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걸어온 것들 外 / 김추인
오래 걸어온 것들 / 김추인
혼자를 보면 마음이 쓰인다
그래서 말을 걸었을 것이다 속말이겠지만
원지의 문밖을 내다보느냐
기억 이전의 저무는 자갈길이 보이느냐
이젠 꺾인 무릎에 끙- 힘을 주어도 한 몸 일으켜 세울 것 같지 않은
늙은 수낙타여 나비여
긴 속눈썹 선한 눈매의 동굴 속같은 눈 보면 동굴 밖으로 길게
뻗은 그대의 비단길이 보인다
우리, 긴 생애를 함께 걸었을 것이다
누린 양가죽을 지고 온도르한*에서 남고비, 오보스,
떠도는 족속들의 고단한 한뎃잠 보이는 것이
머나먼 바람의 땅
거친 자갈길이 네 발굽을 간단없이 들었다 놨을 것이다.
지친 몸에 서로를 묶어매고 타박타박 걸었을 것이다
방금 네 눈부처는 원지의 기억으로부터 돌아오고 있다
시린하오터 대 초원,
풀꽃들만 숫몸 열어 오롯이 이고 있는 것들의
사랑 하나로 사무치는 저 태평성대를 봐
삼 센티 키의 땅부추, 구자*는 무슨 일로 알이 드는지
*
일 센티 키에 지름 이 센티 꽃나발을 불어쌓는 저 메꽃들 사이를
뭔 일로 뚱뚱한 풀메뚜기 풀떡 풀떡 튀고 있는지
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겨룰 일도 죽을 일도 없이
이승 저승을 넘어다녔을 앉은방이 족속들의 여기는 키작은 것들의 땅
고와라
먼 데 양떼 모는 소리조차 잦아들면 그냥 고요다
우리 오래 걸었을 것이다
거기엔 사방이 문이겠다
확 터버린 하늘
열어 젖힌 초원
사방이 하늘의 높이로 문 열려 있어도
바람도 들망아지도 떠남이라는 말,
그 구름의 의미를 잊어버린 듯 붙박혀 있는데 천지가 환한 문인데
우린 아직도 꽃장터를 찾아다니는 나비
저기 하얀 게르 앞, 볼이 빨간 아이의
베그시 웃는 입도 낯이 익다야 어느 생에서 보았을까
들바람에 낯이 터 빨간, 혼자 노는 아이,
내 유년의 거기에도 사방 문이 열린 그리움 쪽이겠다
나뷔야 청산가쟈 가다가다 져무러든 아무듸나 곳듸드러 자고가쟈 *
* 내몽고 동북쪽에 위치한 초원
* 구자/들부추씨
* 작자미상 고시조제목;혹은 고전무용제목(무용박물관)
져무러든/저물거든
곳듸드러/ 꽃에들어
폭포 / 김추인
물의 변주를 엿본 적 있네
제 형상을 풀어도 그 빛을 잃지 않는
물의 변환을
물길 이야기를 따라간 적 있네
어느 가난한 처마 밑 이야기며 들창 아래서 엿들은 사랑의 구음까지 풍문처럼 실어 보내고 싶
어
앞개울은 저리 도란도란거리나 본데 수런수런 합치나 본데
몸을 바꾸는 물의 변주를 아네
개울이다가 개천이다가 봇도랑 너머서부터
제 깊이를 지우고
무논이든 묵정밭이든 목숨 길을 틔우다
그만 남의 목숨이 되기도 한다는 걸
세상의 변방을 오래 쓰다듬어본 자의 결단일까
에둘러 온 거리도 덧쌓은 시간도 일시 멈춘
강물의 벼랑 끝 일 초
극한의 긴장을 툭- 끊고 뛰어내리는 저기 저 눈부신 낙화를 봐
물이 물을 받으며
몸이 몸을 받으며
허공중에 비명처럼 써 내리는 수직의 문장 한쪽
