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장석남 / 꽃이 졌다는 편지
丹野
2011. 5. 23. 04:29
꽃이 졌다는 편지
장석남
1
이 세상에
살구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복숭아 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꽃이 만들던 그 섭섭한 그늘 자리엔
야윈 햇살이 들다가 만다고 쓰고
꽃 진 자리마다엔 또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살구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복숭아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그러니까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써야 할까
내 마음속에서
진 꽃자리엔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달이 뜨면
누군가 아이를 갖겠구나 혼자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대로 써야 할까
2
꽃 진 자리에 나는
한 꽃 진 사람을 보내어
내게 편지를 쓰게 하네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잘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그 바람에 뺨을 기대보기도 한다고
나는 오지도 않는 그 편지를
오래도록 앉아서
꽃 진 자리마다
애기들 눈동자를 읽듯
읽어내고 있네
- 시집 "젖은 눈" (솔, 1998)
오월, 어느 봄날
이 나무에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꽃이 피기도 전에 갔다.
꽃이 피어서 갔다.
꽃이 져서 갔다.
꽃이 다 지고 난 후에도 나는 또 갔다.
- 프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