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규 / 낙타 外
시/인/조/명
김충규 시인
│시인 프로필│
1965년 경남 진주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물 위에 찍힌 발자국』, 『아무 망설임 없이』
현재 계간 『시인시각』 발행인
<시인이 뽑은 대표시 5편>
낙타 외
김충규
나의 집으로 낙타가 들어왔다 쉴 곳을 찾았다는 듯이 길게 숨을 토했다 맑은 눈에선 고행의 흔적을 엿볼 수 없지만 살점 없이 앙상한 다리는 한없이 지쳐 보였다 낙타와 함께 지내기엔 집이 너무 좁아 나는 낙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낙타가 등을 낮췄다 나더러 올라타라는 것인지 푸르르 몸을 털었다 나는 낙타의 등에 올라타지 않았다 나는 사막을 지키는 전사가 아니므로 더구나 순례든 고행이든 사막으로 떠날 계획이 없었으므로 낙타를 집 밖으로 몰아낼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등에 올라타지 않자 낙타는 그만 풀썩 주저앉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낙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눈앞에 무덤 하나 덩그러니 웅크리고 있었다
저수지
바닥 전체가 상처가 아니었다면 저수지는
저렇게 물을 흐리게 하여 스스로를 감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수지 앞에 서면 내 속의
저수지의 밑바닥이 욱신거린다
저수지를 향해 절대로 돌멩이를 던지지 않는다
돌멩이가 저수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동안
내 속의 저수지가 파르르 전율하는 것이다
잔잔한 물결은 잠들어 있는 공포인 것이다
상처가 가벼운 것들만 물속에 가라앉지 않고
둥둥 떠다닐 수 있다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그들을 잡으면 안 된다
그들은 저수지의 상처가 키운 것,
저수지를 떠날 때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상처 가진 것에 대해 연민 혹은 동정을 가지면
몸을 던지고 싶은 법,
그런다고 내 속의 저수지가 환해지는 것이 아니다
꽃멀미
새가 숨어 우는 줄 알았는데
나무에 핀 꽃들이 울고 있었다
화병에 꽂으려고 가지를 꺾으려다가
그 마음을 뚝 꺾어버렸다
피 흘리지 않는 마음, 버릴 데가 없다
나무의 그늘에 앉아 꽃 냄새를 맡았다
마음속엔 분화구처럼 움푹 팬 곳이 여럿 있었다
내 몸속에서 흘러내린 어둠이 파놓은 자리,
오랜 시간과 함께 응어리처럼 굳어버린 자국들
그 자국들을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때
깊고 아린 한숨만 쏟아져 나왔다
꽃 냄새를 맡은 새의 울음에선 순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의 힘으로 새는
사나흘쯤 굶어도 어지러워하지 않고
뻑뻑한 하늘의 밀도를 견뎌내며 전진할 것이다
왜 나는 꽃 냄새를 맡고 어지러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늘에 누워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구름이 이동하고 있었다
구름이 머물렀던 자리가 움푹 패어,
그 자리에 햇살들이 피라미처럼 와글와글
꼬리를 치며 놀고 있었다
아니, 황금의 등을 가진 고래 한 마리가
물결 사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마흔도 되기 전에, 내 눈엔 벌써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사후死後의 어느 한적한 오후에
이승으로 유배 와 꽃멀미를 하는 기분,
저승의 가장 잔혹한 유배는
자신이 살았던 이승의 시간들을 다시금
더듬어보게 하는 것일지도 몰라, 중얼거리며
이 꽃 냄새, 이 황홀한 꽃의 내장,
사후에는 기억하지 말자고
진저리를 쳤다
구름의 장례식
비를 뿌리면서 시작되는 구름의 장례식,
가혹하지 않은 허공의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엄숙한,
날아가는 새들을 휙 잡아들여 깨끗이 씻어 허공의 제단에 바치는,
죽은 구름의 살을 찢어 빗줄기에 섞어 뿌리는,
그 살을 받아먹고 대숲이 웅성거리는,
살아있는 새들이 감히 날아갈 생각을 못하고 바르르 떠는,
하늘로 올라가는 칠 일 만에 죽은 아기의 영혼을 아삭아삭 씹어 먹는,
산 자들은 우산 속에 갇혀 보지 못하고 죽은 자들만이 참여하는,
지상에 흥건하게 고이는 빗물에 살 냄새가 스며있는,
그 순간 나무들의 이파리가 모두 입술로 변해서 처연하게 빗물을 삼키는,
손가락으로 빗물을 찍어 먹으면 온몸에 구름의 비늘이 돋는,
비를 그치면서 끝나는 구름의 장례식.
