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깔보다 향기가 더 아름다운 멀구슬나무의 추억
[천리포 이야기 II] 빛깔보다 향기가 더 아름다운 멀구슬나무의 추억
[2010. 9. 27]
사납게 쏟아진 비로 어수선했던 한가위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모두 평안하셨기를 바랄 뿐입니다. 비 지나니, 아침저녁 바람이 차가워졌습니다. 서두르지도 조급해 하지도 않으면서 식물은 흐르는 계절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이렇게 맞이합니다. 그래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식물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계절을 나눠보려는 제 메모 습관은 그리 나쁘지 않게 생각됩니다. 시월을 ‘은행잎 노랗게 물드는 달’로 하고, 십이월은 ‘호랑가시나무 열매가 붉게 익어가는 달’, 이월은 ‘설강화 하얀 꽃 올라오는 달’, 오월은 ‘이팝나무 꽃 활짝 피어나는 달’로 표시하는 것 말입니다.
그처럼 달력에 표시해놓고, 식물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지만, 계절의 흐름을 온몸으로 받아 안는 식물의 흐름을 따라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일쑤 식물의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곤 하지요. 멀구슬나무(Melia azedarach)가 그랬습니다. 유월에 짙은 보랏빛으로 조그마하게 피어나는 멀구슬나무의 예쁜 꽃을 올해는 이른 봄부터 꼭 맞이하겠다고 별렀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수목원의 지킴이 친구들에게까지 멀구슬나무 꽃이 피어나면 알려달라고도 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놓쳤어요. 친구들도 올해는 멀구슬나무의 꽃을 보지 못하고 가을을 맞이한 겁니다. 그런 아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뜸직하게 서있는 멀구슬나무는 천연덕스럽게 벌써 열매까지 매달았습니다. 갓 매달린 초록의 열매는 지난 초여름에 어김없이 피웠던 꽃이 얼마나 풍성했는지를 제 앞에 과시라도 하는 듯 오연합니다. 하릴없이 멀구슬나무의 꽃은 다시 또 한 해를 기다려야 만날 수 있게 됐어요.
‘본다’고 했지만, 사실 멀구슬나무의 꽃은 최소한 제게 ‘본다’ 하기보다 ‘맡는다’ 혹은 ‘느낀다’고 해야 맞습니다. 제가 기다려온 것은 멀구슬나무 꽃의 생김새나 빛깔이 아니라 향기였기에 하는 말입니다. 지난 십이 년 동안의 답사 여정을 틍틀어 제가 멀구슬나무의 꽃을 보고 그 향기를 맡은 것은 딱 한 번 뿐이었습니다. 팔 년 전인 2002년 초여름, 비오는 날이었습니다. 그나마 그때 어설프게 찍어둔 한 장의 사진이 있어 아래에 보여드립니다. 사진 마땅치 않습니다만, 어쩔 수 없습니다.
새로 난 가지 끝에서 피어나는 멀구슬나무의 꽃은 다섯 개의 꽃받침과 꽃잎을 갖고 있습니다. 가느다랗게 활짝 펼친 다섯 장의 연보랏빛 꽃잎 바깥 쪽으로 조그마한 꽃받침이 있는데, 그건, 사진 아래 쪽의 꽃송이 바깥에서 살짝 보입니다. 꽃잎 안쪽으로는 짙은 보랏빛의 수술이 하나의 통처럼 모여서 곧추 서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하나의 암술이 있습니다. 이 꽃이 가지 끝에 무성하게 모여서 꽃차례를 이룹니다.
화려한 보랏빛의 꽃 모양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더 인상적인 것은 그 작은 꽃들이 풍기는 짙은 향기입니다. 생각만 해도 코 끝이 알싸해지는 무척 강한 향기입니다. 멀구슬나무 꽃의 향기는 마치 여인들의 몸치장에 쓰는 향수가 뿜어내는 향기를 닮았습니다. 향수 중에도 기품 있는 향기입니다. 궂은 냄새를 가리려고 마구 뿌려댄 천박한 향수 냄새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그윽하면서도 강한 향기이죠. 그 아름다운 향기가 그리워 지난 봄부터 내내 멀구슬나무 꽃의 개화를 기다렸지만 올 여름을 그냥 보내고 말았습니다.
멀구슬나무는 구주목, 말구슬나무, 고롱굴나무라는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머쿠슬낭, 머쿠실낭이라고도 부르는 나무이지요. ‘구슬’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건, 가을에 맺히는 이 나무의 열매가 구슬처럼 귀엽고 인상적이어서입니다. 여러 가지 우리 말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건, 우리 곁에서 오래 전부터 자란 나무라는 증거가 되겠지만, 이 나무의 고향은 일본입니다. 오래 전에 일본에서 들어와 자란 것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동의보감이나 조선시대 선비들의 시에도 이 나무가 등장하니까요.
