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금빛 물고기외 4편 / 신현락

丹野 2012. 7. 2. 23:24

 

 

신현락 신작소시집

금빛 물고기4/ 신현락

 

 

금빛 물고기

 -김종삼 시풍으로

 

 

신현락

 

 

아이가 곁에 와서 종이를 놓고 간다

색종이로 곱게 접은 물고기 한 마리

바다 속을 헤엄쳐 간다

금빛이다

 

아이가 돌아간 빈 교실에

초록금빛 물결 출렁인다

듣기로는 심해의 어떤 물고기는

수천 리 떨어진 곳에서도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소리통로가 있다고 한다

아이에게도 내가 모르는

바다로 통하는

황금열쇠가 있나 보다

 

일상은 늘 남루하다 해도

그 아이의 바다처럼

금빛 물고기처럼

빈 교실에 출렁이는 물결처럼

 

 

 

 

 신현락

 

한때는 그랬네.

땅 위에 금을 그으며

여기 넘어오면 안 돼, 넘어오면 죽는 거야, 하면서

네 편 내 편 서로 금을 밟지 않으려고

금 밖에서 빙글빙글 돌았던 적이 있었네.

나도 그랬네.

누군가 금만 그으면

여기에서 저기로 넘어가지 못하는 줄 알았네.

그날 밤 나와 너 사이에 그어진 금을

내 새끼손가락은 얼마나 넘어가고 싶었던가.

땅 위에 금을 그으며

여기는 내 집이야.

순금으로 지은 집이라고 착각한 옛날도 있었네.

나도 너의 금이었을까.

넘어가서는 안 되는 국경처럼

머나먼 금기의 이역에서

깃발만 펄럭이고 있었을까.

한때는 너와 나

금 밖에서 서성거렸으나

이제는 금 안에서 금 밖을 기웃거리네.

지금 저 금 밖에서 우는 사람아

그곳은 금 밖이 아니고 금 안이라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금 안에서 우는 거라네.

 

 

 

 

자명自鳴 

 

신현락 

 

 

원시의 어떤 부족은 새벽하늘이 밝아오는 소리에 잠을 깬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후 새벽이면 귀부터 먼저 열려서 창밖으로 나가곤 했다

새벽 쓰레기를 수거하는 차의 종소리, 일 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실어 나르는

새벽 첫차의 엔진 소리에 섞여 가끔씩 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기도 했던가

여명의 배후에는 그렇게 여러 소리의 냄새들이 뒤섞여 있지만 그 중에 나는

새소리를 빛의 소리로 듣기로 했다 아무래도 제일 빛에 민감한 종족은

가장 높이 나는 새들일 테니까 하늘의 소리 시원에는 새가 있다고 작정한다

하지만 새벽하늘이 밝아오는 소리라니!

바람도 가지 못하는 공중에 걸린 나도 모르는 울림판이 있는 것일까

새는 밤의 미로를 깃 속에 품고 있다가 지상에서 가장 먼저 그 빛을 감지하는 것이 아닐까

그 빛의 목젖을 순결한 부리로 쪼아대는 자명自鳴이라니!

스스로 밝아오지 않는 자에게 새벽은 그냥 오는 게 아니다

빛에는 냄새가 없다 소리 소문 없이 증발하고 만다

나는 휘발성의 새소리를 들으며 잠이 깬다

빛이 내 몸에 들어와 지난 밤 내 꿈을 밟고 왔던 어지러운 별자리도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창을 열고 새소리 나는 곳을 본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가려서 그 소리의 시원

보이지 않는다 푸른 나뭇잎 음표만이 바람에 넘실거린다 저렇게 스스로 울면서

자기를 감출 수 있는 자의 경지란 무엇일까 나는 그 나무 위에 내 푸른 귀를 올려놓고

새소리는 이제 잠에서 막 깨어나는 어린 아들의 혓바닥 위에 올려놓고 쫑알쫑알 다시 아침을 시작한다

 

 

 

 

 

바람이 읽고 간다

 신현락

 

 

책을 읽다가

밑줄을 그어가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덧붙이다 보면

어느새 책은 사라지고 글자 사이로 도마뱀의 꼬리처럼

자꾸 끊어지곤 하던 길들……, 그 막막한 언어의 넓이가

해석의 깊이를 낳는다고 믿었던 때의 일,

나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엄마를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

……종소리처럼 새가 날아간다거나

광활한 여백의 배경으로 퍼져가는 상들이

지금까지 내 독서의 풍경이었다

 