바닥의 힘
갓 태어나 바닥에서 자란 사람, 갓 죽을 때 바닥에 눕는다 사람의 일생이란 무어냐, 한 문장으로 줄이면 바닥에서 시작하여 바닥으로 끝나는 것이다 바닥을 딛고 일어난 힘으로 걸었고 뛰었고 지치면 쉬었고 하고 싶으면 바닥에서 정사를 나눴고 병들면 바닥에 누웠다 지하역의 노숙자도 청와대의 대통령도 바닥에 눕고 바닥을 딛고 살아간다 제 아무리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도 추락하기 시작하면 바닥에 닿는다 바닥은 추락의 마지막 지점, 바닥을 피해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해도 그곳에도 바닥이 있다 죽어 무덤에 대한 애착을 갖는 것도 바닥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바닥에 등을 댄다는 것, 그것은 바닥의 힘에 순응하는 것, 바닥이 등을 밀어 올려준 힘으로 오늘 내가 호흡을 이어간다 바닥이 등을 밀어 올려주지 않으면 영영 바닥에서 등을 뗄 수가 없다 호흡 정지, 죽음이다 생과 사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건 바로 바닥이다 바닥이 신神이다
<시인의 최근 신작시 5편>
뿔을 잘린 무소같이 터벅터벅 외 4편
내게서 조금씩 누수된
비린 시간이 아무렇게나 흘러가서 고인 곳,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곳,
무소가 뿔을 씩씩거리며 먼지를 몰고 달려올 것 같은 곳,
나보다 내 그림자가 더 빛나고 찬란해서 나는 지워진 느낌,
온전히 내 것이지 못한 시간이니 누수된 비린 시간이니
내 것이라고 당당 말하지 못한 누추함으로
나는 쪼그라들고 쪼그라들 이유 없는 그림자는 비만해지고
내 머리 위의 허공을 빙빙 도는 독수리의 눈엔
내가 순진한 먹잇감으로 보이는 걸까
독수리의 시간은 눈에 다 몰려 매서운 것이 아닐까
내게 온 모든 시간을 다 내 것으로 소유하지 못했으므로
그것들 중 일부를 독수리의 것과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독수리가 인간같이 고민해보고
내가 독수리같이 매서워져보고
내게서 누수된 시간이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떻게 소멸하는지
나는 잘 모르나,
그것들이 휘황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
그것들이 나를 더 염려하고 씁쓸해할지도 모른다는 거
내게 알맞은 시간만 내 속에 들이고 살아온 나,
내게서 조금씩 누수된 시간이 때론 궁금하기도 해서
먼지가 이는 곳으로 가면 만날 것 같아서
가 본다, 뿔을 잘린 무소같이 터벅터벅
너울거리는 빛
너울거리는 빛을 좇아 왔는데
나비가 죽어있다
너무나 많은 빛을 제 몸속으로 끌어들인 죄罪,
나비는 실명하여 죽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가끔 지글지글 끓는 태양을 똑바로 응시하고 싶을 때 있다
빛, 얼마나 치명적인 아름다움이냐고 아무에게나 말 걸고 싶은 한낮
내게 날개가 있었다면 무수히 저 태양을 향해 전속적으로 날아올랐을 것이다
날개가 활활 타오르고 눈동자가 녹아 흘러내릴 때까지
지상에서 보면
까마득한 허공의 골짜기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얼마나 황홀할 텐가
; 입술이 떨릴 만큼
한 잎의 꽃을 물고 입술의 떨림을
