닿는 곳에서
소리 없이 새겨지는 흔적이 있다
협곡으로 사라져 간 바람의 입술은
무언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사막에서는 밤눈을 밝히는 붉은여우 울음소리가 들쥐를 밀어내며
소소초의 바늘잎을 더 날카롭게 키웠다
지문을 갖고 태어났지만 어디에 발자국을 남겨야 할지 막막했다
수억 년 전 눈 맑은 아기공룡이 걸어가면서 꽃 한 송이씩 피워 올렸다
한 겨울 탐매 여행의 시작이며 끝인
고성리 공룡화석지
맨발로 걷는다
선운사 가는 길
김경성
지느러미가 없는 물고기 한 마리가 길을 찾고 있다,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얽히는 물길을 풀 수 없어서
꼬리를 구부렸다
나무가 나무를 어루만져서 흘러나오는 목탁소리가 눈에 차 오른다
물속에 얼굴을 묻은 뭉게구름이 물고기 등허리에서 걸터앉아
제 몸빛을 지우고 있다
지느러미를 다 떼어놓고 물속에 뛰어든 저, 물고기
수많은 말의 씨앗이 쌓이고 또 쌓여 기원처럼 하나의 바위가 되었다
그 말들이 바람으로 세상에 번져나간 후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눈을 뜨고 있다
십일월의 숲이 깊어갈수록 물빛도 깊어져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영산전 연화문판벽화로 이르는 길 위에
늙은 감나무가 몸을 구부려서 수많은 꽃등을 밝혔다
내 안의 신은 어디로 가서 보이지 않는 것일까
눈을 감지 못하는 물고기의 부레가 점점 부풀어 오른다
<시인수첩>
나에게서 가장 먼 길 / 김경성
새벽 세시의 달빛이 깊은 산속 암자의 띠살문을 뚫고 들어와 당신의 벗은 눈 속으로 들어차는 것처럼, 달의 신전에서 비추이는 오후 세시의 낮달이 꼭 다문 당신의 입술에 흰 그림자를 내려놓는다. 고산증에 숨이 차오른 나는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늘 아래 앉아서 높이 오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손바닥에 내려앉는 빛을 읽었다.
낯선 사람들의 낯선 말들도 그 사람들의 눈을 들여다보면 다 읽을 수 있는 말들이다. 할 말이 많아진 나는 마음 속에 숨겨놓은 긴 부리를 꺼내서 새처럼 노래를 불렀다. 코스타리카에서 왔다는 가족들은 한없이 사랑스럽게 나를 껴안으며 얼굴을 부비고, 내 얼굴을 감싸고 한참이나 들여다 보면서 낯선 말로 경계를 지워버렸다. 그 말이 저 말을 읽고, 저 말이 그 말을 읽으니 세상이 하나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지난해 연말 새벽 세시의 달빛을 탐했던 절집에서의 시간, 올해 1월 날짜 변경선을 넘어서 찾아간 검은 돌로 쌓아올린 달의 신전에서의 시간, ‘몇 번의 잠 속에 들어갔다 나오니 그 자리에 내가 있었네’ 였다. 세상이 아무리 넓다고 하지만, 사람과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 긴 밤을 지나 창 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오면 날이 밝아온다는 것이고, 달과 별이 하루에 한번 씩만 보여주는 것도 저 먼 나라의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해주고 오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내가 다 가졌다고 하는 것이 과연 다 가진 것일까? 내가 다 잃었다고 하는 것이 정말 다 잃어버린 것일까?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살아가는 동안에 소유했던 물질적인 것은 욕망의 찌꺼기였고, 속 깊은 곳에 들어가 있는 기억이라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기다림에서 시작되어 기다림으로 깊어지는 여행처럼, 시 쓰기나 인생 여정의 길도 기다림이라는 말을 맨 앞에 두고 산다. 더는 잃어버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뒤돌아보면 잃어버리기 전보다 더 진한 것들이 가득히 차 있음을 느끼게 된다. 먼 곳 혹은 가까운 곳으로 떠나서 늙은 나무와 늙은 바위와 늙은 탑, 새들과 물고기의 말을 듣는 일과 비단실로 짜놓은 피륙처럼 내 안에 촘촘하게 나만의 무늬를 짜 넣는 일, 그렇게 길 위에서 보내는 말없는 나날들이 내게 전해주는 선물이다.
달의 신전으로 가는 길에 닿기 전날 밤, 먼 이국땅에서 주홍장미 한 다발을 내 가슴에 안겨주던 딸아이가 한 편의 시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처럼.
공룡 발자국이 매화꽃으로 보였던 날처럼
안개 속에 서 있던 늙은 느티나무가 신처럼 보였던 날처럼
매 순간순간 내 안의 신을 만나기 위해 마음의 부리를 벼린다.
오래된 서고에서 가장 오래 된 책 한 권을 품고서, 너무나도 아득한 시의 길로 들어서는 일이 내가 걸어가야 할
나에게서 가장 먼 길이
다.
-계간<시와산문> 2018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