그 풍경의 근원에는 바람이 있다

바람이 아니면 읽을 수 없는 허무의 돋을새김,

바람이 허물고 가는 풍화의 안쪽을 당신이라고 했다

당신에게 가는 길이 없어서, 다만 당신과 나 사이로

그 광야를 배경으로 별처럼 돋아나는 문자를

어루만지고 살았던 이력으로 별과 별 사이를 목측하는

시력이 생겼던 것인데, 그 사이엔……다친 말들처럼

이주해가는 사람들의 영혼이 오독으로 절뚝거리고,

……먼 훗날 바람처럼 날아가는 새가 보이기도,

 

별에서는 더 이상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해도

시간의 전이를 허락하지 않는 비석이란 없다

어떤 책은 황무지를 배경으로 쓰이는 것이어서

당신의 풍화를 엿보기 위해 황무지를

바람의 배경으로 읽어야 했던 시절도 있었던 것,

모든 배경은 미처 쓰이지 않은 여백의 다른 이름이어서

모래 위에 그리는 바람의 동선을 어림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 생을 건너간 사람도 있었던 거다

 

책을 읽는 건

외로운 영혼이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나무의 잠을 털면서

다른 생으로 이주해가는 누군가의 울음소리에

눈을 맞추는 일, 나와 당신 사이를

불어오는 바람에 생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일,

……종소리처럼 새를 날려 보내거나

나무처럼 혼자 오래 남아 있는 것이기도

 

 

 

 

 

빗방울버스

 

신현락

 

 

비 오는 버스에서 시비가 붙었다 차를 잘 못 탔으니 중간에 내려달라는 손님과 내려줄 수 없다는 기사와의 언쟁 끝에 누군가의 입에선가 너, 나이가 몇이냐?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여기서 나이가 왜 나오니? 라고 되묻는 입장에서도 세월이 주는 무게를 알고 있는 듯 그 이후 잠시 침묵이 흐르고 비가 오는 벌판 한 가운데 손님을 내려주고 버스가 다시 출발할 때쯤 나는 새삼스레 버스를 잘 못 탄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나도 그만 여기서 침묵하든가 아니면 하차해야 하는 나이는 아닌지……

 

사람들은 나이를 숫자로 기억하지만 나는 저 차창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의 서사로 기억한다 빗방울이 흘러내린 자리로 또 한 방울이 흘러오고 흘러가는 그 아득한 시간의 서사에서 거기 처음처럼 다시 태어나는 몇 소절의 노래들, 그리운 이름들로 기억한다 물론 버스를 잘 못 탄 저 손님처럼 중도하차한 이름도 있다 그 이름들이 하나둘 지워지는 생의 지평선에 가끔씩 구름이 뜨곤 했다 누가 나에게 나이를 물어온다면 나는 구름을 들어보이리라 그리고 되물으리라 내 이름과 당신 이름 사이에서 어느 것이 구름의 나이인지……

 

몇 개의 이름이 지상에서 사라진 건 불과 몇 정거장 전 일이다 아직까지 몇 억 광년 떨어진 빗방울별에게 가 닿은 부음은 없었다 그건 아주 먼 마지막 이야기이다 처음 빗방울이 떨어진 자리의 꽃잎을 서정이라 한다면 처음과 마지막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단지 중간만 있는 서사라면 나는 언제든지 내 나이를 속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내리는 비를 이야기 할 때 당신은 어제 내린 비를 이야기 한다 내가 내일 내릴 비의 예감에 눈이 젖어 있을 때 당신은 오는 비를 맞으며 버스를 기다릴 것이다 끝내 당신이란 이름으로 기다릴 것이다

 

빗방울의 서사에서 흘러가지 않은 사랑은 없었다 모든 사랑은 내 스스로 떠나오거나 어쩔 수 없는 중력에 의해 떨어지던 빗방울 같은 것이었다 해도 꽃잎 같은 입술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당신의 계절이 있었다 그 많은 이름과 빗방울꽃잎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이 버스는 종점이 있겠지만 한때 동승했던 빗방울의 짧은 이야기의 끝을 기억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불안한 희망 속으로 불려나온 한 방울 눈물의 서사에게, 나는 침묵을 염주알처럼 매만지며 앞으로 몇 정거장을 더 갈 수 있을지 물어 보곤 하는 것이다

 

 

 

 

신현락 시인

-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따뜻한 물방울』『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이 있음

-저서로 한국현대시와 동양의 자연관이 있음.

-shinpoet@empal.com

 

 

 

출처 / 우리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