일본에서 가까운 제주도와 경상남도, 그리고 전라남북도에서 자라기는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 안에서는 자생지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처럼 오래도록 우리 곁에서 자라온 나무이니, 우리 나무라 해도 그리 틀린 건 아닙니다. 최근에는 멀구슬나무 가운데 전북 고창군청 마당에서 자라는 큰 나무 한 그루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로 확인되면서, ‘고창 교촌리 멀구슬나무’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제503호에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꽃 향기 아니라 해도 멀구슬나무는 특이한 점이 많은 나무입니다. 무엇보다 살충 효과입니다. 멀구슬나무는 나무 줄기에 살충 효과를 보이는 성분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멀구슬나무 근처에는 모기나 개미와 같은 벌레들이 찾아오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옛날에는 나무 줄기나 가지를 뒷간에 두어 구더기나 해충을 방제하기도 했답니다.
줄기와 가지 뿐 아니라, 열매도 살충 효과가 뛰어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구슬처럼 맺히는 열매를 옷장 안에 넣어두면 나프탈렌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소독 효과가 뛰어나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방에서 기생충 제거용으로 쓰는 것도 그런 효과 때문입니다. 또 한방에서는 열매를 해열제로, 뿌리는 구충제로 쓰기도 합니다. 같은 이유에서였을까요? 옛날에는 낙태를 위해 멀구슬나무의 열매를 이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멀구슬나무과의 나무 가운데에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로는 참중나무(Cedrela sinensis)가 있습니다. 줄기가 멋지게 쭉 뻗어오른 뒤에 가지가 넓게 퍼지는 다소 이국적인 분위기의 나무이지요. 같은 과의 나무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자라지 않는 나무로 흔히 ‘인도멀구슬나무(Azadirachta indica)’로 불리는 나무도 있습니다. 가을이면 잎 지는 우리의 멀구슬나무와 달리 상록성 나무인 인도멀구슬나무는 멀구슬나무와 여러 면에서 비슷하지만, 다른 나무입니다. 꽃만 해도 그렇습니다. 인도멀구슬나무 꽃은 멀구슬나무의 꽃과 똑같이 생겼지만, 색깔은 유백색이어서 한눈에도 다른 나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도멀구슬나무는 산스크리트어로 ‘님(영문으로는 nim 혹은 neem 으로 표기함)’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흔히 인도멀구슬나무를 ‘님트리’라고도 부릅니다. 최근 친환경살충제의 원료로 쓰는 님오일은 바로 이 인도멀구슬나무에서 추출한 것이지요. 종종 우리 멀구슬나무와 인도멀구슬나무를 혼용하지만, 두 나무는 전혀 다른 나무입니다. 물론 살충제의 원료로 쓰이는 것처럼 살충과 소독 효과가 뛰어난 성분을 갖고 있는 것까지 똑 닮았지만, 다른 건 다른 겁니다. 님트리도 옛날부터 인도에서 ‘마을 약국’이라고 부르면서 갖가지 약재로 써왔다고 하네요.
멀구슬나무의 꽃 향기를 느껴본 것이 벌써 팔 년이나 지났습니다. 짙은 향기의 추억을 하나도 잊지 않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흘렀네요. 다시 보고 싶은 마음 깊었기 때문일 겁니다. 멀구슬나무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때 멀구슬나무 꽃이 피었다며 나를 나무 곁으로 이끌고 가서 나무 이야기를 낮은 목소리로 느릿느릿 설명해 주던 우리 수목원 지킴이가 생각납니다.
그가 우리 수목원을 떠나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도 그러고 보니 꽤 오래 됐습니다. 잘 살고 있겠지요. 소식 나눈 지 오래 됐지만, 나무를 바라보며 그리운 사람 떠올릴 수 있는 건 참 행복한 일이겠지요? 다시 이 나무의 꽃을 볼 즈음에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참 반갑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사진은 충남 논산 성동면 개척리 은행나무입니다. 조선시대의 문인이자 둔갑술에 능했던 기인 전우치가 기묘사화 때 피신하며 이곳을 지날 때, 꽂아두었던 지팡이가 자란 나무라고 합니다. 때마침 나무를 찾았을 때는 하늘이 수시로 둔갑술을 부리던 날이었습니다. 이 날의 답사 이야기는 새로 연재하기 시작한 서울신문의 칼럼 [나무와 사람 이야기]의 지난 9월 16일치로 썼습니다. 이제 이 나무도 서서히 노란 잎으로 옷을 갈아입을 채비를 마쳤겠지요. 그 화려한 가을 날이 기다려집니다.
모두 풍요로운 가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