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내밀다 외 / 맹문재
사과를 내밀다
맹문재
1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담장 가에 달려 있는 사과들이 불길처럼
나의 걸음을 붙잡았다
남의 물건에 손대는 행동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가난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만
한번 어기고 싶었다
손 닿을 수 있는 사과나무의 키며
담장 안의 앙증한 꽃들도 유혹했다
2
콧노래를 부르며 골목을 나오는데
주인집 방문이 열리지 않는가
나는 깜짝 놀라 사과를 허리 뒤로 감추었다
마루에 선 아가씨는 다 보았다는 듯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3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다시 놀랐다
젖을 빠는 새끼를 내려다보는 어미 소 같은 눈길로
할머니는 사과를 깎고 있었다
나는 감추었던 사과를 내밀었다, 선물처럼
피곤한 발을 언제쯤 풀어줄 수 있을까
1
오늘도 무사했구나,
현관문 앞에 서서 귀가를 기다리고 있는 발을 내려다본다
자정 넘도록 집 안에 들지 못한 채 길 위를 걷고 있는 발
비 맞은 강아지처럼 측은하다
나는 발의 피곤한 표정이 정치 뉴스를 듣는 데 지쳐서라는 것을
공사장의 소음에 시달려서라는 것을
곡괭이질에 부쳐서라는 것을 잘 안다
더 큰 이유가 있다는 것도 잘 안다
2
나는 오늘 천 일 넘게 한데서 떨고 있는 기륭전자에 가지 못했다
무척 가고 싶었지만
논문 마감일에 쫓기느라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그곳에 가는 길은 만만하지 않다
버스 노선이며 골목길도 찾아야 하지만
생업을 잃을 위험도 감수해야 된다
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해
나의 발은 하루 종일 바빴다
3
피곤한 발을 언제쯤 풀어줄 수 있을까?
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책(冊)이란 한자를 찾다 보니
부수로 경(冂)이 쓰이는 것을 알았다
옛날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을 읍(邑)이라 했고
읍의 바깥 지역을 교(郊)라 했고
교의 바깥 지역을 야(野)라 했고
야의 바깥 지역을 림(林)이라 했고
림의 바깥 지역을 경(冂)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책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선은
내 시야가 닿기 어려운 거리이다
나는 책을 읽어서는 세상을 볼 수 없다고 믿어왔는데
책의 경계선 안에
산도 강도 들도 짐승도
사람도 시장도 지천인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칸트는 평생 동안 백 리 밖을 나가지 않고
서재에서 보냈다고 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시계와 같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벌써 백 리 밖을 벗어났고
들쑥날쑥 살아가고 있으므로
나는 책을 읽었다고 말하면 안 되겠다
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다만 책이 넓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보이는 데까지만 걸어가야겠다
—시집『사과를 내밀다』(2012)에서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 출생.
1991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먼 길을 움직인다』『물고기에게 배우다』『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
현재 안양대학교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