재웠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출발한 빛 한 줄기가
지금 내 이마를 비추는 동안
탄생 후 내가 쏟아낸 말들은
빛이 오는 길을 거슬러
우주의 어느 골짜기에 울려 퍼지고 있을까
그 말들, 혹 오는 빛에 달라붙어 기생하는 게 아닐까
손바닥에 쥔 한 줌 빛이 시끄럽다, 간지럽다, 놓아준다, 나비가 부럽다
치명적으로 빛을 사모하였으므로(?) 빛들의 웅장한 무대에서 스러질 수 있었다
칙칙한 병실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인간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고요하고 투명한 죽음이다 닮고 싶다
너울거리는 빛 속에서
숨을 내놓는다면…
빛
내가 죽으면
빛이 내 속의 빛들을 다 거두어 갈까
파리한 입술의 나뭇잎들, 빛으로 연명하는 저물 무렵
문득 든 생각이 이래
앞산이 뒷산에 포개지고 뒷산이 그 뒷산에 포개지고
그 바람에 나무들의 정강이가 까지는 소리
굶주린 일몰이
산을 뛰쳐나오는 짐승들을 소리 없이 잡아먹고 알아볼 만큼 뚱뚱해지고
짐승이 죽으면
그 속에 깃들었던 빛들을
빛이 거두어 갈까
일그러지고 냄새 풍기는 빛들을
허공의 저 맑은 빛들이 거둬가 맑도록 닦을까
내일은 이르게 무서리가 내려서
저 쨍쨍한 빛들이 좀 축축하게 젖어들었으면
죽기 바로 직전에 나는
아, 하고 입을 크게 벌려
맑은 빛 한 줌 날름 삼켜야지
그 빛으로 어둑한 저승길이 내내 환해질지 몰라
징후
새 떼가 통과하였으므로 구름은 흥겹게
산을 넘어가 스러지면서도 웃었지 그 구름,
엑스레이를 찍을 때 내 폐에서 나온 검은 덩어리지
하루는커녕 간신히 몇 시간을 버텼으나 새 떼를
흠씬 머금었으므로 구름이라 내가 이름 지어주었지
그 새 떼, 내 부러진 늑골을 용접하던 풋것들이지
내 속의 것들을 허공에 풀어놓으면서 나는 열세 번쯤 울었지
내 빈 속에 폐허의 냄새가 뭉게뭉게 퍼졌으나 아랑곳하지 않았지
밥을 먹은 기억은 없으나 일곱 번쯤 토했고 세계가 내 뇌를
빙빙 돌려 나는 땅에 쓰러졌다가 일어나기를 수십 번쯤
참지 못할 지경으로 욕이 계속 터져 나왔지
욕의 찌꺼기가 목젖에 걸려 간지러웠지 나는 웃었지
웃지 않으면 실성할 것 같아서
스러질 때의 구름처럼
구름 속에서 엉켜 푹 익은 새 떼처럼
그리고 나는 내 속에서 무엇이 서성거리는지 모르고 있었으나
피부가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지
그날 이후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요해졌지
한 번도 오지 않은 쓰나미를 기다리는 섬처럼
과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살이 깨끗하게 발린 맑은 뼈 하나,
새의 몸을 지탱해주었던 뼈 하나,
새의 속울음을 저장했던 퉁소
새의 몸속 그 퉁소, 새가 잠든 밤이면 나직이 소리를 내었다고 믿어보는
접질린 허공이 새들을 몰락시킬 때
다급하게 울렸을 그 퉁소
코팅해 보관하고 싶은 뼈
천문관측소 허공으로 별이 무참히 떨어질 때
새는 그곳으로 날아가 별빛들로 제 몸을 코팅했다고 믿어보는
먼지 가득 묻었으나
투명한 뼈 하나,
사람의 뼈는 장작으로도 쓸 수 없는데
새의 뼈는 새의 비행이 정지된 뒤에도 하나의 퉁소로 남아있다고 믿어보는
(내 몸속 뼈를 조금 잘라내고
그 자리에 새의 뼈를 이어 붙인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출처 / 시와 산문 그리고 시와 녹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