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아버지의 품종 外 / 허연숙

丹野 2012. 11. 30. 11:50

 

 

 

 

아버지의 품종

 

허연숙

 

 

수몰의 끝자락에서 매운 농사를 짓던 아버지

독하고 아린 품종을 여전히 경작하고 있다

육 쪽 마늘 농사 끝이 맵기만 하다고

취한 말들로 중얼거렸지만

육 쪽 마늘에서 한쪽 빠지는 오형제들

그 독하고 매운 자식들 어찌 마음에 품고 계셨을까

점점 밭이 되어가는 아버지

마늘쫑 쫑쫑 뽑히는 소리를 무시로 들었던 그 마음 밭

그 밭엔 한 소작농의 큰 농법이 자라고 있다

 

매운 품종은 매운맛에 승부를 건다

힘들수록 코끝을 쏘는 다섯 쪽의 마늘들

수몰 앞에서 끝까지 지키려 했던

그 마늘 밭은 이제 물무늬가 자란다

때가 되면 그 귀퉁이에 아버지를 심을 것이고

마늘들이 경작을 서두를 것이다

 

가슴의 고랑마다 푸르게 여물고 있는 검은 흙 밭

죽어라고 쫓아다니던 한낮 햇볕이 멀리 밭을 떠나는 시간

아버지의 잠에서는 아직도 물비린내가 난다

세상에서 혹독한 장마와 가뭄을 지나 온 밭

그러나 가장 기름진 밭이 아버지 마음속에 있고

우리는 모두 그 농법의 품종들이다

 

 

 

 

 

 

웃고 있는 슬픔

 

허연숙

 

 

검고 잘생긴 슬픔이 눈에서 뚝뚝 떨어진다.

부릅뜬 눈으로,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애써 참고 있는 슬픔

손에도 묻지 못하고 벗어 쥔 장갑으로 떨어지는 슬픔

입술사이에 꽉 깨물려 있는

구겨진 얼굴에 들어있는, 구겨진 채 들어있는 호곡號哭

 

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흐느낌

 

눈물도 불법체류가 있다

인도네시아 산업연수생이었던 어정,

지금은 숨어서 상喪을 치루고 있다.

 

들키지 말아야 할 슬픔과 먼 곳의 소식을 앞에 놓고 당일장을 치르고 있는 어정,

 

향수병을 취하게 하던 소주도 멀리하고

우기雨期쪽으로 예를 보내고 있다

어머니의 병은 불법체류 기간의 밖에 있었다.

그 기간에 새로 지은 집이 있고 단란한 웃음이 있었다.

전화선을 타고 온 애도의 기간은

너무 멀거나 가깝다.

 

철판을 뚝뚝 잘라내는 절곡기 스위치를 밟는다.

어둡고 망망한 슬픔도 잘라 버리고 싶은

며칠을 굶은 눈이 잘 벼른 절곡기 날처럼 푸르다

 

세상의 국경도 참고 견디는 방식으로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어머니의 죽음과 만나려면 반드시 국경을 넘어야만 된다.

죽음에도 국경이 있다

 

 

 

 

- <우리詩> 2012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