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지금, 이곳의 쓸쓸함 / 박성현

丹野 2014. 5. 25. 16:47

 

 

지금, 이곳의 쓸쓸함

 

 

     박성현 

 

 

 

  외투를 집어 들자 살얼음이 떨어진다.

  우울은 커피잔 속에 넣을 만큼 충분히 가볍다.

  대답은 절박하고 질문은 간단하다.

 

  계획서는 의도적으로 묵살된다.

  찢어졌으므로 그 무엇도 확인할 수 없다.

  의자에서 쫓겨난 사람은 넥타이를 풀지 못하고

  복도 끝 재판관은 결과에 만족한다.

 

  ─ 칸마다 붉은 선이 그어져 있군요.

  ─ 모자이크가 감춘 건조한 목록도 있네요.

  ─ 무성영화처럼 소리를 잃어버린 분쇄기는 없나요?

 

  도무지 종적을 알 수 없는 도둑처럼

  게시판에 걸린 몽타주는 수많은 얼굴이 집약된 것

  우리 중 누가 지목되어도 그만이다.

  몇 명은 제시된 수수께끼에 골몰했지만

  해답은 치밀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유보된다.

 

  엘리베이터는 민첩하게 움직이지만

  누구도 막다른 골목에서는 내리지 않는다.

  인쇄되기도 전에 신문은 유효기간이 지나버린다.

  그리고 수화기 속의 유령처럼

  알리바이 없이 끼어드는 통지서

 

  문득 자신이 늙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서류철이다.

  연극이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는 채 앉아만 있는 관객이다.

  길이는 다르지만 같은 트랙을 질주하는 비명

  혹은 모든 것이 뚜렷한 창문, 창문의 명랑한 예감이다.

 

  

 

  

 

- 월간 『문학사상』 2013년 8월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