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품종 外 / 허연숙
아버지의 품종
허연숙
수몰의 끝자락에서 매운 농사를 짓던 아버지
독하고 아린 품종을 여전히 경작하고 있다
육 쪽 마늘 농사 끝이 맵기만 하다고
취한 말들로 중얼거렸지만
육 쪽 마늘에서 한쪽 빠지는 오형제들
그 독하고 매운 자식들 어찌 마음에 품고 계셨을까
점점 밭이 되어가는 아버지
마늘쫑 쫑쫑 뽑히는 소리를 무시로 들었던 그 마음 밭
그 밭엔 한 소작농의 큰 농법이 자라고 있다
매운 품종은 매운맛에 승부를 건다
힘들수록 코끝을 쏘는 다섯 쪽의 마늘들
수몰 앞에서 끝까지 지키려 했던
그 마늘 밭은 이제 물무늬가 자란다
때가 되면 그 귀퉁이에 아버지를 심을 것이고
마늘들이 경작을 서두를 것이다
가슴의 고랑마다 푸르게 여물고 있는 검은 흙 밭
죽어라고 쫓아다니던 한낮 햇볕이 멀리 밭을 떠나는 시간
아버지의 잠에서는 아직도 물비린내가 난다
세상에서 혹독한 장마와 가뭄을 지나 온 밭
그러나 가장 기름진 밭이 아버지 마음속에 있고
우리는 모두 그 농법의 품종들이다
웃고 있는 슬픔
허연숙
검고 잘생긴 슬픔이 눈에서 뚝뚝 떨어진다.
부릅뜬 눈으로,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애써 참고 있는 슬픔
손에도 묻지 못하고 벗어 쥔 장갑으로 떨어지는 슬픔
입술사이에 꽉 깨물려 있는
구겨진 얼굴에 들어있는, 구겨진 채 들어있는 호곡號哭
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흐느낌
눈물도 불법체류가 있다
인도네시아 산업연수생이었던 어정,
지금은 숨어서 상喪을 치루고 있다.
들키지 말아야 할 슬픔과 먼 곳의 소식을 앞에 놓고 당일장葬을 치르고 있는 어정,
향수병을 취하게 하던 소주도 멀리하고
우기雨期쪽으로 예를 보내고 있다
어머니의 병은 불법체류 기간의 밖에 있었다.
그 기간에 새로 지은 집이 있고 단란한 웃음이 있었다.
전화선을 타고 온 애도의 기간은
너무 멀거나 가깝다.
철판을 뚝뚝 잘라내는 절곡기 스위치를 밟는다.
어둡고 망망한 슬픔도 잘라 버리고 싶은
며칠을 굶은 눈이 잘 벼른 절곡기 날처럼 푸르다
세상의 국경도 참고 견디는 방식으로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어머니의 죽음과 만나려면 반드시 국경을 넘어야만 된다.
죽음에도 국경이 있다
- <우리詩> 2012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