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野 2012. 3. 13. 09:06

 

 

 

수몰지 / 조정

 

 

종이 떠나는 흙벽에서 풍년초 냄새가 난다

나는 그들의 어깨가 연둣빛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운 것들이 꿈의 기둥을 휘감고 놓지 않던 한 시절이란

굳이 견디었을 것 없으나

대체나

길기는 긴 날

 

닥물 든 손이 뚬북뚬북 짧은 노래를 뜯어 넣어 냉잇국 끓이듯

마음과 오래 된 달을 몇 수십 개 거느리고

물을 아무렇지 않게 걸어 잠갔다

 

본 적 없는 바다까지

부뚜막 검댕 벽 안으로 환하게 바다야 라고 불어 앉히던

내가

겉과 속 까맣게 탄 부지깽이 되어 돌아왔는데

 

닥나무 쩌낸 솥

식은 나무 냄새에 젖어

불쏘시개로 쓰고 남은 잡지 절반이 떠다니는 집아

 

 

파닥치는 소리가 수초지*로 번역되어 바스락거리기까지

겨울은 길고 봄은 넓었다

종이 뜰 수 없는 잠마 지나기를 기다리라면 기다리지

 

셀 수 없는 갈피로 묶인 속수무책을 품에 안고

낯설지 않다

-희소희소

삼충 오층 팔층 일백 이십층 물 아래

 

나 왔다

 

 

 

*손으로 뜬 한지(韓紙)

 

 

 

 

 

 

사진작가 김영갑 / 조정

 

 

나는 거울로 만들어진 수컷 물고기다

 

돌들이 떼지어 동녘 바다로 뛰어들 때

달려 나가

바람의 각막을 훔쳤다

 

섬의 비루를 건든 자들이 슬어놓은 피뿌리꽃 앞에 무릎 끓었다

제 암컷을 만나 거세게 포복하기 시작하는

바람의 허리띠를 잡았다

 

풍습에 척추가 시렸다

 

부싯깃고사리 턱에 초점 맞추고

격발하는 순간

섬의 근육 쪼아 비와 안개를 깨우는 까마귀 떼가

마른 목적으로

나를 불렀다

 

터져 흩어지는 유리에서 나가지 않았다

바람의 죽지뼈를 내통한

셔터

 

뒤꿈치 힘줄을 끊고 잠 든 말처럼

 

 

 

 

 

 

-「시와사람」 2012, 봄호

 

 

 

 

박무(薄霧)  / 조 정

 

 

 

사방이 부드러운 종이 같았어요

엷고 따스하게 풀어진 안개 겨드랑에서 흰 나비 몇 마리 날아오고

 

동백 숲 너머 소나무 네댓 그루 중 두 번째 나무 왼쪽 가지에

산비둘기가 울었어요

 

울음으로 만든 산비둘기 알이 모시풀 잎사귀 사이로 흩어져 내렸어요

 

늙은 거미 손바닥이 축축해지고

울어야 할 일 쓸어 모아 전생에 다 울고 온 끝이라

마른 내처럼

울지 않아도 견딜만하던

나마저 흐릿해졌어요

 

반대편 가지에

혀가 두 겹인 새들이 날아와 여러 가지 말로 이야기를 했으나

안개가 속속 삼키고

산비둘기 울음만 대팻밥처럼 창틀에 쌓였어요

 

비탈 아랫집 개 짖는 소리도 바람에 닳아 묵묵한 목질이에요

오늘 기상 예보는

흰 상여 같은 날

나비 떼가 지붕보다 높이 날아다녔어요

 

 

 

-「시와 시」201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