말을 버린 사람의 눈이 그 푸른 벽을 읽고 있네
행의 마지막을 치장하며 튀어오르는 포말들 물비늘들 은어의 몸짓으로 읽히네만
무지개 뜨는 생의 한때는 누구에게도 잠간이어서
이윽고 바다에 이르거나
뉘 발가락을 적시거나
아득한 황홀 / 김추인
-서호 가는 길
번쩍 물비늘 세우는 저
강물의 등짝 위로
만장한 붉은 이랑들이 노을밭이네
뉘 염료 솥을 엎어뜨린 것이냐
선홍의 피륙들로 하늘을 나부끼게 하던 장이모우의 염천 하늘,
*
‘국두’를 ‘붉은 수수밭’을 여기 와 보네
기억의 편편에 묻은
몇 개의 눈부신 일몰을 알고 있네
해뜨기 전 마른 풀잎을 치장하던 이슬이라거나 초신성의 빅뱅, 그 화려한 최후의 페스티벌
말고도 시들기 직전 극한의 긴장으로 여미어 뿜는
꽃의 황홀같은 것들이 다
고단했던 제 생을 비우기 직전
단 한 번의 마지막 무대일 몸짓 같은 것이겠네
장엄한 노을 한 페이지를 뒤로 한 줄의 붉은 문장을 또 보네
조숙한 단풍잎 한 장
한 생애 잡았던 떨켜의 손을 놓고 뛰어내린 듯
천길 나락, 아라베스크의 휘어진 문장으로
사쁜 제 무게를 내려놓고 있네
고와라 저 아득한 황홀
* ‘황후화’‘국두’‘붉은수수밭‘등 색채의 영상미로 잘 알려진 중국의 영화감독
닫힌 문을 위하여 / 김추인
문입니다. 보이다가 사라지는 것 그것이 문입니다.
문은 맨 처음 점이다가 선이다가 광장이 되지 못하고
처음의 그 소실점 밖으로 사라집니다.
문은 크다가 스러지고 화사하다가 어둡고
멀다가 안보이다가 잠기어 침묵하다가 어느 한 순간에
빗장 내려지고
환히 열리는 때도 있습니다만 어느 한 순간에
또 감쪽같이 눈앞에서 퇴장합니다.
문은 문이다가
문밖으로의 사라짐 혹은 문안으로의 사라짐에 대해
절대 설명하는 일은 없고 감각으로 책정되는
문의 강의록만 있을 뿐
나는 시방 문을 통과하는 중입니다만 잘 보면
문이 나를 좇아오고 있습니다
문을 향해 내가 뒤돌아 달리는 이유입니다 철없이도
문득 내 마지막 문을 나서면 그 뒤는? 허방입니까?
무목적성의 텅빈 전망。그 부데낌 없는 불안을 어찌 견딜지요
이 지상에 문이 단 하나였다면
오늘의 개인의 세계의 이 가공할 진화는 과연 왔을지요
다시 올 것을 압니다 알 수 없는 문의 감옥, 이 지상으로
오일장처럼 설렘으로 가득찬 문, 문을 찾아서
그곳에서 무조음을 엿듣다 / 김추인
-행성의 아이들
저문 숲의 옛 서고를 방문하다
늙은 고목의 잔가지를 흔들면 먼지들 깨어 날아오르는 사이로 후둑후둑 지는
꽃잎들을 보다
이 나라의 숲에서는 층층이
도열하거나 섞여 서거나 일만, 나무들의 기립을 보다
오래 묵은 피톤치드 향에 제 안부를 물으니
곰팡내 쪽으로 기우는 중이라고 회신을 보내오다
어떠랴 먼지 빛으로 어두워지는 숲은 깊이에 이르는 일
어떠랴 오래고 먼 박제의 시간은 술독처럼 익어갈 일
마음이 얼룩덜룩한 날은 낮은 조도의 숲으로 들다
숲으로 난 소롯길은 애써 시대를 가르지 않아도 마른 풀숲이나 천년의 그늘
이 숨긴 환유의 동굴에 이르는 일
아마도 서쪽 골짜기일 것이다
귀퉁이 나간 낙엽 한 장 주워 들면 행간의 연필자국, 사상 한 토막에도 늑골
