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의 입구 / 신현락
고요의 입구
신현락
개심사 가는 길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
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
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개심(改心)하였을까
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평심(平心)의 바닥
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
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떤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저 고요의 영역 표시
경계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심(放心) 뒤에 진저리 치던
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
하물며 개심(開心)이라니!
그 구멍의 뿌리 모두 바닥에 닿아 있으므로
길은 불평의 바닥이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하지 말자
눈이 내렸을 뿐 나는 아직 고요의 입구에 있는 것이다
—《열린시학》2010년 가을호
비는 느낌표로 내린다
신현락
사람 사는 일의 잡다한 말들에 지쳐
말을 놓고 싶을 때
문득 내리는 비를 본다
의자를 창에 가까이 대고
창틀에 턱을 괸다
떠오르는 한 생각을 지우며
비는 !!!로 내린다
앞서 떨어진 비를 지우며
연이어 내리는 비의 표정은
단호하다 못해 단순하다
나는 어떤 조짐도 읽지 않기로 작정한다
어떤 계시 같은 것은 더더욱이나!
창을 열고 손을 내밀어
비를 받는다
금세 빗물이 흥건하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다
빗방울은 …로 메모장에 떨어진다.
누군가의 전화번호에 스미고
느리게 번져 가는 저 먹물의
고요한 전이,
풍요로운 물물(物物)의 교환,
말이 없으면 물물(物物)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이 다양하다
말보다 사람의 일은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하다 못해 오묘하다
젖은 대기에 스며드는 바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휴대폰을 끈다
그믐
신현락
돌아가는 목숨에는 무언가 거룩한 것이 있다
그믐은 초하루로 돌아간다 한 해는 다음 해로 돌아간다
돌아가면서도 고요를 잃지 않는 것이 그믐의 운명이다
부산까지 12시간, 광주까지 9시간이 걸린다, 는 티브이 화면으로
홑겹의 인연이라도 서로 어깨를 기대면서 가는 사람들이 다정해 보이기도 하였다
어떤 만남이든 우연이란 없다 우연한 길도 없다 샛길은 있겠으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오래된 길을 잊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그동안 수없이 유산해 버렸던 향수의 시간이 기차바퀴처럼 덜그럭 거린다
밤으로 어쩌자고 또 폭설이 내리는지 고요의 홑청을 덮은 길은 그믐처럼 지워지고
햇솜처럼 부풀었던 그 사람들 마음이라면 고향에 수천 번 닿고도 남았을 광속이었겠으나
화면은 슬로우비디오처럼 시간의 관절을 서서히 꺾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믐에서 초하루로 돌아가는 밤이었다
도상에서 초하루를 맞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에서 우연이란 없다
허무라면 또 모를까 그러나 그믐이 자신의 부재를 용서하는 것은 허무보다는 운명에 가깝다
길이 다른 길과 만나는 때를 일러 필연이라고 불렀던가
그믐의 길에는 돌아가는 것들이 가득하다 돌아가는 목숨에는 무언가 고요한 것이 있다.
* 莊子가 추구한 무위자연의 이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