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外 / 고영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 고영
너……라는 말 속에는 슬픔도 따뜻해지는 밥상이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눈곱 낀 그믐달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밤마다 새 떼를 불러 모으는 창호지문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물구나무 선 채 창밖을 몰래 기웃거리는 나팔꽃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스스로 등 떠밀어 희미해지는 바람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진즉에 버렸어야 아름다웠을 추억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약속 그래서 더욱 외로운 촛불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죽음도 두렵지 않은 불멸의 그리움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평생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안고 괴로워하는 상처도 살고
너……라는 벼락을 맞은 뼈만 남은 그림자도 살고
원고지의 힘 / 고영
원고지를 놓고 막상 책상에 앉고 보니
무엇을 쓸 것인가
그대에게 못 다한 진정의 편지를 쓸까
하늘에게 사죄의 말씀을 쓸까
달리의 늘어진 시간에게 안부나 물을까
막상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
지난 여름 내게만 사납게 들이치던 장대비가
원고지 칸과 칸 사이를 적시고
목적지도 없는 폭풍의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가 끌고 가는 기-인 강물 위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깊고 푸른 달이 반짝
말라비틀어져 비로소 더욱 눈부신
은사시나무 잎이 떨어진다
지난 과오가 떠오르지 않아 얼굴 붉히는 밤
수천마리 피라미 떼가
송곳처럼 머릿속을 쑤신다
눈에 보이지 않아 더 그리운 것들
원고지를 앞에 놓고 보면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전부가 그립다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 고영
산복도로에 한 척의 방이 정박해 있다.
저 방에 올라타기 위해선 먼저 계단을 올라야 한다.
백마흔여섯 계단 위에 떠 있는 섬 같은 방
바람이 불 때마다 티브이 안테나처럼 흔들렸다가
세상이 잠잠해지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능청스럽게 딴청을 피우는 그녀의 방은
1m 높이의 파도에도 갑판이 부서질 만큼 작고 연약한 쪽배다.
저 쪽배엔 오래된 코끼리표 전기밥통이 있고
성냥개비로 건조한 모형함선이 있고
좋은 추억만 방영하는 14인치 텔레비전이 있다.
갑판장 김 씨를 집어삼킨 것은 20m의 파고라고 했던가,
사모아제도에 배가 침몰하는 순간 그는 어쩌면
산복도로에 뜬 저 쪽배의 항해를 걱정했을지 모른다.
가랑잎 같은 아이를 가랑가랑 쪽배에 싣고
신출내기 선장이 된 그녀,
멀미보다 견디기 힘든 건 그리움이었다.
그리움이 쌓일수록 계단 숫자도 늘어
어느덧 산꼭대기까지 밀려온 쪽배 한 척
그녀에게선 사모아제도의 깊은 바다냄새가 난다.
높은 곳으로 올라야 아빠별을 볼 수 있다고
밤마다 전갈자리별에 닻을 내리는 쪽배의 지붕으로
백년 만에 유성비가 쏟아져 내린다.
그림자 / 고영
수면을 박차고 오르는 가창오리를
물보라가 따라 붙는다
저수지에 빠뜨린 제 그림자에게
덜미를 잡힌 가창오리
날개가 일으킨 파문이
목에 걸린 동아줄처럼 조여든다
가창오리 그림자 흔들리는 만큼
물그림자 흔들린다
가창오리 그림자 업고 가라앉는 물그림자
바닥까지 잠긴 가창오리 그림자
물의 지옥에서 누가 자꾸 끌어당기는가
빈 몽뚱이만 물 위에 떠서
하염없이 발을 젓고 있다
고라니 / 고영
마음이 술렁거리는 밤이었다
수수깡이 울고 있었다
문득, 몹쓸 짓처럼 사람이 그리워졌다
모가지 길게 빼고
성레발로 산을 내려간다
도처에 깔린 달빛 망사를 피해
오감만으로 지뢰밭 지난다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닌 네 개의 발이여
방심하지 마라
눈앞에 있는 올가미가
눈 밖에 있는 올가미를 깨운다
먼 하늘 위에서 숨통을 조여오는
그믐달 눈꼴
언제나 몸에 달고 살던 위험이여
누군가 분명 지척에 있다
문득 몸쓸 짓처럼 한 사람이 그리워졌다
수수깡이 울고 있었다
바람의 저항 / 고영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다
돌부리에 걸려 개천에 처박힌 적이 있었다
하늘엔 제비가 높이높이 날고,
핸들이 꺾인 자전거가
코뿔소처럼 머리를 들이박고 있었다
바람을 너무 많이 넣었군
바퀴의 심장이 터져버렸어
타이어가 찢어진 자전거를 끌어올리며
강진상회 아저씨가 혀를 차며 말했다
구부러져 내리는 햇살을 밟고
찢어진 교복에 담겨 걷던 등교 길에서
길을 껴안고 있는 돌부리를 보았다
자전거를 밀어낸 건 돌부리의 완력이 아니라
바퀴 내부에 숨죽인 바람의 저항이었다
적당히 바람이 빠진 짐자전거에 쌀가마를 싣고
불안하게 그러나 가장 안전하게,
언덕배기를 넘어 쌀 배달 가는 아저씨
둥글게 어깨를 말고 바퀴를 받아넘기는
돌부리들이 눈에 보였다
물결편지 / 고영
버드나무 냇가에 앉아
물결 하나 접어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냇물 속에는
글자처럼 몰려다니는
은빛 송사리 떼
머릿속에는
송사리 떼처럼 몰려다니는
그대 생각
물결 하나 접어
그대에게
짧은 편지를 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