아래서 들리는 내 구음口音
당대의 언표들에 무릎을 치다
떨어져나간 <들뢰즈>의 옆구리께라 믿으며 무채색으로 닿는 <쇤베르크>의 무조음을 듣다
문득이세계는흉가로들어가는문이라주석을단<파스칼>*은잠시잊기로하다
* 인간은 외딴섬에 홀로 던져졌고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는다(파스칼)
쓸쓸한 우화 / 김추인
-행성의 아이들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알룩새뚝아 줌치늑대야 금두껍아
사라질 것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난초야 으름난초야
버들치며 각시붕어, 까다로운 것들아
아 유빙의 천사인 클리오네*, 너 아직 거기 있는 것이냐
이름도 가진 적 없이 학명도 얹어 본 적 없이
종種이 사라진 것들의 없는 이름을 불러본다
바람이나 햇살이나 방문했을 캄캄한 이름 불러본다
나, 네 이름 불러본 적 없고
너, 내 이름 불러준 적 없는
먼 땅의 모르는 이여
보르후야 스미스야 보노, 춤침랑아
본 적 없는 그대 이름을 불러본다
여기 쇠락하고 있는 행성의 동쪽 자락이 홧홧 단풍 숲이다
그대의 땅은 봄인 것이냐. 봄은 오는 것이냐
*남북극 유빙아래 서식하는 멸종위기의 생물로 약 1cm의 투명체.
클리오네라는 그리스신화 속 바다요정에서 애칭이 유래하였으며
어깨의 작은 지느러미가 펄럭여서 마치 천사를 연상시킨다
벙어리 휘파람 새 / 김추인
풋감잎 만한 첫 걸음 뗀 후 얼마나 멀리 나온 것이냐
구부러지지 않는 저 아득한 시간의 직선 위에서, 몇 십 성상을 걸은 것이냐
내 신발의 길이 흐릿해 지고 있다
내 두 살의 미래 일곱 살의 미래 내 열다섯 발긋거리다가 스물 일곱, 첫 아기 어르던 미래는
부푸는 나비의 꿈
미래 쪽으로만 날아오르던 춤이었다 정점도 없이 죽지 내리려느냐 먼데 소음도 둥글게 오고 묘역들
의 잔디 솜이 푸근해 뵈는 것이
벌써 귀가 순해 지는 것이냐
더 이상 신발은 자라지 않고 무덤새 소리 듣는다 담 밖에 쟁여져 있던 내 미래 어느 어름에 다 뒷걸음
쳐 간 것이냐
나머지기 싸락시간들 모아 오래 된 미래의 라다크에 다녀오고 싶다 그런 후이면 들리는 귀에만 들린
다는
벙어리 휘파람새
제 어둠을 감아 도는 소리까지 휘리릭 휘리릭 둘리지 않겠느냐 그때는 다 노래가 아니겠느냐
폼페이*에 보내는 참회록 / 김추인
1.
누가 그의 잠을 복원해 냈는가
누가 그의 깊은 잠을 끌어내어 저 딱딱한 나무 선반 위에 뉘었는가
발굴 제 Ⅶ지구, 8A구역
출토 된 토기 항아리들과 함께 철제 창살 속에 갇힌 그의 잠을 본다
천년의 먼지를 덮어쓰고 알몸으로 잠든, 화석이 된 남자
두 손을 가슴 위에 가지런히 포갠 채 흙벽돌 하나 베고 누운 저 남자 웃고 있다
꿈속에서 그리운 님을 보는 중이었을까 익어가고 있을 술 창고를 떠올린 참이었을까
저 마지막 미소를 지우지도 못 한 채 용암 속에서 굳어버렸을 근육,
그의 잠은 지금 편안한가?
2.
일시에 덮쳐 왔을 구름 먼지
검은 화산재에 묻히며 굳으며 갈팡질팡 아비규환의 울부짖음에 아이의 눈을 가리고 웅크려 안고 앉
은 여인이여
여인의 캄캄하였을 공포여
여러분의 최후를 구경삼는 나를 용서하시라
누가 당대의 영화와 퇴폐를 발설했던가 누가 고요해진 당신들의 잠을 곡괭이질 했던가
미안하고 미안하다
말소된 여러분의 생을 단 9아스나 10유로로 그 찰라의 경악과 행적을 사서 보는 나를 어찌하나 파헤
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천박한 열정이며 궁금증에 대한 이 지나친 관여를 어쩌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고 햇빛 아래 노출된 그대들이 자랑스러워 하겠는가
아직도 휘장을 치고 땅을 파고
털붓으로 살살 천년의 먼지를 털어내는 손이
쇠기둥에 너트를 조이고 두꺼운 선반을 질러 얹었을 손이
칸칸이 진열해놓은 여러분의 마지막 순간들 참담하다
파헤치고 발가벗겨
홍보하고 수익 챙기는 이 약삭빠른 우리들을 어찌하나
3.
온천이었을까
대중 목욕탕에 수없이 앉고 눕고 엎드린 어린 늙은 젊은 알몸들이여
어쩌면 지금쯤 저 들판의 메꽃이나 풀여치 또 어쩌면 에게해 잉크빛 물결로 출렁일 여러분
나이고 그대이며 인류사인 여러분
그러므로 나이고 그이며 그녀인 천 년도 이천 년도 자랄 줄을 모르는 이 분별없는 족속들을 용서하시
라 걸음걸음 옮기며 미안합니다를 남발하는 나를
부디 용서하시라
* 서기79년 8월 24일 오후1시,베수비오 화산폭발로 6m 두께의 화산재 속으로 사라진 도시. 발굴과 함
께 철제 구조물이나 시멘트 등으로 하여 유적파괴가 심화되고 있음
쑥부쟁이의 천년 가을 / 김추인
가을이사 붉든가 말든가
무더기 무더기 족속들의 꽃덤불 저기 두고
혼자 감감 낭떠러지 아래나 짚어보는
꽃아
불쟁이 딸아
벼랑귀를 잡고 서서 저를 보라 ─ 흔들어 쌓는 네 꽃짓,
눈이 시리다
가는 꽃모가지 치켜 하릴없이 구름송이나 세다
허옇게 늙어버릴 꽃아
떼 갈가마귀 구름장을 물고 잣봉을 넘으면
동강이 곧 시끄러워지겠는데
무슨 일이냐 쑥잎인 듯이 엎드려 크던 네가 문득
연보라 꽃잎 틔워 얹은 까닭이
뉘 오신다 전갈 있었더냐 뉘 언약 아니었더냐
네 젖은 꽃대궁들 일어서면 춤인데
바람이 먼저 읽고 천지 사방 소문내는 들국 향인데
두고 간 이승처럼 돌아와 가을볕에 나앉은
쑥부쟁이 꽃아
빛 푸른 솔울음도 네 천년 바래움도 휘어도는 물,
이쯤에서 묻었더냐
어라연, 얼비치는 저 물의 낯빛
뉘도 모를 비색(翡色)을 여기 와 보다니
낙산 / 김추인
-서호 가는 길
그 곳에 서면 하루가 투명하다
물 속 헤집지 않아도 바다는 제 속살을 드러내
뼈 속까지 환하다
층층 물의 갈피에 깃든 보리멸이나 벵에돔 전갱이새끼며
오래 씻긴 자갈이나 모래들
큰 바위 발치에 뿌리를 붙여두고 나울대는 초록말들의
말간 물밑 또렷한 표정은
잘 닦은 유리의 저쪽이다
용의 거동에 산 같은 파도 무너져 내리고
색이란 색 모두
어둠에 합류하여 캄캄할 때 있지만
어색한 일은 오래 끌지 않는 법
해 밝은 날은 천공과 해저가 한 길로 뚫린다
데엥 ~~~~~~~~~ 데엥 ~~~~~~~~~
동종소리 긴 여음이 시방세계를 돌아올 동안
바다도 제 지느러미를 가지런히 한다
김추인 시인
*1947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출생.
*연세대 교육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1986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온몸을 흔들어 넋을 깨우고』, 『나는 빨래예요』,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위보』,
『벽으로부터의 외출』, 『모든 하루는 낯설다』, 『전갈의 땅』등이 있음.
Fauré / Sicilienne Op. 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